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은 신라의 서울이었던 서라벌 남쪽에 솟아 있는 산이다.
서라벌은 선도산, 금강산, 명활산이 연봉을 이루며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남산은 남쪽에서 경주 분지를 수호하고 있는 산이다. 중심 봉우
리는 468m의 금오산(金鰲山)과 494m의 수리산(高位山)으로 남북으로 길
게 엎드려 있는 거북이 같은 형상이다. 남산의 지세는 동남산은 가파르
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으로, 남북길이는 8km,
동서너비는 4km이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산 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40여 개의 골짜기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기암괴석이 많아 뜻밖의 명산
임을 실감하게 된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도 이곳이며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지도 자리
잡고 있어 개국 초부터 신라 사람들에게 신성한 산으로 숭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산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에서부터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羅井)과 신라 국방의 심장부였던 南山城, 王陵, 갖가지
佛蹟,그리고 신라의 종막을 내리게 했던 鮑石亭이 자리잡고 있어 신라
역사의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전파된 이후 남산은 천상의 부처님
이 내려와 머무는 도솔천의 세계로 숭앙받아 수많은 절들이 세워지고 탑
과 불상이 바쳐졌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120여 곳의 절터와 7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탑이 산재했던 곳으로 남산 구석구석에는 절과 불상이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독립된 지역에 불상과 탑이 집중된 경우는 경주
남산이 유일한 곳이다.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체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
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한 신라는 7세기 초부터 남산을 성지로 개발하였고
그 사업은 통일대업을 이룩한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전국토를 불국토
화시켜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통치하려 했던 신라문화의 상징적 의미
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축대와 석
불,석탑 등은 당시의 웅장했던 남산의모습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연과 불교 신앙이 일체가 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산의 佛
蹟 그 자체는 신라인이 꿈구었던 이상적인 佛國土의 세계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금 경주 남산은 무너진 절터나 목 잘린 돌부처가 무상할 뿐
이다. 고려왕조가 들어서면서 도읍이 송도로 옮겨간 후 경주는 한반도
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전락, 화려했던 옛 명성을 회복하지 못
했다. 더구나 성리학으로 지배이념이 바뀐 조선조에는 불교에 대한 박해
가 이루어져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탑은 무너지고 불두는 잘리고 절터
에는 무덤들이 들어서고......
그런데 이 폐허의 땅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친
밀한 감정을 전해 준다. 무덤과 어울린 적막한 분위기는 옛 시절의 화려
했던 역사를 모두 자연의 한 부분으로 육화시켜 더욱 큰 생명력으로 드
러나게 한다. 풍화되지 않는 옛 사람들의 살냄새가 배어나올 것 같은
산야에 천둥벌거숭이처럼 서 있는 탑과 불상들, 경주 남산의 매력은 여
기에 있다.
불교유적 이외의 유적들
남산은 신라불교의 聖地라고 할만큼 불교유적들이 많은 반면 선사 및
고분 유적들은 산자락의 일부 왕릉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
다. 남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新石器時代 말기부터로 생각되며, 靑銅器時代에
는 남산의 꽤 높은 골짜기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산의 古墳遺物은 다른 어떤 유물보다 빈약한 편이다. 신라시대의
고분 유물이 일부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확인
할 수 없으며, 신라 말기 및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으로는 용장골,비파골,
불곡,장창곡 등에서 몇 기의 파괴된 石室墳이 확인되며, 유물로는 石室
墳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류와 石棺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골호(骨壺,뼈가루단지) 가운데 남산에서 출토된 예도
역시 드문 편이다. 그러나 신라 골호 가운데 출토지가 알려져 있는 것은
남산 출토품 외에는 드물기 때문에 이 중에는 남산에서 출토된 것도 상
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남산 출토의 골호 가운데 표
면에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녹유골호(綠釉骨壺)와 중국제의 청자양이호
(靑磁兩耳壺)를 내호로 사용한 삼릉 출토 골호는 주목되는 예이다.
남산의 북쪽 산허리인 해목령(蟹目令)을 중심으로 여러 골짜기를 둘
러싸고 있는 남산신성(南山新城)은 신라 국방의 중심지이다.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 記念碑는 신라 中古期의 지방 통
치체제와 역력(役力) 동원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 구성, 촌락민의 생활상
을 보여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특히 이 비석에는 3년 안에 성이 무너
지면 어떤 벌도 달게 받고 다시 와서 쌓겠다는 맹서가 새겨져 있어 오
늘날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가운데 불국토신앙은 오직 신라에서만 찾
아볼 수 있다. 특히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주창한 불국토신앙(佛
國土信仰)은 이 땅의 산하를 신성한 부처님과 위대한 보살(菩薩)들이 머
무르는 땅으로 변모시켰다.
그럼 왜 불국토신앙이 신라에서만 일어났으며, 왜 자장스님은 이를
크게 부각시켜야만 했던가? 앞에서도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다시 한 번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삼국 가운데 불교의 공인이 가장 늦은 나라는 신라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왕권이 확립되어있었기 때문에 왕실에서의 불교신봉으로 불교의
전파는 어려움이 없었고, 쉽게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러나,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의 왕권은 육촌장을 중심으로한 씨족적 민간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고,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
문에 대륙문화의 수용에 폐쇄성을 보이고 있었으며, 불교가 민족신앙에
위배된다고하여 배척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에 불교를 반대하는 이유로써, '어린아이같은 머리에 이상
한 의복을 하였으며(童頭異服) 고래(古來)의 믿음과 위배되기 때문'이라
고 언급한 것은 민족신앙과의 갈등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 14년(527)에 불교가 공인된 뒤에도 그것이 서민의 신앙으로 정착
되기까지는 필연적으로 남다른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라불교가 당면한 근원적인 과제는 불교가 신라땅과 민접한 관련이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나아가서 이 신라땅이 불교와의 단
순한 인연처가 아니라 '불국(佛國)이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그와 관련된 기록을 요약해 보자.
(1) 신라의 서라벌에 있는 신성한 일곱 군데 땅은 비바시불 이래
과거의 일곱 부처님이 수행하고 설법하였던 장소라는 것.
(2) 황룡사에는 가섭불이 설법하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는 것.
(3) 인도불교의 중흥조 아육왕(阿育王)이 석가삼존불을 만들고자 하였
으나 실패하게 되자 황금과 철을 배에 실어 불연(佛緣)이 깊은 국토에
가서 불상을 완성할 것을 꾀하였는데, 신라에 이 배가 닿아 진흥왕 35년
(574) 불상을 완성시켜 황룡사에 봉안하였다는 것.
(4) 자장율사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옆에서 만난 신인(神人)의 권유
에 따라 귀국하여 황룡사에 구층석탑을 세우고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부
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백립(粒)을 탑 속에 봉안한 것.
이와같은 시도는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인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
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이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
인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이 긍지를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게끔 하
는 중요한 정지작업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산과 관련된
불국토신앙을 살펴보도록 하자.
< 낭산(狼山) >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善德)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다.
"도리천에 나를 묻어 달라."
욕계(欲界)의 제2천(天)으로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으며 제석
천왕(帝釋天王)이 지배하는 세계. 이 도리천을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신하들은 여왕의 분부를 듣고 어리둥절해 하기만 했다.
이에 여왕은 그 곳이 낭산의 남쪽 봉우리라 하였으며, 그리하여 사람들
은 여왕의 능을 지시한 곳에 만들게 된다.
여왕이 죽은 지 30여 년 만에 그 능의 아래 쪽에다 사천왕사(四天王
寺)를 짓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여왕의 예지에 탄복을 하였다.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四王天)은 욕계의 제1천으로서 수미산의 중턱
지점 4방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신라인들은 이 낭산을 수미산으로 보았다. 불교의 우주관을 전
개시킬 때 세계의 중심에 두었던 수미산이 곧 낭산이라고 보았던 것이
다. 그들의 낭산을 중심으로 한 세계중심사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
다.
신라인들은 낭산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하천을 팠고 주위의 산들까
지도 불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모든 산봉우리
에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이나 불교의 지고한 사상을 담은 용어들로 바
꾸어 불렀다. 그리고, 그 산 속 모든 곳을 부처님이 상주(常住)하고 부
처님이 숨쉬는 도량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지금도 낭산의 남쪽에 있는 경주 남산(南山)을 찾으면 그 때의 향기
를 너무나 짙게 맡을 수가 있다. 남산의 바위 하나하나, 불상 하나하나
에서 불국의 얼을 심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남산(南山)과 신라인의 불교신앙 >
남산의 불적(佛蹟)은 산과 조화를 이룬다. 김시습(金時習)이 은거하
여 <금오신화 今鰲新話>를 쓴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삼층석탑과 원형불
대좌(圓型佛臺座)만 보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발
견하게 된다.
