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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8]
■ 동학소설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_ 작가, 전 서울대 교수
제23화 북접 동학군의 마무리 전투
이종만은 갑오년 11월 30일 아산만 송악산 석포에서 동학도와 유회 측 에 진지를 넘기고, 관군 차림을 한 별동대 본대 300명을 소대별로 남진케 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호남 동학군이 전라도로 내려간 후 어떻게 되었 는지 궁금했다. 그 뒤를 따라간 손병희 호북 군은 호중 군 남부 지원대와 별동대 지대의 협력을 받아 잘 싸우고 있는지? 손병희는 과연 해월 최시 형을 잘 찾아서 모시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두루 궁금했다.
도중에 예산으로 서북 총관령 박인호 대접주를 찾아가기로 했다. 송악 산 전투 결과에 관해서 보고도 하고, 그간 내포 지역 동학군의 근황을 들 어보기로 했다. 박인호 진영에서는 별동대가 관군 복장에 말을 타고 지평 에 나타나자, 처음에는 관군이 오는 줄 알고 긴장하고 있다가 궁을기가 펄 럭이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형님, 송악산 석포에서 전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동생, 아산만 석포 대첩을 축하합니다. 승전보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동생은 하늘이 내린 명장이오. 이번 석포 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을 연상케 합니다. 야반에 석포로 쳐들어온 왜적을 간만의 차를 이용해서 일격에 무찔렀으니….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오.
날이 푹한 것을 보니 비가 올 것 같소. 호궤犒饋를 베풀겠으니 며칠 좀 쉬고 가시지요.”
박인호 진영에서는 소와 돼지를 잡고 인근 각처에 수소문해서 술동이를 대령케 했다.
“전라도 사정은 좀 듣고 계십니까?”
“전봉준 군이 겁을 먹고 전주에서 물러났다는데, 원평이나 태인에서 전 력을 좀 보강하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소.”
“보름 전 전봉준 대장이 노성에서 전라도로 후퇴한다기에 모든 게 여의 치 않게 되면 산맥으로 전전하면서 유격전을 수행하겠다니까, 그렇게 하 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합디다.”
“영해 거사 후 산간을 헤매던 때처럼 도를 닦으며 후일을 도모해야지 요.”
*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새벽에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별동대는 아침 식 사 후 다시금 관군 복장을 하고 소대별로 남진했다. 우선 한다리(大橋) 동 쪽 인근 월성리로 오일상 대접주를 찾아갔다. 그도 역시 별동대가 송악산 석포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하늘이 도우신 거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이오.”
“호남 군이 전주에서 후퇴했다는데, 금영錦營 중군 임기준을 만나 좀 알아보려고 합니다.”
“미나미(南)가 중로군과 서로군을 이끌고 이두황의 장위영 군과 이규태 의 통위영 군까지 대동하고 내려갔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소.”
“그렇게 된다면, 호북 군은 해월 선생님을 찾는 대로 곧 북상하게 될 겁 니다. 임기준을 만나서 동향을 알아보겠으니, 형님은 지명장을 중심으로 전투태세를 강화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리 하겠소. 그간 호중 군은 각 지역에서 포접 별로 훈련을 해왔어요.”
이종만은 오일상이 베푸는 승전 축하 오찬을 들고 별동대를 이끌고 계 룡산 신도안으로 말을 달렸다. 저녁때 신도안에 들어서니 임기준이 기다 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방금 돌아왔어요. 폭설에 갇힌 노루와 토끼를 여러 마 리 잡았는데 마침 잘 오셨소. 최근 아산만 송악산 석포에서 일본군 보급 부대가 자금과 실탄을 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의 공헌인 줄 짐작하고 있었소. 눈 속에 이리 오셨으니 좀 푹 쉬시다 가시지요.”
“지난번에도 눈 오는 날 인근 벌판에서 선봉장 이규태를 만나게 해주셔 서 감사했습니다.”
“선봉장도 장군의 조언에 자신감을 얻어서 일본군 측 월권에 잘 항변했 을 겁니다.”
