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보문품 7
無盡意菩薩 白佛言.
“世尊, 觀世音菩薩 云何遊此娑婆世界 云何而爲衆生說法 方便之力 其事云何”
무진의보살 백불언.
“세존, 관세음보살 운하유차사바세계 운하이위중생설법 방편지력 기사운하”
무진의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님께서 어떻게 이 사바세계에 다니시며 중생을 위하여 어떻게 설법하시며 그 방편의 힘은 어떠하시나이까?”
*웅봉법사 해설*
세상 만상(萬象) 두두 물물이 모두가 부처이다. 부처 아님이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가 모두에게 이익을 주기위해서 존재한다.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서로가 다 서로에게 이익을 주기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대(大) 자비(慈悲)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일체(一切)중생(衆生)시류(時流)불성(佛性)이라고!
존재하는 중생은 유정(有情)이든 무정(無情)이든 모두가 다 불성이 있고 대 자비를 베푼다고 말씀하셨다. 낱낱이 살펴보면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는 이들 동식물과 자연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로 한다.
인간이 살아감에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水)일까? 불(火)일까?
집(家)일까? 모두 틀려다. 공기이다. 산소이다. 인간은 산소가 없으면 단 10분도 못 살아간다.
모두가 죽어야 한다. 숨이 꼴깍 넘어가고 만다. 이 귀중한 산소!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일까? 자연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
자연 중에서도 식물(木)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 그 식물 전체를 우리는 나무라고 부fms다.
나무! 우리 불자님들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말이다. 귀에 익은 말이다.
입에 익은 말이다. 오늘도 불렸다. 내일도 모레도 부르고 익힐 것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 문수보살!
우리불자들은 입만 열면 귀만 열면 듣고 말하는 것이 나무이다.
나무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 귀의(歸依)한다. 이 말인 것이다.
몸과 마음을 받쳐 최선을 다하여 귀의 한다 는 순수한 우리말인 것이다.
누구에게 부처에게! 바꾸어서 말하면 나무란 말은 부처(佛)란 말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나무를 본다. 나무를 접한다.
그러나 나무란 용어 속에 이런 신묘한 큰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쳐다보고서도 아무도 나무의 고마움을 아무도 모른다.
나무는 나의 생명의 젖줄인 산소를 공급해 준다.
나무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양식(糧食)인 곡식을 공급해 준다.
나무는 때로는 집(家)이 되어 주기도하고 땔감(火木)이 되고도 한다.
나무(木)가 내 생명의 은인(恩人)임을 망각하고 있다. 내 생명 자체임을 모르고 있다.
아무도 자연(自然)이 나의 본성(本性)이자 나의 부처인줄을 모른다.
인류역사와 함께 발전되어온 종교는 숲의 종교와 사막의 종교로 분리하기도 한다.
흔히들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에서 기원(起源)한 종교를 숲의 종교라 하고 서양에서 기원한 천주교 기독교 회교 등을 사막(沙漠)의 종교로 분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막종교로 불리는 서양 종교마저도 물과 숲이 존재하는 오아시스를 근거(根據)로 하여 발전하고 전개(展開)되어 왔음을 부인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몇 일후 만나리.~~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서양 종교인들의 장례식예배에 불리는 장송곡(葬送曲)이다.
얼마나 배고프고 목마르고 숲이 그리워서면 죽어서라도 가기를 원하겠는가?
인류역사와 종교발전사에서 숲의 존재가치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절대(絶代)절명(絶命)불가분(不可分)의 관계임을 인정하야 할 것이다.
세상만사 두두 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다.
일체 유정(有情)무정(無情)중생들이 모두가 부처님이시고 관세음보살이시다.
모두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어떻게 이 사바세계에 다니시며”
가 아니라 사바세계 국토자체가 관세음보살님임을 알아야 한다.
“중생을 위하여 어떻게 설법하시며 그 방편의 힘은 어떠하시나이까?””
가 아니라 생명을 이어가는 사바세계 일체중생들의 삶 그자체가 불성임을 알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린상관 그자체가 대자비의 방편이자 대 진리인 것이다.
”佛告 無盡意菩薩. “善男子, 若有國土衆生 應以佛身 得度者 觀世音菩薩 卽現佛身
而爲說法,
불고 무진의보살. “선남자, 약유국토중생 응이불신 득도자 관세음보살 즉현불신
이위설법,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어떤 세계에 중생이 부처님 몸으로 제도해야 될 이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시어 진리를 설하느니라.
*웅봉법사 해설*
여기서 대표적 동양종교 불교와의 나무(숲)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큰 나무를 우리는 대목(大木)로 표현안하고 거목(巨木)또는 고목(古木)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나무로 표현하는 나무는 따로 있다. 바로 죽(竹)나무를 대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류최초의 사원(寺院)은 불교에서 건축한 죽림(竹林)정사(精舍)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최초의 법문 초전법륜을 설하셨다.