용장사의 탑은 산의 8부능선에 우뚝 서 있다. 그 탑은 남산에서 가장
긴 용장계곡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 탑은
전통적인 가람배치법을 벗어나서 법당보다 뒷편의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다. 불상이 오히려 그 아래에 있다. 또한 탑 기단부의 하층기단(下層基
壇)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 이 탑은 인공의 하층기단을 두지 않았는가?
왜 불상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가?
왜 정형화된 가람배치법을 따르지 않았는가?
그것은 산과의 조화, 산과 탑이 하나라고 보는 신라인의 독특한 불
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탑이 불상의 아래 또는 불상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면 용장계곡의 모든 곳에서 그 탑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정형적
인 가람배치법보다는 남산의 길잡이가 되는 위치에 탑이 있어야 했던 것
이고, 탑이 선 그 자리에 있는 바위가 그대로 하층기단이었기 때문에 따
로이 인공을 가미한 돌로 다시 땅을 덮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양상은 탑 밑에 위치하는 여래좌상의 원형불대좌에도 나타
나 있다. 3층의 원형으로 된 대좌는 자연석을 기단으로삼고 있고, 대좌
위에는 부처가 앉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남산에 머물고 있는
부처가 그 곳에 솟아올라 모습을 나타내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장사의 뒤쪽 산봉우리에 있는 잘생긴 바위 위에는 아름다운
연화대(蓮華臺)가 조각되어 있다. 지금 그 곳에는 불상이 없지만, 그 정
상의 연화대 위에 앉아 하계(下界)를 굽어보는 불상의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가슴 앞에 두 손이 모듬어진다. 남산 정상의 바위가 연화대요 그
연꽃바위에서 부처님이 솟아나 앉아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산과 부
처님의 일체감이 아니겠는가!
산 속 그 바위에 부처가 있다고 믿었던 신라인의 산악관. 그것을 뒷
받침하는 자료는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석가사(釋迦寺)에 얽힌 이야
기는 남산에 부처님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효소왕 6년(697) 정유(丁酉)에 왕은 망덕사(望德寺)의 낙성회에 참
여하여 친히 공양을 베풀었다. 그때 모습이 누추한 한 비구승이 움츠린
몸으로 뜰에 서서 재(齋)에 참석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왕은 말석에
참례할 것을 허락하였다. 재를 마칠 무렵, 왕은 그를 희롱하면서 물었
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비파암(琵琶巖)에 있습니다."
"이제 돌아가거든 다른 사람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드리는 재에 참석
하였다고 말하지 마시오."
스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솟구쳐 공중에 떠서 남쪽을 향하여 가버렸
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 급히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진신석가가
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뒤쫓아가서 찾게 하
였다. 진신석가는 남산의 참성곡(參星谷)이라는 곳에 이르러 비파처럼
생긴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아 두고 숨어 버렸다.
왕은 드디어 석가사를 비파암 아래에 세우고 불무사(佛無寺)를 그의
자취가 없어진 곳에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절에 나누어 두었다고
한다.
이 설화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남산 비파암에 진신석가가 있다는 것
을 시사하고 있다.
진신석가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본 것인가? 비파암 속으로 들
어갔다고 본 것이다.
신라인들은, 아니 효소왕부터가 남산에 있는 진신석가께서 자신의 교
만을 깨우치기 위하여 낙성회에 참가하였고, 다시 진신석가의 영원한 상
주처(常住處)인 남산 비파암으로 돌아갔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다. 현재 폐허가 된 석가사지에도 자연석으로 된 탑의 하층기단이 있다.
이와같이, 신라인들은 남산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층
기단을 인공으로 다듬지 않았고, 부처를 상징하는 탑을 정형화된 가람배
치법에서 벗어나 계곡을 지키고 길을 제시하는 자리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가 있으면 절이 있고 절이 있으면 탑이 서고 좋은 바위가 있으
면 부처가 새겨져 있으니, 신라인들에게 있어서 남산은 바로 부처의 산
인 수미산(須彌山)이었고 하늘 위의 도리천이었으며, 또한 도솔천(兜率
天)이었던 것이다.
한편, 남산 산정에 묻혀있는 수많은 골호(骨壺) 속에는 세상을 여읜
이들의 다비(茶毘)한 뼈가 담겨 있다. 이들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인
도솔천에 묻혔다가 미륵보살께서 부처가 되어 지상(地上)으로 하강(下
降)하실 때 함께 태어나 지상의 행복을 다시 누리고자 하는 기나긴 꿈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의 신앙(信仰)은 지금과는 다
른 점이 있었다. 부처는 법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생긴 바위나
속세와 절연(絶緣)된 깨끗하고 아늑한 곳에 머물면서 가끔 필요할 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과 사귀면서 중생들을 제도(濟度)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미시랑(未尸郞)이라는 젊은이가 화랑(花郞)들을 친
절하게 가르치다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미시랑이 미륵
보살의 화신(化身)이었다는 이야기나, 경흥국사(景興國師)가 말타고 다
니는 것을 나무라고 남산으로 숨어버린 중이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신라 사람들의 신앙을 잘 말해주고 있다.
더욱 남루한 차림의 중이 진신석가로 몸을 바꾸어 비파암 곁에 있는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신라 사람들의 아름다운 자연을 부
처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알고 부처는 필요할 때 서민의 모습으로 나타난
다는 특이한 설명을 해 주는 것이다.
냉골 마애선각불(磨崖線刻佛)은 다듬지 않은 자연바위 벽면에 그려
놓았고 같은 계곡의 대마애좌불(大磨崖坐佛)은 머리만 입체적으로 조각
하고 몸체는 바위 덩어리를 그대로 살려 나타내었다. 이러한 수법은 바
위 속에 부처님 영(靈)이 머물고 있다는 신앙에서 창안된 것이며, 대사
방불(大四方佛)이 새겨져 있는 탑골(塔谷) 부처바위나 칠불암(七佛庵)의
사면석불(四面石佛)은 우주의 핵심체(核心體)인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여래(毘盧遮那如來)가 내려와 그 바위 속에 머물러 계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산맥이 둘러막힌 아늑한 곳이면 반드시 절터가 있는데, 한결같
이 큰 바위나 묘하게 생긴 바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
도, '바위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 백운대(白雲台)나 비파골 불무사(佛無寺)나 천동골(千洞谷) 암자
터처럼 높은 바위 위에 세운 건물들은 도솔천(兜率天)이나 도리천 같은
하늘 나라의 환상을 나타내려 함이었고, 높은 바위나 삼각산(三角山)
위에 탑(塔)을 세운 예가 많은 것은 산이나 바위를 하늘로 연결하는 수
미산(須彌山)으로 보고 하늘 나라 누각(樓閣)으로 탑을 세우려는 염원이
아니였을까? 남산에는 많은 절이 서고, 탑이 서고, 불사들이 새겨져 있
어도 그 때문에 자연(自然)이 파괴된 곳은 없다. 절터도 북쪽으로 향한
예는 없으니 북쪽은 불교에서 금기(禁忌)의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바윗
산에 감싸인 아늑한 곳에 절을 짓고 바위 봉우리에는 탑을 세우고 선방
(禪房)을 짓고 전망 좋은 바위에는 부처님을 새겼으니 남산은 바로 신라
사람들이 동경하던 하늘 위 불국정토의 꿈을 펼쳐놓은 성산(聖山)이었
다. 동방 유리광세계(東方 琉璃光世界)에서 태양이 솟아 찬란하게 비추
는 동남산의 여러 절들과 서방정토(西方淨土)로 태양이 사라질 때, 금빛
으로 물드는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마주보는 서남산의 여러 절에서 울려
오는 범종(梵鐘)소리와 목탁소리, 스님들의 독경 소리는 흐르는 물소리
와 솔가지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서로 어울려 대 교향악으로 울려퍼지
며 남산의 40여 계곡에는 성산을 순례하는 스님들과 선남 선녀들의 화려
한 옷차림으로 꽃밭을 이루었을 것이다.