“제가 진언한 것이 효험을 좀 봤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효험이 난 것 같습디다. 완영完營에서 도선봉장都先鋒將께 보고한 것을 보니까, 그제 미나미(南)가 신임 이도재 전라감사를 만난 다음, 이두황 장 위영 군을 대동하고 남원으로 떠났답니다. 그런데 이규태 선봉장은 하루 전에 자신의 통위영 군과 함께 서로군을 지휘해서 장성 방면으로 떠났다 고 하더군요. 모리오(森尾) 대위가 그의 예하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 까?”
“그러면 남북접 동학군이 전주에서 물러난 후에도 다 패전했다는 말씀 입니까?”
“미나미(南)가 대군을 이끌고 삼례로 내려가자. 전봉준은 지레 겁을 먹고 전주에서 원평으로 물러나서 재기를 도모했지만, 거기서도 크게 패했답니 다. 군량미와 탄약도 다 버리고 태인으로 달아났다가, 거기서도 또 다시 크게 패하고 다 흩어졌답니다.”
“그러면 전봉준 대장 등 지도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디론가 달아났겠지요. 별수가 있겠습니까?”
이종만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쯤 두 거두가 어디선가 눈 속을 헤매고 있 을 것만 같았다.
“내일 금영에 들어가 좀 살펴보리다. 국정과 전황에 관한 소식이 전보로 속속 들어오니까, 이곳에 며칠 계시면서 정세 파악을 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이튿날 아침 임기준은 금영으로 출근했다. 이종만은 별동대를 소대별로 풀어서 눈 속에 사냥을 하게 했다. 너구리 노루 토끼 등을 많이 잡아 소득 이 수월찮았다. 취사조가 푸짐한 정찬을 준비했다.
임기준이 오후 늦게 금영에서 돌아왔다.
“김개남이 잡혔답니다. 지금 관군 일본군이 전봉준을 쫓고 있답니다.” “하- 맙소사. 하늘도 참 무심하십니다.”
“누구를 탓하겠소…. 지난 8월 1일 내가 정안에서 기포하고 이튿날 일천 여 동학군을 이끌고 금영을 점거했습니다. 전봉준 측에 즉시 연락해서 시 급히 올라와서 공주성에 포진하고 경사京師로 북진하자고 했더니 거절합디 다. 일본군이 평양성 청군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 후방을 교란하 면 크게 노해서 임금께 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무렵 대원군의 교시를 받들어서 그의 손자 내무대신 이준용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엽지초葉志超 등 청나라 장수들과 남북에서 기각지세掎 角之勢를 이루어 일본군을 격멸하자고 약조를 맺었습니다. 청국에서 최신 무기도 대주기로 했습니다. 평양에서 돌아와서 대원군과 이준용 대감을 만나서 청군과의 약조에 따라 남북에서 일본군을 치기로 하고, 전봉준 대 장을 찾아가 동참을 건의했더니 역시 같은 이유를 대며 거절했습니다. 가 을에 곡식이 익는 것을 기다려서 출정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요. 그래서 해월 선생 이름에도 때 시時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각지세掎角之勢는 동서고금의 전법인데, 그 절호의 기회 를 버렸다니….”
“전쟁은 장수가 하는 겁니다. 농민한테 업혀서 관아나 턴 서생이 전술을 알기나 한답니까?”
“10월 보름 제가 호중 군을 이끌고 논산으로 가서 전 대장한테 공주를 치자고 했더니, 충청감사 앞으로 16일 격서를 보내고서도 손병희 군을 마 냥 기다렸습니다. 손병희는 영동에서 모병을 한답시고 5일이나 끌다가 21 일에야 옥천에 왔습니다. 전 대장은 그날 목천 세성산에서 동학군이 무너 지고 22일 일본군이 천안에서 남진하자, 비로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제가 호중 군을 이끌고 공주성 남쪽 우금치를 치고, 호남 군이 동 쪽 효포로 가서 공산성 북문 앞에 올 호북 군과 동시에 진입작전을 전개하 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22일 서로군 아카마츠(赤松) 지대가 내포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저는 박인호를 구원하러 예산으로 갔고, 23일 조재벽이 저 대 신 호중 군을 이끌고 우금치로 가다가 이인에서 관군 일본군의 공격을 받 았습니다. 유구의 최한기가 저와 한 약조에 따라 유구에서 도강해오자, 충 청감사가 기겁을 하고 이인에서 싸우고 있는 관군 일본군을 회군케 했습니다. 그때 조재벽이 그냥 우금치로 밀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전 대장이 23일 아침 옥천을 떠난 손병희 군을 기다리다가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습 니다.”
