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늦가을 저녁 7시......
새로운 그룹을 창설한다는 대학 선배들 모임에, 대학 은사이신 이봉상선생님의 추천으로 종로에 있는 태을 다방에 나갔다. 낡은 모조건물 2층 다방 창가 쪽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신종섭 선배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학교 선생님이라고 여길 정도로 검은 테 안경에 단정한 머리 그리고 깔끔하게 정장을 한 모습이 매우 인자해 보이면서도 매사에 빈틈없는 꼼꼼하고 철저한 분으로 느껴졌다.
그 후 1978년 상형전을 창립하면서부터 그전보다 더 자주 뵙게 되엇다. 선배님께서 시간이 갈수록 나를 아껴주시고 보살펴 주시어 깊은 사랑을 듬뿍 으끼며 지금까지 절친하게 정을 돈독히 쌓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6.25사변으로 인해 독자가 된 나로서는 부모님까지 일찍 여의고 나니 친형님깥이 모든 것을 의지하며 많은 위안을 받고 삶을 충전하였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늘 일사동 단골집에서 저녁시사를 함께 한 후 담배연기 꽉찬 탐골 골방에서 막걸리 잔을 주고받으려 살아온 기쁨과 힘든 삶의 여정, 그림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좌걸, 세상에 대한 희망과 원망등 앞에 놓인 직장과 가정의 사소한 현안까지 노닥거리다보면 어느새 ㅊ위기가 올랐다. 이때쯤이면 이근선 선배님의 "개고기"주사를 시작으로 신종섭 선배님의 "부용산" 그리고 내 십팔번인 "워싱턴광장"으로 이어져 술판 분위기는 극에 달해 그 여흥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3차로 이져, 우이동 한양크럽까지 몰고 왔다. 양동이 변기통에 찌든 냄새가 진동하는 화장실을 취중에도 코를 막고 들락거리면서도 정 많았던 한마담의 애교스런 서비스(?) 때무에 귀가 시간은 어김없이 새벽이 되었다.
또한 내 직장이 미아리였기에 퇴근 후 자주 만나 우리를 VIP로 모시던 미아리 삼성홀, 대지싸롱, 벌집 등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단골술집에서 새벽까지 마시며 서로가 먼저 술갑을 내려고 실랑이를 벌리던 때가 엊그제 같다.
삶과 예술의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이렇게 진솔한 멋스러움이 있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끈끈한 정으로 응집되어 혈육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내가 파리로 떠나기 전날밤 선배님들께서 마련해 주신 환송회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여흥에 취하다, 통금 위반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셋이 밤을 새우고, 이튿날 ㅈ즉심에 회부돼 벌금을 물고 정오에 석방되어, 두부 집에서 해장을 하고 바로 공항으로 나가 파리로 떠났던 일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기에, 그 헤아릴 바 없는 고마움에 지금도 가슴저려오곤 한다.
우리 세 사람은 화단의 삼총사로 일컫게 되엇으며 1983년 12월 "동덕미술관"에서 "서양화 3인전"을 갖으면서 많은 화우들러부터 부러움과 찬사를 받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선배님들과 정이 끈끈하게 깊어져 나도 선배님들 따라 우이동으로 이사를 해, 가족들까지 친형제처럼 가까워 언제든 부르면 오가는 사이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내 생에 반세기가 가가워 오도록 선배님과 희노애락을 같이 했던 셀 수 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면서 얼굴 한 번 붉힌 적 없이 시종일관 변함 없는 모습으로 나를 걱정해주시고 아껴 주심에 항상 친동기간의 정을 느꼈다.
선배님의 자상하고 정겨운 나눔은 누구에게나 소홀함이 없고 호의적이나, 때로는 끊고 냅음이 분명할 때도 있다. 특히 캔버스 앞에서는 정제되고 차분하며, 오히려 오기스럽게 파고드는 끈질김이 남다르다. 일관된 철학과 깐깐하고 정갈한 신념이 있기에 반세기를 우이동 삼각산 자락에서 예술혼을 펼치며 살고 있다.
산이 좋아 그 곳에쿧혀 살며, 백운대 인수봉 만장봉 오봉등 빼어난 연봉들과 마주하며 끝없이 밀어를 속삭이고, 떠날 줄 모르고 산의 소리만 듣고 사는 그 고집스런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럽다. 산은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감동을 담아내지 못하면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예술적 신념 때문에 작가의 척저한 대상 친화적 심경이 잘 드러나 있기에, 선배님의 산 그림은 자연 속에 몰입해 온 오랜 체험과 감동의 소산물이다. 선배님의 작품은 자연 속에서 발견하고 채득한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이 그림으로 표현 되었을 때에는 대상이 되었던 자연을 떠나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계곡과 나무 등 잡다한 것들이 모두 보인다. 그러나 멀리서 볼수록 잡다한 것들은 점점 사라져 버리고 내밀한 속삭임을 감추고 최소한의 자기 외형인 스카이라인만 드러낸 채 화폭을 온통 산들이 지배하게 된다. 가슴속으로 크게 감동한 산을 복잡하게 그릴 이유가 없다. 구도의 명쾌함과 강렬한 색상의 내면적 이미지 내지 시적 요소가 중요함으로 숨 막히는 대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며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조형언어로 산과 내밀한 언어 소통을 하면서 산의 소리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안나 푸르나의 마차푸채봉,알프스의 융푸라우,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같은 세계의 명산들을 여행하면서 신이 빚은 비경의 거산들을 시각체험을 통해 창의적인 단순화와 살아 숨쉬는 색상으로 작품성을 부각시킨 근작들은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고 잇다. 이제 더 큰 산을 탖아가, 산 속에 안겨 산의 소리를 듣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 것이며, 그 자체가 그의 예술정신과 창작의욕에 솟구치는 도래샘인 것이다. 이렇 듯 그림에만 몰두해온 외골수 회화 일생을 지금 여기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대형 화집을 출간하신다니 너무 반갑고 기쁜 일이다. 화집은 작가의 화력을 총 정리하고 전 생애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 지상회고전의 의미를 띄게 되며,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미술사적으로 조망할 수 잇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선배니므이 화집 발간을 경건한 자세로 축하드리며 또 하나의 진일보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