아늑하고 나지막한 낭산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솟은 수미산으로 본
신라인, 남산의 곳곳에 부처가 숨어 있다고 본 신라인, 그들은 그들의
산을 산신이 머무르는 거처에서 영원한 깨달음의 진리를 설파하는 부처
의 도량으로, 인간에게 복을 주는 신의 산(神山)에서 인간고(人間苦)의
근원적인 해탈을 제시하는 부처님의 산(佛山)으로 승화시켜 갔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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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에 얽힌 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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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그 많은 유적들의 흔적은 누구나 찾으면 볼 수 있음은
물론,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여유를 갖는다면 남산에 흩어져 깃들
고 있는 많은 노래나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향가
도 있고 기막힌 설화들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모르고 넘으면 단지 경
주 남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일뿐이다. 그러나 알고 넘으면 구구절절 마
음을 두드리는 사연들이 남산자락 곳곳에 서려있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
다.
1. 남산 탄생에 얽힌 전설
아주 오래 전 쉬벌이라 불리던 경주는 맑은 시내가 흐르는푸른 벌판이
었다.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이평화로운 땅을 찾은 두 신
(神)을 보았다.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과 부드럽고 고운 얼
굴의 여신(女神)이었다. 너무 놀란처녀는 "저기 산 같은 사람 봐라!" 해
야 할 것을 "산 봐라!"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비명에 놀란 두 신이 발
길을 멈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처녀의
외침으로 두 신이 산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여신은 서쪽에 아담하게 솟
아오른 망산이 되었고, 남신은 억센 바위의 장엄한 남산이 되었다.
2.『삼국유사』를 통해 본 남산의 설화
남산을 오르는 사람을 위해 남산에 서려 있는 『삼국유사』의 무형
의 이야기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삼국유사』는 익히 알다시피 고
려시대의 일연(1206 - 1289)스님이 지은 명저다. 이 책에는 신라와 고려
시대의 향가가 14수나 실려 있고,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많은 설화들
이 담겨있다. 이런 설화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옛 정서와 직결되는 것
으로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는 느낌을 준다.
<월명스님과 '제망매가'>
생사의 길 여기 있으니 두려워 하고 /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
느냐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 한 가
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 아으, 미타정토에서 만날 나 /
도 닦아 기다리라.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월명스님의 '제망매가'라는 향가다.
월명은 신라 경덕왕(742 -765)때 사람으로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 월명은 늘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피리 불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한길을 거닐면 달이 그를 위하여 멈추었으
므로 그 길을 월명리라고 하였다. 월명 또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떨쳤
다.'그런 월명같은 시인이 한둘이 아니고 그들이 모두 남산 자락에 묻혀
노래를 불렀으니 남산을 오르면서 어찌 그 노래를 듣지 못하랴.
냉골에는 마애선각육존불이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 새겨진
그 선이 금방 살아 숨쉬듯, 아니면 휘장을 걷고 금방 속세로 모습을 드
러내는 부처님의 모습이랄까 …. 더욱이 이승의 석가삼존불과 저승의 아
미타삼존불을 함께 연이은 두 바위면에 새겨 두었으니 이승과 저승의 거
리가 불과 3m밖에 안된다. 먼저 이승을 하직한 월명의 누이를 위해 그
아름다운 시를 썼다면 필시 이 마애선각육존불 앞에서 피리 불며 읊었으
리라. ' 한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 하고 애절히 읊었
던, 그 모르고 가는 곳이 바로 아미타여래의 정토임에랴. 그 또한 도를
닦아 그 곳에 가서 누이를 간절히 만나고 싶다는 속정을 읊은 노래가 바
로 ' 제망매가 '이다.
< 대현스님과 용장사 삼륜대좌석불 >
용장골의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는 삼륜대좌불은 원형의 삼층석 위에
목이 떨어져 나간 설불좌상이 한 구 덩그라니 앉아 있다. 몸체에는 아주
화려한 옷자락이 새겨져 있지만 불두가 떨어져 나가고 없으니 정작 무슨
부처님인지도 구분이 안간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대현스
님의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석불좌상의 모습을 우리 머리속에 그릴 수가
있다.
남산절 탑돌이에 / 석장도 얼굴을 돌리니 / 이 청구의 햇빛이 / 중천에
다시 밝았도다 / 저 우물이 말랐단들 / 맑은 물길 솟으니 / 금로의 한올
연기 / 그럴 줄을 뉘 알았으랴.
이 시는 청구사문을 찬한 시로서, 청구사문은 다름아닌 대현의 자호이
다. 대현스님은 신라 제 35대 임금인 경덕왕(742-765)때 사람이다. 대
현스님이 용장사에 있는 석장육을 돌면서 탑돌이를 하면 석장육이 대현
을 따라 돌았다는 기록과 여름 가뭄을 극복시켰던 원력을 기려 지은 시
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 나오는 석장육이 바로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
는 삼륜대좌석불좌상인 것이다. 목이 없는 것은 언젠가 훼손이 되었길래
없는 불두다. 왜 없어졌을까 …. 혹자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훼손시켰다
고도 하고 조선조의 불교억압정책 때문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고도 하고,
때로는 몹쓸 도굴꾼이 목만 달랑 갖고 가버려 없어졌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연상을 확대하여 대현스님을 생각하면서 한 번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 보자. 그 대현스님의 탑돌이를 따라 석불좌상도 얼굴을 따라 돌렸
다니 대현스님의 높은 경지가 어느 정도였었는지 짐작이 간다. 넋을 놓
고 대현스님을 따라만 돌다가 목이 …. 그런 어줍잖은 연상을 해도 즐거
운 그런 곳이 용장골이다.
< 충담스님의 '안민가'와 삼화령 삼존석불 >
삼화령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를 복원하여 다례를 지내고 있는 남산을 사
랑하는 사람들에겐 낭만적인 곳이다. 경덕왕때 충담이란 스님이 해어져
누빈 옷을 입고 망태기를 지고 길을 가다가 임금님 앞에 불려 나간다.
어디에서 오는 중인가를 묻는 임금님에게 " 소승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드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 라고 대답한다. 차를 달여 차공양을 드
린다는 바로 그 삼화령이 남산에 있고, 지금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다
놓은 삼화령 삼존석불이 바로 그 때 충담스님으로부터 차공양을 받던 그
석불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충담스님은 향가를 잘 짓기로 이름이 나 있
었는데 임금의 청을 들어 ' 안민가 ' 한 수를 읊고 간다.
임금은 아버지요 / 신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라 / 백성을 어린 아이라 여
기시면 / 백성이 사랑 받음을 알리라 / 구물거리며 사는 갓난이 / 이를
먹여 다스리니 /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할지면 / 나라를 보전할
길 알리라 /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 백성답게 한다면 / 나라가 태평
하오리다.
충담의 마음이 담담해서일까 향가가 주는 운치도 운치려니와 담겨진 뜻
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삼화령 터에 올라 충담을 생각하며 차라도 한
잔 들고 오면 남산의 운치가 오죽하랴. ' 안민가 '가 아니더라도 가슴에
담아 두었던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라도 토해내고 온다면 그게 바로 시
요, 노래요, 대화가 아니겠는가.
< 경흥스님과 문수사 >
아무래도 남산의 클라이막스는 문수보살에게 혼이 난 경흥스님의 이야기
가 아닐까 싶다. 신문왕 때 경흥이란 큰 스님이 있었다. 신문왕은 선왕
의 유지를 받들어 경흥을 국사로 삼아 나라의 대소사를 의논하게 되었
다. 하루는 왕이 경흥을 불러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시종들이 준비
한 행차차림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한데, 지나가던 한 거사가 거지꼴을
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곧 행차하려는 경흥의
말 앞에 와서 쉬었다. 시종들이 이 남루한 거사를 보고 나무랐다.
" 승복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더러운 물건을 지고 다니는가? " 거
사가 짊어진 망태 속에 비린내 나는 말린 생선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이른 말이다. 거사가 지나가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두 다리 사이에
산 고기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세 번이나 사고 판 생선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이 무슨 흠이 되겠는가 …. " 경흥은 그 말을 전해 듣고 깜
짝 놀란다. 시종을 보내 그 거사의 뒤를 쫓게 하였으나 이미 그 거사는
남산의 문수사에 광주리를 벗어 놓고 바위 속으로 숨어 버렸다. 경흥이
깨닫는다.
