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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1
설교 제목: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설교 목적:
최근에 나는 목회자들의 추문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다. 그 이유에 대한 해설도 들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나는 새롭게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이 삶의 방식과 추구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깨우침이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 교회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침이다.
이번 설교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옥한흠 목사는 오정현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예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어떤 나무인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 나와 우리 교우들이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설교 개요:
1. 목회자의 추문
2. 우리가 구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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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회자의 추문
지난 두어 주 전에 저는 어떤 젊은 목회자의 추문(醜聞)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많은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버로서 유명인이 된 그 목회자는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하여 고백을 했습니다. 평소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그런 소식을 제가 좀더 들여다본 이유는 저의 지인이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추문은 대중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뉴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기도를 해 주는 목회자들이 왜 타락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목회자인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즉, ‘나는 어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봅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앙과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적은 시대에 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열광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왜 어떤 이단의 무리에게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요?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몇 가지 특징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목회자들에게는 신적인 계시나 영감 또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목회자는 특별하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그 목회자가 특별할까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대중 앞에서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을 쓰러뜨리는 능력을 선보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물을 사용하고 카드를 주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반응을 합니다. 소위 ‘은사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40~50년 전에 유행하던 그런 운동이 지금도 어떤 사람들을 열광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자신을 단장하면서 재림의 징조들을 살피라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그런 경고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진실된 목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의 대열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흔히 휴거 뒤에 남겨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을 강조합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으면 기도가 응답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목표를 문제 해결과 기도 응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교회의 부흥을 간절히 바라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바람도 함께합니다.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수단이 곧 옳은 길이라는 생각도 이런 욕망에 슬쩍 편승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여러 교회의 청소년들을 모아 합숙하게 하고 그들을 자기의 양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단체에 청소년들을 보냈다가 피해를 입은 목회자의 절규를 저는 들었습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갈망이 교회마다 있습니다. 그런 갈망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거짓 교사들이 오늘에도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찾아보다가 호주에서 시작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진 힐송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추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같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찬양을 통하여 끌어 모았습니다. 새로운 방식의 예배와 문화 트랜드를 도입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그렇게 세력이 커지면 목회자가 타락하게 되는 것은 이제는 공식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련의 이런 흐름을 보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려움에 시달린 사람은 평안을 원할 것이고, 외로움에 치를 떠는 사람은 친구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이 싫은 사람은 부자가 되는 길을 알고 싶을 것이며,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들은 영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곳을 찾을 것입니다. 마치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친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그를 향하여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출애굽기 32:8)고 경배하며 춤을 추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그것을 구합니까?
2. 우리가 구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구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각각 믿는 바가 다르므로 구하는 바가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32
이방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자기 신에게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과 달리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믿기에 그들과 같이 그런 것을 구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염려(念慮)라는 단어를 한자로 생각해 보면, 지금(今) 나의 마음(心)에 있는 것이 염(念)이며, 호랑이(虎)가 가까이 있을 것을 가정(思)하는 것이 려(慮)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지금 나에게 어떤 두려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염려를 메림나(merimna)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일부분(meros)만을 생각하고 마음이 나뉘어지는(merizo)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린 아이들이 더 많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면 엄마가 외출하시거나 출근하셔도 돌아오실 것을 알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늘의 아버지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엘리사는 아람의 군대가 자기를 둘러 진치고 공격하려 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셔서 그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종은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 두려워하고 염려했습니다(열왕기하 6장).