“하- 그게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손병희는 10월 23일 저녁 한다리(大橋) 못미처 한솔벌(世宗市한솔동)에 도착했으나, 이튿날 새벽 경리청 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해서, 오던 길 로 되돌아갔던 겁니다. 24일 오전 전봉준 대장은 효포로 진출해서 손병희 호북 군을 하릴없이 기다리며 소극적인 전투를 하다가, 오후 늦게 모리오 (森尾) 서로군 본대와 이규태의 통위영 군이 공주에 입성하게 되면서, 양 측 전력의 우열이 뒤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24일 이종만 장군이 당진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두셔서 쾌재를 불렀지요.”
“저는 24일 승전곡 전투 후 미나미(南)가 청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25일 문의 지명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날 아침 호북 군이 뒤늦게 공산성 쪽으로 나타났고, 호중 군은 곰티 남쪽 월성산을 공격했지만, 전봉준 군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효포에 나타났습니다.”
“모리오(森尾) 중대장은 전봉준 군을 곰티를 노리는 주력으로 보고 대적 하다가, 너무나 약세라서 2(未)시 경군한테 전장을 맡기고 금영으로 들어 가 쉬었답니다.”
“그 시각 월성산을 치던 호중 군은 미나미(南) 군과 싸우려고 지명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후 호남 군과 호북 군은 효포 동안에 늘어서서 경군과 포격을 주고 받다가 물러났는데, 그날 밤 전봉준 군은 경리청 군의 기습을 받고 달아났 고, 손병희 군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1월 8-9일 우금치 전투도 한풀이 전투였습니다. 전 대장은 지난봄 장 성 황룡촌에서 커다란 장태를 굴려서 방패로 삼고 밀집대형을 지어서 공 격해 승전했지만, 우금치에서는 그런 장태도 없는데도 병사들에게 밀집대 형을 지어서 무턱대고 밀고 올라가게 해서 수많은 희생을 자초하고 말았 습니다. 그것도 우둔하게 40-50번이나 반복해서 수많은 동학군을 죽음으 로 몰아넣었습니다. 전술이 결여된 한풀이 전투였습니다.”
*
손병희는 11월 25일 저녁 원평 전투 후 달아나는 전봉준에게 쫓아가서 해월 선생을 찾아 노령(蘆嶺,갈재)으로 간다고 말했으나, 그가 필경 태인에 서 또 항전하리라 짐작하고 다시 북접 군을 이끌고 태인으로 쫓아갔다. 도 인으로서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전봉준이 27일 태인 전투에서 다시 패하고 김개남과 어둠 속에 달아나 지난봄 손화중 등과 기포한 백산白山으로 올라가자, 손병희도 북접 군을 이끌고 따라갔다.
자정에 백산 꼭대기서 (天主)께 패전을 고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지도부가 서로 위로의 말을 했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었다. 손병희가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고향 마을로 갈 거요.”
“저는 해월 선생님을 찾아 산맥을 타려고 합니다. 노령을 넘어오세요.”
손병희는 28일 날이 밝자 북접 군을 이끌고 정읍으로 갔다가, 이튿날 29일 갈재(蘆嶺)를 넘어 장성으로 향했다. 후진으로 따라오던 손천민이 갈 재를 넘다가 해월이 나뭇가지에 매어놓은 창호지를 발견했다. 길손에게 귀신을 쫓는다는 평범한 주문이었지만, 살펴보니 해월의 필적이 분명했다. 담뱃대에 불을 붙여 열을 가했더니 항간에 붉은 글씨로 경통敬通이 나 타났다.