' 문수보살께서 손수 오셔서 내 어리석은 행동을 깨우쳐 주셨건만 내가
못나 죄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 ' 탄식하고, 그 이후로는 말을 절대로
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화로움을 멀리했다는 설화이다. 산 고기란
결국 말(馬)을 의미한다. 말타고 호강하고 다니는 자도 있는데 이까짓
썩은 고기를 탓하랴 하는 지적이다. 깨우침을 주는 방법이나 통찰에 이
르는 모습이나 남산이 아니고는 배태할 수 없는 설화가 아닐까.
< 효소왕과 비파암 >
이런 류의 선문답 같은 설화는 얼마든지 있다. 효소왕 8년(699년)의 일
이다. 그 해 당나라의 황실을 위해 망덕사를 짓고 법회를 열었는데, 그
때 누추한 옷차림의 한 중이 나타나 자리를 함께 할 것을 임금에게 청했
다. 임금은 마지 못해 끝자리를 허락하고 법회가 끝나자 어디에 머무는
중인가를 물었다.
" 비파암에 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중에게 일렀다.
" 돌아가거든 다른 사람에게 국왕이 친히 올리는 제에 친히 참석했노라
고 떠들고 다니지 말게나."
그러나 이말을 들은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 임금님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옵소서
"왕은 놀라 이 중을 다시 청하려고 했으나 허공으로 솟구쳐 남산으로 들
어가 버렸다. 사람을 시켜 뒤따르게 했더니 남산 삼선곡 바위 위에 석
장과 바라만 있을 뿐 스님은 흔적이 없었다. 스님이 사라진 바위가 바로
남산의 비파암이다.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자면 어찌 이것 뿐이랴. 바위면 바위, 골짜기면
골짜기, 계곡이면 계곡, 폐사의 절터면 절터, 어느것 하나 설화를 머금
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네 심성의 깊은 소리를 담아 보고 싶은 사람은
천년의 세월을 묵힌 사연들을 지금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시
정이 아니겠는가. 또한 종교적인 마음을 가지고 남산을 찾는다면 남산
자체가 이미 수미산이다. 수미산 자락에 안긴다면 그 이상 또 무엇을 바
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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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남산을 통해 보는 신라역사 한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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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문화의 도약기 - 진평왕,선덕여왕 시절
역사책에서 신라의 문화가 발전하고 강성해지는 것은 법흥왕(재위
514∼539)이 불교를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끌어들여 이 발달된 종교의
힘으로 사상체계를 정비하고, 진흥왕(재위 540∼575)이 영토를 확장해
서, 그것이 기초가 되어 이후 벌어지는 삼국간의 통일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는 대목, 즉 김유신과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0)의 이야기
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신라시대 역사를 서술하면 진평왕(재위 579∼
631),선덕여왕(재위 632∼646) 시대는 삼국간의 전쟁이 한창인 시절로만
묘사되어 이 시기에 무슨 문화창조가 있었을까 싶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지금 경주에 가서 볼 수 있는, 통일신라가 아
닌, 고신라의 대표적인 문화유물들은 거의 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 만
들어진 것이다. 금동반가사유상과 남산 선방곡 삼존불은 진평왕 때 유물
로 추정되며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남산 불
곡의 감실부처님 등은 모두가 선덕여왕 시절 유물이다. 경주에 있는 왕
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시기 소산인 셈이다.
7세기 전반기,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의 신라문화상은 한마디로 모
든 것을 남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창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자신감
에 충만한 것이었다. 인근지역, 백제·고구려,중국의 문화를 적극 받아
들이면서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원효대사는 당나라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스스로
일종을 이루어 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이제는 굳이 유학하지 않아
도 알 것은 다 알수 있다는 문화적 자신감이 그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것
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화사적으로 말한다면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 문
화는 백제의 영향을 말할 수 없이 강하게 받았다. 그 영향과 자극을 계
기로 신라는 스스로의 고대문화를 체계적으로 갖추어가게 된다. 백제 입
장에서 말한다면 백제 무왕시대의 발달한 문화가 깊숙이 파급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 또한 이 시대의 문
화적 성격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선덕여왕 시절의 유물들에는 그 앞
시대나 뒷시대의 유물과는 판연히 다른, 따뜻하고 유순하며 인간적 체취
를 느끼게 하는 정서가 배어 있다. 그중 한 예로 경주 남산의 북쪽 기슭
에 있는 감실부처님을 보면 저 조순하고 인자한 기품은 부처님상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치 신라시대 어느 여인을 모델로 했음 직한 그 친
숙한 이미지는 원효가 불교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대중화작업을 펼쳤던
그 위대한 족적에 비견되는 고신라불상의 한 백미라 할 것이다.
2. 서출지(書出池)설화와 소지왕(炤知王)시절의 신라
서출지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름찰밥'의 유래를 밝힌 '거문고의
갑을 쏘다(射琴匣)'의 전설을 간직한 못으로 경주남산 '통일전' 동남편
에 위치해 있다. 일제 당시 문화재를 등록할 때 원래의 서출지인 양기못
이 너무 초라하여 현 이요당이 있는 못을 서출지로 잘못 등록해버렸다고
하는데, 위치문제는 접어두고 <삼국유사>에 적힌 설화를 살펴보자.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10년(488)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
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처럼 말하길, "이 까
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피시오" 왕이 곧 기사(騎士)에게 뒤쫓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지금의 양피사촌이니 남산 기슭에 있다)에 이르
러 두 돼지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길에서 헤매이고 있으니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겉봉에는 '이것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급히 돌아와 왕에게 드리니 왕
은 '두 사람이 죽느니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열어보지 않으려 했
다. 그러자 일관(日官:나라의 좋고 나쁜 일을 예언한는 관리)이 "두 사
람은 백성을 가리키나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킵니다"라고 말하여 열어보
니 '거문고의 갑(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궁에 들어가 거문고의
갑을 활로 쏘니 그곳에는 내전에서 분향하던 수도승이 궁녀와 간통을 하
고 있었다.(혹은 왕비가 중과 함께 소지왕을 죽이려고 숨어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이때부터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
日)이라하여 오곡밥으로 제사를 드린다. 이때 오곡밥을 조금 담 위에 두
는 것을 '보름약밥'이라 하기도 하는데 까막까치를 위한 풍속이라 한다.
이 일로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부르게 되었다.
설화에 담긴 역사의 비밀
소지왕 10년은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해다. 그 해 소지왕은 대
궐을 명활산성(明活山城)에서 월성(半月城)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장수
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대륙 중원으로 겨누던
화살을 남으로 겨누는 격이 된 것이다. 장수왕은 드디어 475년 백제 서
울(위례성, 지금의 서울)을 침공하여 백제 20대 개로왕(蓋鹵王)을 죽여
버렸다. 신라의 자비왕(慈悲王)은 나라를 다스리기는 불편하나 험준한
명활산성으로 궁성을 옮기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함께 위협받는 신라와 백제는 손을 잡게 된다. 백제가 위
급할 때는 신라가 도와주고 신라가 위급할 때는 백제가 도와주자고하여
굳게 손을 잡게 되었다. 이후에는 백제 왕실과 신라가 혼인할 정도였으
니 소지왕은 나라를 다스리기가 불편한 명활산성에서 대궐을 다시 반월
성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약 15년간 버려두었던 대궐을 반년 동안 수리 정비하여 소지왕 10년,
서기 488년 정월초 반월성으로 대궐을 이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하늘샘(天泉亭)으로 행차하셨으니 이 행차는 놀러 간 것이 아니
라 나라의 태평을 비는 기도차 행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소지왕은 어
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성품이 겸손하여 온 국민들이 마음으로 존
경하였다 한다. 비처왕(毘處王)이라고도 부르니 빛나는 임금이라는 뜻이
다.
