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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노하신 하나님 당황케 해드리기>의 줄거리: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나는 네 대적이라" 이 구절들이 모두 하나님이 선민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내 삶에 퍼부어질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당황케 해드려 마음에 무장하신 진노가 흐트러지게 하는 겁니다. 나도 나에게 진노하면 하나님은 무척 당황해 하십니다.
진노하신 하나님 당황케 해드리기
(예레미야 21:1~14)
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9.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진노하신 하나님 당황케 해드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 당황케 해드리기’
제가 집사람과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부끄럽게도 고등학교 3학년 되던 해의 3월이었습니다. 공부를 해야 될 때에 순자 노자 성경 불경을 보고 있었고, 당시에 노자의 도덕경을 7번 정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게 되었고 재수를 할 때에도 앞서 말씀드렸던 책들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읽었습니다. 결국 삼수를 하고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재수를 할 때에 저는 장인장모 되실 분들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따님과 결혼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니 집안 전체가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에 저희 집 형편은 극히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달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저는 대학을 못 들어가고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삼수에도 실패하고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카투사에 배정을 받아서 근무하게 되었고, 카투사는 3주마다 한 번씩 금토일에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부산에 계신 장인장모 되실 분들을 대여섯 번 찾아갔습니다. 집사람은 당시에 숙대 3학년을 다니고 있었기에 제가 찾아뵈었던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제가 군복을 입고 찾아가면 어른들께서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공부해서 대학도 들어가야 하는데 연애나 결혼이 웬 말이냐”라고 저를 타이르시고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맞습니다. 이 나이에 결혼을 한다니 말도 안 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교회의 수석장로님이셨던 장인어른이 젊은이를 설득시키고자 애써 점잖게 타이르시는데 이렇게 대답하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가 맨 처음 찾아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했던 것은 한 마디로 미치광이 짓이었습니다. 아무리 못 배우고 철이 없기로서니 이런 상황에서 무슨 결혼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저의 태도와 말을 제가 공격했던 것입니다. 두 분이 당황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나면 이상하게도 어른들께서는 저를 위로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은 제대하고 나서 들어가면 될 것이고, 젊었을 때 2~3년 늦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제 편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당황하고 나면 방어하려는 마음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여섯 번 찾아뵙는 동안 저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습니다.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와서는 “이 결혼은 절대 안 됩니다. 저는 결혼할 자격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하고 있으니 화를 내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결국 저는 군대에 있으면서 시험을 봐서 제대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해 9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재미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마치 저희 장인장모 어르신들 같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진노로 무장하신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이 그 대답을 2,500년 전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을 당황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황케 함으로써 진노로 무장하신 마음을 흐트러뜨려서 잦아들게 하는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당황시킬 수 있고, 그리고 이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한 멸망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추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아닌 상태에서 자기 주체성을 활성화시켜 살아가는 모습이 추악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아니라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인류를 향한 멸망과 진노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게 성전과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바로 하나님을 당황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남 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세 차례에 걸쳐서 침공을 했습니다. 1차 침공 때에는 여호야긴 왕을 물리쳐버리고 삼촌이었던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음대로 하기 위한 괴뢰정권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반 바벨론 정책을 일관되게 펼쳐나갑니다. 주변의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나라들과 반 바벨론 동맹을 맺게 되자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소환해서 충성을 다짐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기고 이번에는 애굽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대항합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이 BC.588년에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게 됩니다. 시드기야는 애굽의 도움으로 일시적인 위기를 모면하는 듯 했으나 결국 BC.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도망가던 중에 붙잡히게 됩니다. 자기 눈앞에서 아들들이 참수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두 눈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포로로 잡혀갑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아직 전격적인 침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예언에서 일관되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해왔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적 권유는 얼핏 반민족적이고 매국적이었기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기도 하고 적대자들에게 넘겨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애굽에 손 벌리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합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이러한 예레미야의 주장이 도무지 살길로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전리품 같이 되리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 가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다 죽으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 없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 유다는 선민의 나라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항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에게서는 이 항쟁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선민에게는 나라의 운명보다 더 우선적이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리시기 위한 뜻도 가지고 계시고 화를 내리시기 위한 뜻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신명기에서부터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내용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복과 화를 주실 준비가 되어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리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선민들의 살길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통해 선민의 나라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많은 