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부 관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기
묵상; 나를 돌아보게 하는 제3의 눈
거룩이란 일상에서 탈출해 낯선 오감으로 세상을 감지하는 연습이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觀照)’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Theoria)’,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이론(theory)’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배우는 관객과 자신의 몰입을 돕기 위해 ‘가면’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입과 얼굴을 가린다.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인간(person)’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인간은 원래 가면을 쓴 존재다. 이는 ‘가식적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우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한 배역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했는지를 묻는 존재’라는 뜻이다.
단절; 과거의 나를 과감히 버리는 용기
『창세기』 1장은 흔히“태초에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처음이라는 순간을 통해 신이 혼돈 상태의 우주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로 해석될 수 있다.
혼돈에서 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처음이란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문지방이다.
처음은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는 137억년전의 빅뱅과 같은 순간이다. 처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등장한다. 새로운 경험은 137억 년 전의 빅뱅으로 우주가 아직도 팽창하듯이 매순간 그 처음을 유지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서술한 지식인은 ‘창조하다’를 ‘바라(bara)’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했다. ‘바라’의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창조’란 ‘무에서유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사제가 쓸데없는 것을 과감히 잘라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자신의 삶에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나 체면 따위를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다.
유대 지식인은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습관적으로 해 오던 일상을 멈추고 일상을 새롭게 관조함으로써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안식일’의 습관을 만들었다(영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스(sabbath)’는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잠시 멈춰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창조적인지, 목숨을 걸 만한지 돌아보라. 그저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과감히 잘라내야만 다시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숭고; 불완전한 나를 끌어안는 삶의 태도
숭고함은 자연, 특히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대한 경험에서 발견되며, 관찰하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완성한다. 즉, 숭고함은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고 반응하는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
숭고함은 경외,두려움,공포에 대한 반응이다. 숭고함은 나를 넘어선 어떤 것으로 이성의 판단을 초월해 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무한을 지향한다.
대상을 응시하다 보면 관찰자인 주체가 점점 사라지고 대상이 주체를 압도한다. 이때 관찰자의 반응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착함과 악함, 향기로움과 악취 등의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선다. 내가 그 대상을 바라보지만 어느순간에 나는 없어져 무아상태로 들어가고 오히려 그 대상이 나를 관찰한다. 나는 이 숭고함을 경험하며 환희에 찬 눈물을 흘린다.
현관(玄關), 즉 서브라임은 위험하고 어둡고 절망적인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광명하며 희망적인 공간이다. 모세가 신과 만난 ‘가시덤불’이며, 세상에 나오려는 아이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머니의 산도(産道)다. 플라톤은 이곳을 그리스어로 ‘코라(chora)’라고 불렀다. 코라는 항상 무섭고, 외롭고,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부정적 수용 능력은 모순 상태를 있는 그대로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으려는 삶의 태도다.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출발한 부정적 감정들을 자신을 위한 튼튼한 기반으로 만드는 능력이자, 엄습하는 불안과 초조, 외로움과 우울함, 애매모호함을 자신이 상상한 찬란한 미래를 위한 굳건한 발판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자신이 처한 낯설고 힘든 경계가 사실은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는 심오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 앞에 놓인 불완전한 삶을 한결같은 인내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일이다.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절망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그 숭고함을 위해.
사유;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거룩한 선물
나는 내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나의 얼굴, 몸가짐, 처한 환경은 내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다. 다가올 미래도 내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
사유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정과 망치를 통해 어제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구태의연함을 쪼아 버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 나의 생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예수는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라고 단언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여기, 농부가 매일매일 일구는 밭,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그 삶의 터전이다. 다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안에 든 보화를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 보화를 발견하는 훈련이 바로 ‘생각’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송골매의 눈으로 나를 보는 연습, 최고의 경지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관조하는 것이다. 서양 전통에서도 ‘묵상’은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 즉, ‘자신의 모습을 독수리의 눈으로 찍어본다’는 의미다.
결국 사유란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터전을 극락이라 여기며 매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와 이 시간이 나의 사유의 대상이며, 그것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고자 결심할 때 신은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관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연습
일상의 진부함을 넘어 참신한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을 찾는다. 자연은 그것을 응시하는 우리의 눈과 몸으로 스며들어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이런 숭고한 경험은 우리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본다’는 행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그저 보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 습관과 편견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보는, 눈앞에 나타나는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수동적인 시각적 반응이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이런 고착된 시선을 ‘무식(無識)’이라고 한다. ‘무식’을 의미하는 고전 아랍어 ‘자힐리야jahiliyyah’에는 쉽게 화내고 우월적 지위로 해를 끼치는 특징이 있다. 일상에서 자주 화내고 폭력적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살펴보는 행위는 그저 보는 것과 달리 보려는 대상이 확실하며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약간의 주의와 노력만 기울이면 되므로 변화와 혁신에 필요한 에너지가 발휘될 여지가 없다.
세 번째는 ‘관찰(觀察)’이다. 관찰은 깊이 보는 행위이며, ‘무아성(無我性)’이 특징이다. 관찰을 시작하는 순간 대상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호하고도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사로잡아 숨을 멈추게 한다. 이 순간 나라는 자아가 소멸하면서 대상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관찰이란 가시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안 보이는 것을 보는 행위’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뇌와 눈을 훈련해왔다. 하지만 그 대상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닌 관습과 편견의 시선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는 편인가, 아니면 오래 관찰하며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는 편인가.
오만;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
오만은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나 특권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마음이며,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다주는 첫 번째 단추다. 그리스어로는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휴브리스는 초심을 잃었을 때 반드시 따라오는 극도의 자만심이자 과도한 자기확신의 마음 상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눈앞의 현실을 바로보지 못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다.
오만에 빠져 눈 뜬 장님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불행이 있다. 이 불행을 그리스인들은 ‘네메시스(nemesis)’라고 하는데, 원래 의미는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 즉 내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을 때 감수해야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 누리고 있는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자신을 혜택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오만-장님성-불행이라는 미로에 걸려든 것이다.
심연; 이제껏 발을 들인 적 없는 미지의 땅
몰입이란 자신을 새로운 시점, 높은 경지로 들어 올려 그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이다. 몰입은 또한 군더더기를 버리는 행위다. 이런 구태의연한 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래된 나로 살아갈 것이다.
심연(深淵)은 이제껏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이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곳, 태초에 세상을 만든 세상의 배꼽이다. 이 심연의 존재를알고 운명적인여정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한다.
『길가메시』는 길가메시라는 영웅이 영생을 찾기 위해 바다 속 심연으로 내려가 불로초를 따오는 이야기다. 『길가메시』는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아 목숨을 건 이 숭고한 여행에서 영생이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기술, 즉 영생을 추구하는 삶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웅이란 두려움 없이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이다. 또한 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심연을 보는 사람이다. 길가메시는 먼 길의 여정에서 그리고 죽음의 고통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었다. 죽음 속에서 삶을 발견했고, 고통 속에서 삶의 희열을 발굴했다.
그렇다면 내가 감행해야 하는 인생의 여정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내가 추구해야 하는 나의 심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