소지왕 10년은 신라국에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년)부터 40년
전에 해당된다. 불교가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중이 왕비와 사랑할 정도
로 가까워졌을까? 고구려나 백제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는 아무 저항 없
이 받아들여져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시고 불법을 폈다. 그러나 신라에서
는 눌지왕(訥祗王) 때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펴지 못
했다. 소지왕 때 아도(阿道) 스님이 불교를 펴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화백(和白)회의에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라에는 당시 진골(眞骨) 이상의 귀족들이 모여 나라의 중요한 일들
을 의논하는 회의가 있었다. 그 회의에 통과되지 못한 일은 임금도 다스
릴 수 없었다. 화백들의 신앙은 민속신앙이었고 특히 조상신을 섬기는
신앙이 깊었다. 그 때문에 불교를 한사코 반대하였던 것이다. 법흥왕 15
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에 의해 불교가 신라에 공인되기까지 약 70여
년 동안 신라의 귀족들은 불교를 반대했었다. 이렇게 불교에 명예스럽지
못한 이야기가 이 못에 남아 있는 것도 민속신앙과 불교의 갈등으로 70
여년 동안에 독버섯처럼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묵호자 스님께서 눌지왕의 왕녀의 병을 고쳐주신 후로 왕실에
는 불교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이미 깊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
도 이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경주답사] 자료집
경주 남산(경주 남산)
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솟은 산으로 금오산
(금오산)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고
위산)을 잇는 산들과 계곡전체를 통칭해서 남산(남산)이라고 한다.
정상의 높이는 468m, 남북의 길이는 8km, 동서 너비는 약 4km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으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
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또 무수한 계곡이 종횡으로
치달아 있으며, 그 골짜기마다 사지(사지), 석불(석불), 석탑(석탑)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수 많은 화장장골기(화장장골기)가 출토되었으니
전산이 불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곳은 신라 사영지(사령지)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한다
고 한다. 또, 박혁거세(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인 나정(라정)이 이 산
기슭에 있고, 경애왕(경애왕)이 적의 손에 죽은 포석정이 있으며, 서라
벌을 지키던 육군본부인 남산성(남산성)도 있다. 또, 불교가 공인된 이
후에는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중되었다. 8,
9세기에는 부처님이 하강하는 산으로 여겨져, 화장한 뼈를 꽃무늬로 장
식한 항아리에 넣어, 수 없이 묻었다. 30여 개나 되는 골짜기마다 절을
짓고, 바위마다 부처님의 모습을 새겼다. 지금까지 발견된 절터가 55개
소, 석탑이 38기, 불상이 70여 좌가 있어, 그대로 하나의 큰 박물관이
며, 미술의 보고인 성산이다.
그리고 헌강왕 때에는 남산의 산신이 현신하여 나라가 멸망할 것
을 경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신이 춤을 추었는데 왕만이 이를 알고, 주
위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여주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오히려 상서(상
서)롭게 여겨,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마침내 나라가 멸망했다고 한
다. 이와 같이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은 특히 호국의 보루
로서 존중되었다.
포석정(포석정)
. 문화재 번호 : 사적 제 1호
. 시 대 : 통일 신라 시대
. 규 모 : 석구 폭 30cm, 물 흘러 들어가는 곳의 폭 약 50cm, 깊이 약 50cm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 시냇가)
이궁(리궁)안의 연회 장소였던 포석정은 경주 남산 계곡에서 흐르
는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술잔을 띄우면서 유상곡수(류상곡수)라는
시회(시회)를 벌일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지금은 정자는 없어졌으나,
전복 모양의 물도랑이 남아있어, 신라궁원(궁원)예술의 독특한 상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주위의 풍치를 배경으로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이는 기사는 포석정에 얽힌 슬픈 사연 때문에
우리에게 묘한 정회를 안겨주기도 한다.
"경애왕(경애왕) 4년(927)에 왕은 왕비와 신하들과 더불어 포석
정에 나와 잔치를 벌였다. 이 때, 견훤(견훤)이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약탈했다. 왕도 강압에 못이겨 자진하고, 왕비와 비첩들도 모
두 능멸당하고 만다."
혜공왕(혜공왕) 이 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말엽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도둑은 벌떼처럼 끊고, 민
심은 흉흉하여졌고, 왕좌는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지배층들은 이러한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보다는 저만의 안락에만 빠져
드디어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배리삼체석불입상(배리삼체석불입상)
.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63호
. 시 대 : 삼국 시대 (7세기 중반)
. 규 모 : 중앙 여래상 높이 2.7m, 왼쪽 보살상 2.4m, 오른
쪽 보살상 2.5m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포석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
던 것을 1923년에 지금과 같이 삼존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중앙에 본존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호위하도록 배치 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은 큼직한 돌을 평평하게 다듬고, 앞면에는 부조
형식으로 조각한 우람한 체구로 커다란 자연석 위에 묵중하게 서
있다. 이러한 묵중함은 시혜자(시혜자)의 활력을 명쾌하게 풍겨
주고 있다. 단순한 머리모양에 높은 육계가 있으며, 어깨를 감싼 두꺼
운 법의에는 띠같은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굵은 철형의 띠는 매우 특
징적인 것이다. 얼굴 모습은 예스럽고 무디지만 미소가 뚜렷이 나타난
다.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시여인을 하고 있다. 광배는 불상의 신
체에 거의 맞게끔 처리하여, 광배로서의 기능보다 불상을 지탱해주는
구실을 더욱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불상의 짧아진 체구, 두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 아기 같은 얼굴 등 투박하고 어린이같은 특이
한 형태는 중국의 북주(북주) 내지 수나라 불상과 유사한 추상표현주의
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보살상은 앞은 약간 마멸되었으나, 뒤에는 의문(의문)이 똑똑
히 남아 있다. 머리에는 둥근 두광이 붙어 있고 왼손에는 병을 들고 있
다. 따라서 이 보살은 관음보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가 평편한 느
낌을 주나 온화한 가운데 위엄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 보살은 무릎 아
래가 절단 되었다. 눈이 가늘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살이 쪄서 여성
적인 인상을 준다. 몸에는 무거우리만큼 많은 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
뒤에는 둥근 두광이 붙어 있고 주위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었다.
이 삼존불상은 새로운 세부형식을 묘사하고,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
로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섭론종(섭론종)계통
의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보살의 아미타삼존불일 가능성이 있어서 삼
국시대 불교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600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
등에 의하여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서출지(서출지)
문화재 번호: 사적 제 138호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정강왕릉을 지나 남산리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곳이 사금갑(사금갑)의 전설이 간직
된 서출지이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즉위 10년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내용
에 따라 궁의 거문고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이 궁주(궁
주)와 서로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옛 이름은 양기못이
었는데,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뜻에서 서출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이기는 하나 주변의 경관이 수
려하여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경승지가 되고있다.
경주남산리삼층석탑(경주남산리삼층석탑)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124호
.시 대 : 통일 신라 시대
.규 모 : 동탑 높이 7.04m 서탑 높이 5.55m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형식을 달리 하면서 동서로 대립하여 서있는 석탑 2기로서, 동탑은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석탑과는 달리 모전석탑(모전석탑)의 형식을 띄고
있고, 서탑은 이중기단에 각층이 별석(별석)으로 된 전형적인 신라양식
의 석탑이다.
먼저 동탑은, 넓은 이중의 지대석 위에 잘 다듬어진 8개의 기단석
을 커다란 괴체형(괴체형)으로 처리하여 입방체의 단층기단을 형성하고
있다. 기단의 윗면에는 3단의 각형(각형)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
게 되어 있다. 3층의 탑신부는 옥신(옥신)과 옥개석(옥개석)이 각각 하
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옥신부분에는 우주(우주)의 모각이 없
다. 옥개석의 받침은 초층에서부터 5.5.4단이고, 낙수면은 일반 석탑양
식과는 달리 초층에서부터 7.6.5단의 층을 형성하였다. 상륜부는 노반
만 남았을 뿐 나머지는 없어졌다. 석탑의 구조는 중층(중층)에 체감을
보이는 일반형 석탑과 동일하나, 기단과 옥신, 옥개 등의 수법에 변화
를 나타낸 특수형식이다.
서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탑이나, 상륜부는 노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상층기
단의 중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어 중간의 탱주 1주로써 구획되어 각면 2
구씩 도합 8구의 팔부중(팔부중)을 부조로써 나타내고 있는데, 석탑 외
호의 의미를 지닌 팔부중은 주로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드문 조각
으로서 이 석탑의 연대와 함께 팔부중 조각의 양식계보 설정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팔부중은 모두 좌상으로서 삼두팔비(삼두팔비)의 아수라
상(아수라상)이라든지 뱀관을 쓰고 있는 마후라상(마후라상)등이며, 이
들은 입에 염주를 물었거나 손에 여의주, 금강저를 든 모습 또는 합장
한 모습 등이다.