예언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진노를 마주할 때에 해야 되는 대처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든 화를 내리시든 무조건 그 뜻을 붙잡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칼로 죽이시겠다고 결정하셨다면 그 뜻을 받아들여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괜히 화를 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복을 주시려고 뜻을 결정하셨으나 선민들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시고 돌이킬 것을 가르치시며 때로는 징계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선민들이 돌이키지 않자 결국 진노하심으로 화를 내리셔서 이들을 멸망케 하려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고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붙잡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겠다고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난파되어서 물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당장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물이 너무도 싫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의지할 수 있는 것도 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풍요와 다산입니다. 부자 되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승진하는 것, 자녀의 형통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다른 것을 좋아하는 상태가 견고하게 유지될 때에 하나님은 멸망을 결정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망이 결정되었을 때에라도 최선의 길은 있습니다. 나를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선민들에게 성 밖으로 나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을 동원해서 예루살렘 성을 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살길도 열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벨론에 멸망해서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을 보면 항복해서 잡혀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의 의미가 뭐냐는 것입니다.
항복은 곧 내가 지금까지 일궈온 삶의 터전을 모두 잃는 것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없어져도 마땅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시려고 할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이제라도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이런 결과를 불러온 나의 육체의 행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회적인 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사회적인 나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6장을 보면 다윗에게서도 이러한 일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도망할 때에 사울 집안의 사람 시므이가 와서 다윗을 욕했습니다. 7~8절에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군대장군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오히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말하며 저주를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인 나를 비난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비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놈입니다.”라는 자세가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취해야 될 바른 태도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깜짝 놀라고 당황하십니다. 장인장모님 앞에서 내가 나를 욕했을 때에 그분들이 당황하셔서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말씀드린 대로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출발하는 진노의 마음과 동시에 사랑의 마음이 있으셨기에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는 원죄를 가진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마땅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공의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아들 예수님을 죽이셔서 그 진노를 피할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저 참혹한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어야 함을 깨달을 때에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진노로 무장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흐트러지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나의 뜻을 주장하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가장 더러운 죄입니다. 나의 뜻을 주장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 자리에 이 세상 것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청결은 곧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있는 것입니다. 김치는 깨끗한 음식이지만 하얀 실크블라우스에 묻으면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끌어안은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부모의 마음은 실크블라우스와 같습니다. 한편 자녀는 김치입니다. 어느 것도 더럽지 않으나 끌어안을 때에 더러워집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상태에서 내 판단과 생각대로 자녀를 대해온 모든 삶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저렇게 십자가에 달려야 될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진노하실 수 없습니다. 오히려 눈물 나도록 감동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비록 내 육신을 괴롭게 하는 일일지라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설령 나를 죽이겠다고 하실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황하시고 또 감동하십니다.
이것은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확인했다면 삶의 현장에서도 십자가는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 앞에서 항복하는 것은 애국적 차원,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으로 바뀔 것이고 감동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결입니다.
직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기를 바라신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공격하세요. 사장님을 대할 때에도 부장님을 대할 때에도 나는 죽어 마땅한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원수처럼 여겨지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하고 더럽고 추악한 자임을 먼저 인정하고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와 자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죽어야 할 자임을 인정하고 있을 때에는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마음에 확실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일어나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안 되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고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고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당황하시고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삶은 은총위에 은총으로 바뀌고 범사에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하나님을 갖는 방법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에 같은 마음이 되어서 내가 나를 향해 진노하세요. ‘나 같이 나쁜 놈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처참하게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담 이후의 인간에 대해 공의로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당황하시면서 진노를 거두실 것이고, 내가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곳을 복의 자리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함께 나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길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복으로 바꾸시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나를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복이 되게 해주셔서 가는 곳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복의 샘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