여기서 우리는 염려하며 무엇을 구하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우리가 필요하지 않는데도 염려 때문에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음식입니다. 그리고 입을 것은 의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실하게 살면서 그런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것이 부족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준다고 미혹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보험과 각종 연금상품이 제공됩니다. 몸매를 더 돋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각종 음식과 영양제, 그리고 운동상품이 제공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홍보가 되거나 돈을 벌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를 미혹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염려하는 곳을 공략합니다.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은사주의자들이 활개를 칩니다. 종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종말론자들도 지금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실 인터넷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부류가 이런 종말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신사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 기독교회의 현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 우리가 속한 오순절 교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피터 와그너가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사도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영적 권세를 행사하고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이 ‘직통계시’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에 예언하는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은 분별하며(고전 14:29), 그리고 예언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제를 받습니다(32절). 교회 안에서 예언도 한 사람의 것을 절대화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하게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배우려는 태도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듣는 가운데 의문이 생기거나 다른 생각이 들면 그것을 내어 놓고 서로 의문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염려는 부분적으로 알기에 두려워하고 마음이 나뉘는 것이라면,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온전하게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볼 때 저도 한때 은사주의에 사로잡혀 영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는 소위 ‘은사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에 조종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은사자에게만 특별히 함께하시고 그들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여 이 세상의 일에서 마음을 돌이켜 다가올 휴거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서 더 이상 종말론자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는 언제나 심판이 일어나며, 그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불의가 바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며 두려움의 날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생각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수많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이단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 영혼 천당 사상’, 즉 죽어서 하늘에서 누리게 될 세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최근에 연예인들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대중 앞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의 수련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배운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구원파의 사상을 전하는 음악인 박진영 씨가 있습니다. 그의 강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구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교회가 가르친 바와 유사하기 때문에 분별하기 쉽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박진영 씨와 같은 구원파적 이론으로 성경을 강연하는 이들을 쉽게 도려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의 주장과 많이 다르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박진영 씨의 가르침은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방법을 성경이 알려준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셨고 다시 사셨으므로 그분을 믿는 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자리잡으면 그는 구원, 즉 영생을 확신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원이 이렇게 개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이 설명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면 금방 본질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것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을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지 이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구하고 가르치는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염려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이나 이단에 치우친 사람들은 결국 부분적으로 알고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여 마음이 나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시므로 다른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영적인 일을 먼저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일을 먼저 하고, 또는 예배를 먼저 드리라는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개인의 사업도 가정도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이해하고 나니 이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양식과 쓸 것을 다 아시고 필요한 때에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것을 구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할 것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의 차이입니다.
이방인은 자기 염려 때문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염려하느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오로지 죄 없이 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생각하기에 늘 자기를 점검하는데 세월을 보냅니다. 마틴 루터나 어거스틴이 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을 향하여 굽어진 삶’(homo incurvatus in se, human’s turn upon themselves)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도덕적인 완성을 위해 자책과 자학의 삶을 산다면 그것도 역시 자신을 향하여 굽어진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끊임없이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에 갇히게 된다면 그 본래적인 사명인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고 나누어 주는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회개하고 도덕적으로 정결한지 여부를 스스로 점검하고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는 그런 삶은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있는 삶입니다(톰 라이트, 십자가의 의미, 2017).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만을 위하여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 그는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삽니다.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향하여 굽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도중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건져주고 여관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왔습니다(누가복음 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을 향하여 굽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도덕적으로 흠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제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모범생이거나 아니면 세속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웃이 되어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좋지 않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열매를 맺은 이유는 그들이 좋지 않은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좋은 나무와 좋지 않은 나무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물론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엇을 쌓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마 12:35, 눅 6:45)는 점을 생각한다면 마음에 쌓고 있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곧 드러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은사주의에 빠져 남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을 강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타락할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은 진실하지 못한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착취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곳에는 은사자를 신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거짓 정보로 그를 포장하거나 신비한 물이나 물건을 사람들에게 제공하여 미혹하는 일이 잦습니다. 어떤 은사집회에서는 미리 짜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쇼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중을 기만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금이빨이나 금가루 같은 일로 얼마나 사람들을 속였는지 보고 들었습니다.
종말론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그런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92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다미선교회 같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나쁜 열매를 맺은 열성파들입니다. 그때 그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어지럽혔습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공산주의 사상에 잘못 물들어 사회를 뒤엎을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부자들을 인민재판에 세우고 그들의 집을 약탈했습니다. 어떤 나무가 좋지 않은 열매를 맺는다면 그 나무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사람으로 비유할 때 그 마음에 악한 생각을 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기도회에서 저는 기도팀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첫번째 기도제목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기를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해병대원 채수근 상병의 죽음을 조사한 박정훈 대령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의 진실이 드러나 억울함이 풀리기를, 그 결과로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정직과 진실이 더 크고 중요한 가치임을 드높일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는 좋은 나무입니까? 저는 금요일 밤 기도회에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강도만나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하여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우리도 이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교분리 등의 이유를 들어 못 본 척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구나! 고통받는 사람이 찾을 교회는 안 되겠구나! 이런 나무는 결코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골짜기 깊은 곳에 숨겨진 동네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살고 스스로 숨어서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을 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세상이 그릇된 길로 갈 때 바른 길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릇된 은사주의나 종말론 또는 세속적 성공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런 생각을 몰아내기 위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경륜을 가득 채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금년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금년의 우리 교회 표어인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일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고넬료는 주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저에게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나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과연 그런가 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