신라 통일기의 동서쌍탑은 대체로 동일양식을 가지는 것이지만, 이
와같이 특이하게 다른 양식을 취하는 형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200호
.시 대 : 통일 신라 시대
.규 모 : 바위 높이 4.3m, 본존불 높이 2.7m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칠불암(칠불암)이란, 큰 암석에 삼존불과 사방불(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8세기경의 마애불상군(마
애불상군)이다.
칠불(칠불)은 동쪽 암벽에 같은 방향으로 삼존(삼존)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별도로 솟은 네모난 커다란 바위의 사면에 사방불(사방불)을
조각하여 도합 7구인데,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모시고 좌우에 호
위하는 협시보살(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몸에 비해 큰데, 소발(소발)에 큼직한 육계
가 솟아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며, 부
풀고 곡선적인 처리로 자비로운 표정을 띠고 있다. 수인(수인)은 항마
촉지인(항마촉지인)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다. 법의는 우견편단(우
견편단)이고, 광배(광배)는 보주형(보주형)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
게 표현하였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동일한 모습에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데 매우 사실적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감로병을 들고 왼손을 치켜든
모습이고,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천화(천화), 오른손에 연꽃을 쥐고
있는데 양쪽 모두가 본존쪽을 향해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은 높이가 2.2m, 내지 2.4m
정도로 바위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삼존불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고,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결가부좌)하였다.
이들 불상은 원래 그 앞을 가리는 전실(전실)이 지어져 그 안쪽에
모셔졌으며, 지금도 이 곳 주변에는 당시 건축물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
는 기와쪽 같은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199호
.시 대 : 통일 신라 후기
.규 모 : 높이 1.9m, 너비 1.3m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칠불암 뒤쪽의 높은 절벽의 바위면을 얕게 파고서 부조로 새긴 마
애불로서, 머리에는 세 면으로 된 보관(보관)을 썼으며, 그 위로 육계
가 솟아 있다. 눈은 가늘게 뜨고,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감
돌아서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머리카락은 어
깨위에까지 늘어져 둥글게 뭉쳐 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무릎폭이 넓
어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천의(천의)는 약간 비만한 몸의 굴곡을 뚜렷
이 드러내면서 무릎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그 끝부분은 마치 바람
에 흩날리는 듯 나부끼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쥐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특히 이채로운 것은 발의 모습이다. 왼발은 연대(연대)
위에 얹고, 오른발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려 반가(반가)에 가까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미륵보살(미륵보살)이 취하는, 이른바 책
상다리형의 반가사유상(반가사유상)과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착상이
라고 할 수 있다. 발 밑에는 동적인 화려한 구름을 새겨 상 전체에 생
기를 불어 넣으면서 이 보살이 천상(천상)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광
배는 바위면을 주형(주형)으로 얕게 파내어 거신광(거신광)으로 삼고,
그 내부는 세 줄의 선으로 두광(두광)과 신광(신광)을 구분하였다. 광
배의 윗면에 가로로 길게 파인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목조
전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용장사지(용장사지)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군 내남면 용장리
1.연 혁
민족항일기에 남산 계곡을 조사할 때, 용장사라고 쓴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확인되었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유가종의
고승인 대현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 절에 있는 장륙상(장륙상)의 주
위를 돌며 예배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또 조선
초기에는 김시습이 이 절에 기거하면서 <<금오신화>> 를 썼는데, 이 때
까지만 해도 용장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절터에는 석불좌상,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 등 중요한 문
화재들이 산재하고 있다.
2.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
석탑)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186호
.시 대 : 신라 시대
.규 모 : 높이 4.42m
.소 재 지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용장리
이 탑은 경주 남산 서편 용장사 옛 절터가 있는 골짜기의 정상부근
에 위치한 탑으로서, 신라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석가탑의 양식을 답
습하였다. 단지, 신라 전형인 2층기단과는 달리 암벽을 하층기단으로
간주하여, 하층기단을 없애고 직접 자연암석에 상층기단을 세운 점이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표현한 슬기로서,
지형적 특성을 잘 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단의 면석은 한 면은 1석이고 다른 세 면은 2석씩으로, 모두 7매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면에는 우주(우주)와 탱주(탱주)가 하나씩
모각되어 있고, 갑석(갑석)은 2매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부의 각 층 옥신(옥신)과 옥개석(옥개석)은 1석씩이며, 1층옥
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네 귀퉁이에 우주가 있을 뿐이고, 2층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각 층의 받침이 4단이고 추녀는 직선이나
전각(전각) 상면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상면의 낙수
면 정상부에는 1단의 괴임이 있어 각각 그 위층의 옥신을 받게한 점이
일반형 석탑에서와 다름이 없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전망이 넓게 트인 산봉우리 위에 탑을 세운 사례는 신라시대에 가
끔 볼 수 있는 일로서, 이 탑이 바위위에 세운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187호
.시 대 : 통일 신라 시대
.규 모 : 높이 4.6m
.소 재 지 : 경상북도 월성군 서남산 용장사지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용장사지) 빈 터의 삼층석탑형의 둥근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머리부분은 없다. 머리부분이 없으므
로 불상의 이름과 양식을 분명히 알 수가 없어, 승려상이라는 설과 보
살상, 불상, 미륵불상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지면에는 거대한 암반이 인공적으로 깔려져 있고, 불상은 불상이
직접 앉혀져 있는 상대석(상대석)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어깨
는 좁은 편이지만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몸의 굴곡은 세세하게 나
타나지는 않았지만 균형잡힌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결가부좌)이며, 수인(수인)은 특이하게 오른손을 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을 왼쪽 무릎위에 자연스럽게 놓아 언뜻 보
면 항마촉지인(항마촉지인)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옷은 통견의(통견의)이며, 가슴에는 승각기(상내의)의 깃이 굵게
표현되어 있고 이것을 묶는 띠매듭까지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도 또
하나의 띠매듭이 있는데, 이것은 가사(가사)를 묶는 띠로서 어깨 뒤쪽
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무릎 아래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은 수술로
장식되어 있다.
대좌를 덮어 내린 상현좌(상현좌)는 앞과 양옆에만 상현이고, 뒤쪽
에는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3층으로 구성된 대좌는 기단부가 자연석이
고, 간석(간석)과 대좌가 탑신(탑신)과 옥개석(옥개석)모양으로 구성되
고 있는데, 모두 둥근형의 특이한 형태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
기 힘든 이례적인 것이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불좌상
.문화재 번호 : 보물 제 913호
.시 대 : 통일 신라 시대
.규 모 : 높이 1.62m, 너비 1.1m
.소 재 지 : 경상북도 월성군 남산의 용장사지
지상에서 높지 않은 암면에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서, 마애불(마애
불)로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것이다.
머리모양은 나발(나발)이고 육계의 표시는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비만형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볼을 두껍게 하고 턱에 군살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풍만한 편이다. 입을 꽉 다물어 생긴 보조개와 같은 묘사,
볼록한 볼과 둥근 눈등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미소짓고 있다. 목에는
삼도(삼도)가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손끝을 아래로 내렸으며, 왼손은 다리위
에 올린 항마촉지인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의 자세이다. 불의(불의)는 통견
의로서 매우 얕게 빚은 듯한 의습으로 마치 인도불상을 연상시킬 정도
로 가는 평행선으로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에는 무릎 밑에다 위로 향한 연화문이 길게
새겨져 있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은 긴장되고 활력에 찬 형
태와 유려하고 세련된 선의 흐름, 깔끔한 부조의 아름다움 등 8세기 중
엽의 사실주의 불상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특
히, 얼굴이나 체구, 의문 등에서 굽타 시대의 마투라 불들과 친연성이
강한 독특한 불상이어서, 굽타 불의 수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경주답사] 자료집 삼릉계 1.
1. 냉골 석조 여래좌상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약 300미터정도 올라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이 보인다. 높이가 1.6미터 무릎 너비가 1.56미터 되는 큰
좌불이다. 1966년까지만 해도 동남쪽 계곡에 뭍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지
금 장소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데 마멸이 심하지 않고 옷주름이 뚜렷하
게 남아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과 어깨는 신라 전성기 무렵인 8
세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근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주줄의 영총 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포현되었다.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끈은 말해주고 있다. 부처의 아래옷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 삼륜대좌불처럼 가사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러한 예는 드물기는 하나 중국 오봉산 연화동 여래상이나 운문산 석굴 제
1동 본존상등 영총을 늘인 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근을 발굴 조사하면
불두 부분도 발견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찾는다면 통일신라 시대의 걸작
불상이 될 것이다.
