치유인문학-14-귀농은 다산의 첫 이름.
다산이 살던 마재는 고조 할아버지 정시윤이 텃를 잡았던 곳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이다. 현이 재이기 때문에 통상 마재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다산의 5대조인 정시윤이 텃를 잡았다
풍광이 아름다웟을 뿐만아니라 춘천 족에서 흘러오는 북한강과 충주 쪽에서 흘러 오는 남한강이 합해지는 양수리 일 대로명당이다.
정시윤은 당대의 학자이자 육촌형 정시한에게 수학하였고 글 잘 한다고 명성도 높았다. 진사에 급제하자 바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마지막으로 영월 부사에서 물러나 이곳 마재에서 터를 잡아서 낙향해서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터를 잡을 때 말다래(가죽으로 만들어 말타는 사람에게 진흙이 틔어오지 못하게 막는 장식)를 벗겨주고 이 땅과 바꾸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 형제, 할아버지 4형제, 아버지 3형제 다산의 4형제가 목마타고 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다산의 큰형수의 남동생 이벽, 다산의 매형 이승훈,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이 누나집, 처가집, 장모집을 자주 찾으며 다산과는 숙명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친척들이다. 이복형 정약현과 친사돈인 순교자 홍낙만이 사돈집을 찾던 곳이기도 하다. 다산의 마을은 한초창기 한국 천주교의 거물들이 모여들던 역사적인 성지임에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숙명적인 곳이다. 다산의 고조 할아버지는 두 아들이있었는데 장남인 정학신은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지만 남인들이 세를 펴지 못하던 때라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마흔 세 살에 타계했다. 네 아들을 두어 큰 아들 정지혜(1712~56)가 할아버지이다.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정지혜는 다산의 아버지 3형제를 두었는데 큰 아들 정재원이 다산의 아버지다. 다산의 5대조 이후로는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영조가 세상을 뜨고 정조가 왕위에 올라 세도가 바뀌면서 당대의 이름난 정승이던 채제공이 힘을 쓰면서 정재원도 관직에 오르게 된다. 정재원과 채제공은 같은 정파로 매우 가까웠다. 다산의 아버지는 진사과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63살에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임지에서 세상을 뜨났다. 마재에서 문과에 급제 한 것은 다산과 형 약전뿐이다.
다산은 임오년(1762)년 6월16일에 태어났다. 이날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그 다음 날이었다. 이때 다산의 아버지는 진사로 하급직에 있으면서 이런 끔찍한 사건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굳혀 태어난 첫 아들의 이름을 歸農(귀농)으로 짓는다. 농사짓는 일로 돌아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귀농이란 용어가 다산의 이름으로부터 나왔다.15살에 결혼을 하고나서 아명으로 불렀던 귀농 대신 冠名(관명)인 약용으로 불렀다. 茶山(다산)이란 호는 다산 초당에서 귀양을 산뒤에 남들이 자연스려 붙인 호이다.
2015년3월5일 정원보름에 여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