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의 기억-생선장수로 한평생 김순열(여, 1932년생)씨
2019.10.10. 인터뷰
전라북도 김제에서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평택으로 올라왔다. 젊어서부터 안정리를 드나들며 생선장수를 했다.
친정은 어디세요?
전북 김제요.
결혼은 언제 했어요?
김제서 했슈. 20살 적에.
평택에는 언제 오셨어요?
아이들 낳고 장사해서 벌어먹으려고 올라왔지.
장사는 어디에서 시작했어요?
나는 생선장사했어요. 호호
바깥어르신은?
우리 바깥양반은 일하러 다니고.
무슨 일을 했는데요?
집 짓는데 따라다니고 미장일 하고 그랬지.
전라도보다는 여기가 살기 좋았어요?
전라도보다는 벌어먹기가 나았죠. 우리 조카사위가 김제 땅을 가져가더니 안 줬어. 그런데도 어디 취직한다면 다 시켜줬어. 우리 (바깥)어른이 발이 넓어. 처음에는 경찰로 넣어주고 나중에는 자동차, 기차 회사에도 넣어 주고. 그런디도 그 나쁜 놈이 우리 땅을 가져가 버렸어.
왜 평택으로 오셨어요?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지. 우리 조카들은 다 경찰관여. 우리 바깥양반이 여기가 살기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따라온 거지.
처음 올라와서 어디에서 살았어요?
4리지. 평택4리.
4리는 집값이 비싸잖아요?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어디 산들 다 똑같지 뭐.
고생 많았네요. 생선은 어디에서 떼어다 팔았어요?
시장 안에서 떼어 왔어요. 백씨네, 한씨네. 한씨네 도매상이 세 집이었는디 그 집에서 떼다가 팔았지.
주로 무슨 생선 팔았어요?
계절마다 다르지. 그 때만 해도 갈치, 오징어.... 그런 거 팔았지. 안정리 포주들이 양색시들 밥해서 먹이고 했으니께 아침 일찍 장사 나가야 했어.
그럼 안정리로 장사 다녔어요?
나는 안정리로 많이 다녔어. 단골이 많아서 팔러 가면 아침에 다 팔았지.
한 번 다녀오면 얼마나 벌어요?
아침에 일찍 나가서 장사하면 하루에 두 번도 팔러 가고 그랬어.
바깥어르신 벌어오고, 어르신 벌고 돈 많이 벌었네요?
남자들이 돈 벌어온다고 해도 술 쳐 먹고 뭘 벌어. 남자들이 돈 번다고 여자한테 주나. 그러면 부자 됐어요. 우리 남편은 장사 갔다가 오면 옆집에서 그래. ‘아줌마 아저씨가 쌀 퍼 같고 갔어’라고. 그거 갔다가 술 퍼 먹고 노름하고 그래. 남자들도 그런 놈들끼리 놀아.
어르신은 집을 언제 샀어요?
집은 무슨 지금도 남의 집 살지. 그래도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애들이 잘살아. 그것도 아주 잘 살아서 다행이야.
자녀들은 어떻게 잘 살아요?
사업도 하고 부동산으로 재테크해서 돈 벌고 해서 잘 살아. 며느리들도 다 똘똘하고.
바깥어르신은 돌아가실 때까지 노동일만 했어요?
해방 전에 일본 가서 있다가 왔어.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남자는 집안일은 깜깜혀. 아들들이 엄마 고생하는 것 봐서 그런지 술도 안 먹고 착해.
어르신은 생선장사만 하셨어요?
계속 생선장사만 했지, 다른 건 안 하고. 생선장사하면 뭐 혀, 외상값 떼이고 남는 게 없어. 옛날 장사는 외상값에 죽어.
어르신은 안정리에서 장사했으니 현금장사 했겠네요?
그렇지, 거기는 순전히 현금이지. 양색시들은 미군들이 들락거리니께 반찬이 없으면 안 되잖어. 그래서 많이들 사 먹었어.
기지촌에서 장사하시면 미군들이 같이 놀자고 안 해요?
그렇지는 않어. (동네 어른들) 저 양반은 전라도에서도 양반이라 말을 잘 안 해. 험담도 잘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