그 초전법륜 인연으로 사리불을 비롯한 목건련 마하가섭 등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불법승(佛法僧)삼보를 갖춘 제대로 된 인류최초의 교단(敎團)이 설립된 것이다.
인류 종교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불교(佛敎)교단(敎團)을 찾아 수없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위한 집 (家)이 필요로 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마가다국의 대부호인 장자 독고급의 시주로 넓은 땅에 건물이 지어져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거주하며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원(寺院)건축의 총감독은 사리불이었다.
죽림정사의 최초의 주지는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왜 대나무 숲에 사찰을 건축했을까? 왜 작은(小)나무를 보고도 대(大)나무라고 할까?
인류 종교역사상 최초의 사원을 죽림(竹林)에다 건축한 깊은 뜻을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나무 죽죽(竹竹) 큰다. 인간은 10분간만 숨을 안 쉬면 죽는다.
호흡할 때 들숨을 우리는 풀(木)이라고 한다. 풀은 기(氣)를 뜻 한다.
온갖 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풀이라고 한다. 기운이 풀풀 난다고 표현한다.
땀이 뻘뻘(풀풀이 변형된 말) 난다고 표현한다. 열이 펼펼(풀풀) 끓는다고 표현한다.
모두가 다 욕망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탐욕으로 생겨나는 용어(用語)들이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기(氣)는 무조건 다 받아들이고 본다. 감기도 받아들인다.
설사도 심지어 암(癌)도 받아들인다. 제 죽을 줄 모르고 제다 받아들인다. 거절을 모른다.
호흡할 때 날숨을 우리는 죽이라고 한다. 기(氣)죽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죽을 맛이다. 죽을상이다, 성질 다 죽었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죽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 양보하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
죽는 것! 양보하는 것 버리는 것은 무조건 패배자로 몰아간다.
버리는 아름다운 미학(美學)을 모른다. 비움의 미학을 아직은 모른다.
대나무가 죽죽 자라나는 원리를 모른다.
대나무가 죽죽 자라나는 이유는 속을 아니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모진 풍파에도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견디고 이겨날 수 있었든 것은 속이 비웠기 때문이다. 비움은 죽이다. 죽죽은 확인된 비움을 뜻한다.
죽죽자라는 대나무는 마디를 가지고 있다. 대나무 마디의 줄은 두 줄이다.
대나무 마디마다 가지고 있는 두 줄의 의미는 거절(사양辭讓)과 확인이다.
들어오는 것(풀)을 거절(사양)하고 비움(죽)을 확인하는 것이 대나무의 지혜인 것이다.
대나무의 마디마다 붙어있는 가지도 두 개이다. 이는 겸손과 양보를 나타냄이다.
자비(慈悲)와 정진(精進)을 뜻하기도 한다.
대나무의 깊은 지혜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면 대업을 성취했다고 한다.
대업(大業)을 성취한 사람을 우리는 대인(大人)이라고 한다. 선지식이라고 한다.
보살이라고 한다. 이들 보살, 대인, 선지식들의 주검을 우리는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이들 보살, 대인, 선지식을 비롯한 깨달은 부처님의 주검(열반)은 죽이다.
시신(屍身)이 단단히 굳지를 안이 한다. 물렁물렁 연(軟)하다.
열(熱)이 빠져나가지 않아 몸에 난 구궁(九宮)에서출혈(出血)이 없다.
호흡기를 통해 체내의 공기(산소)를 제다 배출한 상태인 날숨인 호(呼)에서 죽었기때문이다, 즉 죽에서 열반(涅槃)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고 열반했기 때문이다.
범부(凡夫)중생의 주검은 풀이다.
시신(屍身)이 단단히 굳어지고 열(熱)이 빠져나기고 체내 구궁(九宮)출혈(出血)이 나온다.
주검 앞에서도 공기(산소)를 호흡기에 가득 채우는 욕망의 들숨인 흡(吸)에서 죽기 때문이다.
마음을 못비우고 욕망으로 가득 채운 채 주검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몸으로 제도해야 될 이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시어 진리를 설하느니라.”여기서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시어 진리를 설함이 무었일까? 비움이다. 비움의 진리이자 비움의 미학(美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출가(出家)이든 재가(在家)이든 마음을 비울 줄 알이야 한다.
범어사에 주석하셨든 동산(東山)큰스님은 스님들에게 탐(貪)진(嗔)치(痴)삼독심이 일어나면 “머리를 만져보라! 고 경책(警策)하셨다고 한다.
깎은 머리를 만져보고 자신들이 욕망을 버리고 출가가 스님임을 깨 달케 한 것이다.
깎은 머리를 이용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치부(致富)득세(得勢)하는 불자(佛子)아닌 승려는 없어져야 한다. 재가(在家)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호구지책(糊口之策)의 방편 불교는 삼가야 한다.
마음을 비우는 불교! 출가불교가 나갈 길이고 재가불교가 지키고 가꾸어 가야할 불교이고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것이다.
보공양진언: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
보회향진언: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마하 자거라 바훔.
원성취진언: 옴 아모카 살바다라사다야 시베훔.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새야목게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