2. 냉공 마애 관음보상상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족한 기둥 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중 한 바위에 미소를 머금고 하께를 내려다 보고 있
는 관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었
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표시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은 가슴에 드리운 채 정
병을 들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내었는데 목걸이
와 팔찌 등 여러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몸을 꾸몄다. 군의를 동여맨 끈은
배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긍에 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표현된 이 불상은 다스한 촉감
마져 불러 일으킨다. 대좌는 복련이다.
보살상의 높이는 1.54미터이고 양 팔굽 너비가 0.45미터로 우리나라 소
년 소녀들의 키에 해당되는데 이 불상 뒤에는 기름한 바위가 비스듬이 높
게 솟아 있어 하늘과의 연결을 암시하고 있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지려 할 때 노을이 관음 보살의
얼굴에 비추니 보살의 얼굴은 화기에 찬다. 붉은 해가 서방정토로 돌아갈
때 하늘도 산도 냇물도 온누리가 금빛으로 바뀌는 찬란한 순간 본 고향의
아미타여래를 향해 밝은 웃음을 보내는 이 보살의 모습에는 누리의 환희
가 차고 넘는다. 이렇게 대자연의 광선을 이용하여 말로써도 그림으로써
도 표현할 수 없는 극락 세계를 신라인들은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의 표정은 아래에서 바라볼때 더욱 밝다. 얼굴에 웃음을 듬뿍 머
금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금방이라도 내려올것만 같은 정감을 느깨게 된
다.
관음보살은 아미타 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이시
다. 정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어면 곧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신다고 한다.
관음보살의 위력은 크다. 관음보살을 믿는 사람은 불 속에 들어 가더라
도 그를 태우지 못하고 깊은 물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얕
은 곳이 찾아 진다고 한다. 만약 수 많은 중생들이 보배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들어 갔다가 태풍이 불어서 나찰 귀신이 나라에 떨어지게 되었을
지라도 그 중의 한사람이 관음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사람이 구제된
다고 한다.
그런데 이 관음보상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집을 지을만한 공간도 없고
기와조각도 발견 되지 않아 처음부터 노천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벼랑
에 불상을 새기고 산 기슭에서 올려다 보며 예배함으로써 이름을 부를 때
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하여 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불상의 진정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은 석양 즉
해질무렵이다. 단풍이 드는 가을철 석양 때가 더욱 좋다. 이 불상을 위한
절터는 이 계곡 아래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자세한 것은 발굴 조사
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3. 냉골 선각 석가. 아미타 삼존상
마애관음상에서 100미터 더 들어가면 동북쪽에서 흘러드는 한 지류가 있
다. 그 지류가 본류에 합치는 동쪽 언덕 위에 병풍을 둘러 놓은 듯한 절
벽 바위가 동서로 두 곳에 있다. 이 곳이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인 냉골
제2절터이다. 서쪽 바위는 높이가 약 4m이고 너비는 약 3.58m이며 동쪽
바위는 서쪽 바위면에서 약 3m 뒤에서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높이는 역시
4m 정도이고 너비는7.27m이며 동서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 암반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
겼으니 조각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구김
살 없는 필치는 능숙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동쪽 암면에 새겨진 본존
석가여래는 넓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문수, 보현 두 보살은 본존의 양
옆에 서있다.
여래상은 편단우견으로 가사를 입고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으로 놓여 있다. 둥근 원으로 신광과 두광을 나
타냈는데 단숨에 그어진 유창한 곡선은 한없이 시원스럽다. 왼쪽의 문수
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채 천의 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며 얼굴은 여래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손 등을 밖으
로 하여 손가락 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연꽃 위에 서 있다.
두 보살은 모두 세개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걸고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
었을 뿐 상의는 입지 않았다. 두 보살이 여래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서
있으므로 바위 분위기는 아늑하게 통일되어 있다.
서쪽 암면의 아미타삼존은 석가삼존과 반대로 여래가 연꽃위에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 계시다. 여래는 오른손 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 바닥은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여래쪽을 향해 윤왕좌(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
는법)로 오른쪽 대세지보살은 관세음 보살과 반대의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쟁반을 들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 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
다. 어깨에는 얇은 천의를 걸쳐 천의자락에 나부낀다. 여래가 앉아 계시
고 협시보살들이 서는 예는 보통 있지만 여래께서 서 계시고 보살들이 앉
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생전에 아미타불을 잘 염불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죽으면 아미타여개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
으로 지상으로 하강하신다. 그때 여래는 서고 보살들은 앉는데 이러한 모
습을 내영아미타상이라고 부르는데 이로 미루어 서쪽 암면 삼존상은 아미
타내영도임을 알 수 있다.
석가여래는 살아 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부처이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의
부처이다. 아미타여래는 지상에 하강하여 석가여래로부터 생명을 인계 받
는다. 이곳에 석가 삼존과 내영아미타 삼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승에서
저 세상인 극락세계로 생명이 인계되는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다. 신라시
대에는 많은 자녀들이 이 곳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극락에 모시기 위
하여 아미타불을 염불했을 것이다.
바위 위에는 홈을 파서 빗물이 바위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 놓았
다. 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고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니
바위 위에 빗물을 가리는 간단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
라시대 조각품은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림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
신라의 그림을 엿볼 수 있으니 귀한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의 제
작 시기는 이상주의적 양식이 성행하던 8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답사] 자료집 삼릉계 2.
4. 냉골 마애 석가여래좌상
선각 석가, 아미타여래상에서 약 200m종도 동으로 등성이를 따라 올라
가면 넓은 절벽 바위가 서향을 하고 서 있는데 그 암벽 중앙에 지름이
2.5m되는 연꽃 위에 설법인을 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
두 선각으로 나타냈는데 얼굴만은 윤곽이 드러나는 돋을 새김을 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잡힌 얼
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 머리는 뒤에는 신광을 표현하
였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선으로 변화를 주
었다. 조각이 이루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
데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초기로 보고 있다.
5. 냉골 석조 여래좌상
마애 여래좌상에서 동남쪽으로 100미터 정도 가면 또 하나의 바위 무리
가 있고 그 동쪽에 순백색 화강암으로 조성된 여개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하대석 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 위에 직접
놓은 중대석 위에 얹혀 있다. 8각 중대석엔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
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 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 나라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 대좌에는 이렇게 찬란한 광채나는 꽃송이를 만들기 위해 애쓴
신라인들의 무한한 정성이 어려 있다. 이렇게 정성들여 꾸며 놓은 연화대
좌 위에 여래가 앉으셔서 항마촉지인상을 표시하고 계신다. 지금 얼굴은
깨어져서 윗부분만 반 남아 있으나 단정하게 솟은 육계며 둥글둥글하게
새긴 나발이며 아래 세계를 내려다 보시는 가느스름한 눈을 통해 지금은
없어진 꼭 다문 입술과 살결이 풍만한 턱이며 부드럽고 자비로운 얼굴의
표정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요즈음 깨어진 부분에 시멘트를 발
라 못생긴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목에는 부드럽게 게개의 주름(삼도)이 새겨져 있고 편단우견으로 입은
가사는 얇다. 옷주름은 가늘고 몸체는 풍만하다. 뒤에 세웠던 광배는 특
히 아름답다. 원형에 가까운 신광과 보주현 두광으로 된 넓고 큰 광배였
다. 신광에는 어깨의 선을 강조하여 두 줄기의 넝쿨을 새기고 한 쪽에 네
잎씩 새긴 넓은 나뭇잎들이 안쪽으로 나부기는 활기찬 도안으로 되어 있
고 두광에는 백호를 중심으로 원을 돌리고 그 둘레에 보주현 꽃잎을 배치
하여 칠보 연꽃을 피워 놓았다. 그 둘레에 다시 둥근 원을 그려 해무리를
나타내었는데 신광은 약동하는 나뭇잎으로 두었고 두광은 고요한 꽃송이
를 나타내었다. 번뇌로 번잡한 세상에서 고요한 안정을 찾는 여래의 마음
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
동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화려하고 생기에 넘치는 석불 광배는 경주 남산
에서 뿐 아니라 전 신라시대를 통해 보기 드문 걸작이다. 그러나 일제 시
대에 복원해 놓아서 1960년까지도 윗부분이 조금 상한채로 불상 뒤에 서
있었던 것을 아깝게도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에 의해 지금은 떨어져 산산
조각으로 깨어져 버렸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 불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나
아름답다. 곁에 있는 바위들이며 계곡의 여울 등에 잘 조화되도록 배치되
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 위에는 집을 지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노천불이
었던 모양이다. 집을 지을 경우 주위 환경의 분위기와 조화되지 않을 경
우에는 부처님께서 비바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집을 짓지 않았다. 가장
참된 것은 미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던 신라 조상님들은 편이라
기 위해서 미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여래의 존명은 아미타
여래라 생각한다.
