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적으로 세상과 사건을 보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 세력 간의 대리전쟁이라 한다.
서방 세력과 동방 세력 간의 패권 경쟁이다. 서방 세력은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이에 가담한 캐나다, 호주, 남한이다. 동방 세력은 러시아와 이에 가담한 중국과 이란, 그리고 북한이다. 하나의 민족이 둘로 갈라져 서로 다른 쪽의 전쟁에 가담하는 경우는 한국 말고는 없다. 6. 25동란이라 일컫는 한국전쟁의 재판인 셈이다.
왜 남한과 북한은 이념적으로는 물론 정치, 군사적으로 적대하는 사이로 벌어졌을까?
여기에는 인과 연을 따져봐야 한다. 因으로는 한민족의 共業이 있다.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결과이다. 좌우가 합작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민족 해방군이란 이름으로 한반도로 진군하여 자립적으로 해방을 쟁취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소의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리고 미소 양대 세력의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그네들의 위성국가로 건국되었다. 곧이어 냉전체제 속에서 필연적으로 적대관계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남한과 북한의 민중도 서로 반목하며 증오심을 키워갔다. 남한 내에 좌우의 대립,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상존한다. 극우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배타와 혐오는 늘어난다. 갈등과 대립은 공동체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심하면 고질적인 병폐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분열하여 갈등했던 건 아니다. 이는 한민족의 특성이 아니다.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되기 전의 조선이나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이전의 남한은 마을공동체 문화가 남아 있어서,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보살피고 도와주는 상부상조의 미풍이 강했다. 지금같이 부익부 빈익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 돌림, 정치적 파당으로 나뉘어 서로 혐오하고 분노하는 풍조는 없었다. 민족성이라든지, 국민의 정서, 이런 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정치 환경적,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한때 그렇다고 본래부터 그랬다거나, 영원히 그럴 거라고 단정 짓지 말자. 인연이 그리되어서 지금 그렇게 드러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미 여기에 맞이한 현재는 가공되지 않는 원재료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현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펼쳐진다. 우리 각자는 한민족이 짊어진 공업의 주인이다. 우리의 지혜와 사랑, 헌신과 봉사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휘몰아치는 태풍의 중심에 눈이 있어 일체를 알고 본다. 이것이 연기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