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2. 허물어져 가는 유화당·정효각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 북구 도남동.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도남동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골짜기 형태를 하고 있다. 도남동 최북단 도남지 못 둑 바로 아래에 마을이 하나 있다. 자연부락명은 ‘사창리(社倉里)’, 별칭은 ‘국동菊洞’이다. 국동은 우리말로 ‘국화 마을’이다. 이 마을 중앙에 두 채의 고가(古家)가 있다. 지역에서는 인천이씨 ‘재실’ 혹은 ‘종택’이라 부르는 유화당과 남호정사다. 이번에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는 유화당과 그 집 대문인 정효각에 대한 이야기다.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
인천이씨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 벼슬을 지낸 이허겸(李許謙)을 1세조로 한다. 여러 분파 중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장가로 이름 난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를 파조로 하는 분파가 쌍명재공파다. 쌍명재공파가 영남으로 낙남(落南) 한 것은 영월 장릉 배식단(配食壇) 조사위(朝士位)에 모셔진 단종 절의신(節義臣) 인천이씨 14世 이의산 이후부터다. 그의 혈족들이 세조 치세기를 피해 낙남한 것이다.
쌍명재는 이정·이양·이온·이세황·이아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다. 이중 장남인 이정(李程)의 직계 후손이 바로 도남동에 세거하고 있는 국동 문중이다. 국동 문중은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쌍명재공파 백파(伯派)로 이어오다 18世 이공전(李公詮)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분파다. 현재 쌍명재공파 맏집은 경북 경산이며, 작은집이 대구 북구 도남동이다.
국동 문중이 낙남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의 대구 수성구 지산동 무학산 남쪽 능인중고등학교 일원이었다. 이후 이공전 대에 이르러 지금의 북구 태전동 대구과학대 인근으로 옮겨 100여 년 우거(寓居) 후, 22世 간재(澗齋) 이성량(李成梁·1624-1720)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의 도남 국동에 터를 잡았다. 14대 350년 내력 국동 문중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국화 가득한 집’ 유화당과 범국회
유화당(有華堂)은 국동 입향조 이성량의 7세손인 화암(華庵) 이해준(李海準·1816-1886)이 1864년(고종 1) 초가로 처음 건립했다. 이후 1916년 이해준의 아들 의금부 도사 남호(南湖) 이병규(李秉珪)가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꿨고, 유화당 대문이자 대구 유일의 대문형 정려각인 정효각을 세웠다.
유화당 내력은 창건주 이해준이 지은 ‘유화당기’에 잘 나타나 있다. ‘유화당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글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국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동 입향조 때부터 거처에 국화밭을 조성해 이해준 자신에 이르기까지, 무려 7대 200년 세월을 내려오면서 모든 후손이 하나같이 거처에 국화밭을 두었다는 것. 또 그런 연유로 당호도 ‘국화 가득한 집’, 유화당이라 명명했다는 것.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다. 이해준은 선조의 국화사랑 정신을 자신 당대에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유화당을 건립한 1864년 9월 중양절, ‘유화당 범국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범국泛菊’은 국화잎을 띄운 국화주를 즐기는 것으로 중양절의 세시풍속이자, 국화밭에서 국화주를 마셨다는 시인 도연명 고사에 연원한 옛 선비문화였다.
지난 2020년 11월 6일. 도남동 유화당 인근 도남재에서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팔거역사문화연구회’ 주관으로 156년 만에 ‘유화당 범국회’가 다시 열린 것이다. 올해도 며칠 전인 10월 27일, 유화당 앞 한 문중원 집 정원에서 유화당 범국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북구문화원’에서 진행했는데 유화당 탐방을 겸해 약식으로 진행했다. 그래도 국화차를 즐기고, 유화당에서 나온 내방가사를 읽고, 경전암송도 하고, 종부님과 대화를 나누는 등 할 건 다 했다.
대구 유일 대문형 정려각, 정효각
정려(旌閭)는 조선시대에 충신·효자·열녀를 장려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다. 정려를 받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거쳐야 하고, 일단 정려가 결정되면 추증·면천(免賤)·복호(復戶)·사면 등 조정으로부터 많은 은전이 주어진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정려각은 건축 재료나 형태를 기준으로 크게 ‘목조 정려각·석조 정려각·대문형 정려각’으로 분류를 한다. 가장 일반적인 유형은 목조 정려각이다. 대부분 목조 정려각은 흙돌담 안에 커다란 기와지붕을 갖춘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목조건물 형식이다. 석조 정려각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든 정려각이다. 좌우 두 개의 돌기둥 위에 돌지붕을 얹고 그 사이에 돌로 만든 석판 형태의 정려편액을 끼우거나, 아니면 비석을 세운 형태다. 마지막으로 대문형 정려각이다. 대문형 정려각은 실제 사용하는 대문 윗부분에 홍살과 함께 정려편액 등을 설치한 유형이다. 대문형 정려각이 생겨나게 된 것은 본래 대문 앞에 세웠던 정문(旌門)이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고 유지 관리가 어려워지자 대문과 결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문형 정려각은 그 예가 많지 않은데 특히 우리 대구에서는 현재 딱 한 동이 남아 있다. 바로 도남 국동 유화당 대문 정효각이 그것이다.
더 넓은 세상과의 소통, 유화당계안
대구에는 수 백 년 내력을 지닌 계가 지금도 여럿 있다. 600년 내력을 자랑하는 ‘강선계’[수성구 고산 세거 문중 아산장씨·밀양박씨·옥산전씨]와 ‘교부계’[한훤당 선생 생전에 결성된 계]’, 200년이 넘는 ‘이락서당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유화당에서 결성된 매우 특이한 계 하나가 있다. 아마 대구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예가 아닌가 싶다. 유화당에서 결성된 ‘유화당계’다. 아쉽게도 지금은 명맥이 끊겼지만 유화당계안에는 무려 885명에 이르는 좌목(座目)이 등재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계원들의 연고지가 대구·칠곡을 넘어 전국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에필로그
필자가 유화당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이 2015년 7월이니 어느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유화당이 지역 사회에 알려지는 등 나름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유화당과 정효각은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비지정문화재인 탓에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종택 ‘남호정사’는 이미 타인 소유가 됐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허물어져가는 유화당처럼 혹여나 고령인 종부 안동권씨 할머니의 의지가 약해질까 걱정이다. 할머니는 영천 화북면 안동권씨 집성촌 학지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