6. 냉골 선각 미완성 불상
석조 아미타 여래좌상의 동쪽 등성이는 여려 개의 바위 무리들이 있는데
이 바위들 남면에서 보면 두개의 절벽 바위가 십여 미터 높이로 솟아 있
는데 그 밑으로 여울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 내린다.
서쪽 것은 허리에서 단을 이루어 다시 둥글둥글 솟아 올랐으므로 그 모
양이 기괴하다. 서족 절벽 바위 높은 면에 선각여래상을 새겼고 동쪽 절
벽 허리는 입체로 조각된 것조 약사 여래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각 여래
상 밑에는 발 붙일 곳이 없으니 예배할 자리가 없다. 개울 건너 산 언덕
위에 서야 보이는데 그래도 그 모습은 좀체로 보이지 않는다. 해질 무렵
햇빛이 바위면을 스칠 때 잠깐 모습을 나타내는 신비한 부처님이다. 둥근
얼굴에 육께며 길다랗게 드리워진 귀며 두 어깨로 흐르는 곡선은 선각 석
가, 아미타삼존상과 비슷하다. 불상의 크기는 재어볼 도리가 없지만 암면
의 크기로 보아 굉장히 큰 대불로 짐작된다. 허리부터 아래는 마멸로 인
한 것인지 처음부터 아예 조각을 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현제
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문데 좌상인지 입상인지 알지 못한다.
7. 상선암 마애여래좌불
이 불상은 광배형 암반에 크게 새겨져 있는데 너비4.2미터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온 누리
를 굽어 살피시는 모습이다. 대좌의 연꽃은 두겹으로 피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로 장식되어 지극히 화려하다.
여래상의 높이가 5.21이고 무릎 너비가 3.5가되는 대불이다. 얼굴과 어
깨는 광배면에서 6.6이며 높은 돋을새김으로 사실적인데 비해 옷주름이나
손과 발은 부피 없는 선각으로 나타내었다. 그렇지만 이 불상은 절대로
약하게 보이지 않는다. 바위 자체가 갖고 있는 양감이 둥근 머리와 충분
히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옷주름이나 손발은 선각으로 표현되었어도
박력과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이다. 사각에 가가운
머리는 풍만하고 가늘고 긴 눈은 정면을 내려다 보는데 예리하게 다듬어
진 코는 우뚝하여 굳센 기상을 나타 내었고 굵어 보이는 눈썹은 단정하게
초생달을 그렸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턱은 군턱이 지고 살찐 뺨과 입
술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숨겨져 있다. 삭발한 머리에 육계가 나지막하
고 큰귀는 어깨까지 닿아 있다. 이 불상은 새겨진 바위 전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먼 하늘을 바라 보며 온누리를 제도 하시
는 듯 폭 넓은 기상을 보이고 있다. 머리만 인공으로 다듬었을뿐 몸 전체
는 바연바위 그대로다. 몸체에서는 인공을 생략하고 선각으로 손발을 설
명하여 구수하게 주위의 바위산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하
늘에 계신 부처님이 지상으로 하강하시면 산이나 바위속에 모물러 계시다
가 필요할때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신앙되었다. 만약 이 모든 불상을
모두 얼굴처럼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더라면 불상은 배경의 바위산과 분리
되어 불상조각이 예배 대상으로 위축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부처의 얼굴
만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몸체는 반자연 반 인공으로 배경의 바위산으로
연결시켜 놓았으므로 예배하는 사람의 정신이 바위 속으로 부처님의 영에
예배하게 되니 바위산은 바로 부처님의 궁전이요 법당인 것이다. 남산에
는 큰 법당이 없다. 산과 바위가 모두 부처님이 계신 법당이 되기 대문이
다. 남산의 마애불들은 이렇게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겸손하게 인공을 양
보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듯 신비한 풍경속에 앉아 계신 이 부처님은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으로 짐작된다. 근래 어리석은 사람들이 불상 주위에 시멘트
를 발라 놓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많이 훼손하였다.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
김시습(1435-1493)은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인이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매월당이다. 서울 성균관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다섯 살때
신동이라는 소문이 날만큼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다.
21세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불태
워버린 뒤 스스로 머리를 깍고 전국을 유랑하였다. 31세부터 37세때
까지 경주 금오산(남산)에 칩거하였는데, 그가 머물던 곳이 용장사이
다. 이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충청도 만수산 무량사에서 59세
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문학세계를 옅볼수 있는 현존 자료로는 시문집인 '매월당집'
과 단편소설집 '금오신화'가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
문소설로 인정되고 있는데 그중 5편만이 전할뿐 완본은 알수가 없
다. 다섯권중 '만복사저포기'는 노총각 양생이 죽은 처녀의 혼백과
연애하는 이야기이며, '이생규장전' 역시 이런 사랑을 다루었다. '남
연부주지', '용궁부연록', '취유부벽정기'도 역시 현실을 벗어난 또 다
른 세계를 무대로 하였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귀신이나
염라왕, 용왕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끌여들였으며, 중국이 아닌 우
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과 풍속을 묘사했다는 점
이다. 또한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있으며,
시를 많이 삽입하여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
도 공통적 특징이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
나, 금오산에 머물렀던 30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작가의식
과 내용과 기교에 있어서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한
국소설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의의를 갖
는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쓸때만 하더라도 금오산(남산) 일대에는 보
살들의 목탁소리, 염불소리, 경읽는 소리와 자연이 한데 어울렸을 터
이다.
용 장 사
김시습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 없네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트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 사슴함께 잠들었네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
깰 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645 당 태종 고구려 침입
안시성 싸움에서 당군 격퇴
648 나당 군사동맹
654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 즉위
66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
당, 백제땅에 5도독부 설치
661 태종무열왕 죽고 문무왕 즉위
668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멸망
669 당,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670 안승을 금마저에 두고 고구려왕에 책봉
673 김유신 사망
676 당군을 기벌포(금강하구)에서 격파
삼국통일 완성
698 대조영 발해 건국
남북국시대 열림
* 신라멸망 연표
895 궁계, 후고구려 건국
900 견훤, 무진주에서 반란, 후백제 건국
918 고려건국
926 발해 멸망
927 견훤 경주 침입
935 신라 멸망
936 후백제 격파, 고려 전국통일
[남산에 대하여] 삼릉..
삼 릉
삼불사 입구에서 언양쪽으로 약 400미터를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삼릉계곡이 시작된다. 아달라왕과 신덕
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세 왕릉이 계곡 입구에 있어 삼릉계
곡이라 불리운다. 세 능은 평범한 원형의 봉분이다.
삼릉계곡을 냉골이라고도 하는데,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이 끊
이지 않으며 남산에서 가장 길고도 가장 많은 불상조각이 있는 계
곡이다.
삼릉골정상의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을 보면서 남산의 능선을 타
고 오르면, 포석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 곳에 상
사암이라는 영험한 바위가 있다.
상사암은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주름이 많은 큰 바위이다.
이 험상궂은 바위덩이는 아득한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고 아들낳기를 바라던 부녀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던 바
위로, 지금도 바위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이 있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켠 촛불에
검게 거을어 있다.
상사암의 감실아래에는 석불입상이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토속
신앙과 불교가 밀착되어 왔음을 알게 한다. 석불입상은 높이 80cm
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이다. 머리는 없어졌고 두손은 가슴에 모
아 붙이고 있다. 아마도 남산에서 가장 작은 불상일 것이다. 바위
서쪽면에는 사람들이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 자
리가 있다. 상사암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이 계속 이어
진다. 부드러운 흙길로 발걸음이 가볍게 여겨지는 등산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