“그대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수도한 은덕인 줄 알라. 도인 중 진실 한 이가 적고 다수가 도적이면 몰살할 테니, 감당할 만큼 부리는 것이 좋 을지라. 심허선행心虛先行.”
해월은 호남 군 지도급이 패전 후 당하게 될 사정을 꿰뚫어 보고 당부한 것이었다.
손천민은 29일 밤 담양에 도착해서 손병희 처소로 갔다. 그 쪽지를 내보 이며 해월의 뜻에 따르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손병희는 당당한 목소리 로,
“수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대사를 경영하다가 그저 해산할 수는 없습니 다.”
“심허선행心虛先行이라 하셨으니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선생님께 갑시 다.”
“마음을 비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친지 허선許仙에게 마음을 두고 먼저 가신 거니까요.”
“계유(癸酉,1873)년 임실 갈담葛潭 새목터(鳥項)에서 허선 집에 머무신 일 이 있습니다.”
손천민은 11월 30일 그믐날 짐짓 스승을 속히 만나 교시의 뜻을 확인이 라도 할 듯, 이종만이 보내준 별동대 소대를 앞세우고 호중 군 남부 연대 지원대를 이끄는 조재벽과 함께 먼저 임실 쪽으로 떠났다. 손병희도 천여 호북 군을 후진으로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손천민 선진과 손병희 후진은 밤낮으로 폭설을 뚫고 110리를 주파하는 강행군 끝에, 12월 2일 저녁 임실 갈담(江津,葛潭)에 도착했다. 섬진강 가의 아담한 고장이었다. 하루 전 미나미(南) 소좌가 예하 중로군과 이두황 장위영 군을 이끌고 임실에서 숙박하고 30리 남쪽 오수獒樹로 떠났다고 했 다. 하마터면 각중에 전투가 벌어져 큰 변을 당할 뻔한 것이었다.
이튿날 12월 3일 오전에 눈이 그치자 손병희는 병사들을 갈담에 머물게 하고 손천민 등과 함께 갈담천을 거슬러 올라가 새목터(鳥項)에 이르러 가 까스로 해월 처소를 찾아냈다.
“선생님, 그간 강령하시옵니까?”
“나는 무사하오. 귀공들도 무사하니 다행이오. 그동안 모두가 수도를 잘 해온 덕분이오.”
정찬 후 담소를 나누는데, 밖에서 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김개남이 태인 종송리로 갔다가 측근의 배반으로 잡혀서 완영完營으로 끌려갔답니다.”
“저런, 저런, 어쩌다….”
4일 오전 급보가 또 당도했다.
“전봉준이 그제 김개남을 만나러 순창 피노리避老里로 갔다가 측근의 밀 고로 잡혔답니다.”
“허-, 허-, 이를 어이 할꼬-. 이게 다 운수로다. 이게 다 운수로다.” “두 거두가 잡혀갔고 그들의 군사도 다 흩어졌으니,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내가 신미(辛未,1871)년 영해 거사 때 명숙明淑 이필제의 압박에 끌려가 다가 대사를 그르쳤더니, 최근 몇 년에는 명숙明淑 전봉준의 중력에 끌려 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
이종만은 12월 3일 저녁 금영錦營에서 돌아온 임기준한테 김개남이 태인 종송리에 갔다가 측근의 배반으로 잡혀서 완영完營으로 끌려간 소식을 들 었다. 그는 4일 저녁에도 또 전봉준이 순창 피노리로 김개남을 만나러 갔 다가 측근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비보를 전해주었다.
“하-, 좋은 세상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그렇게도 불의에 항거하시더 니….”
“전장에서 약자는 사라지게 마련이오. 반란에서도 이기면 영웅이고 지 면 역적이오.”
“동학란으로 청군 일군의 진출을 초래해, 이 한 몸 바쳐서 죄를 씻겠다 고 하시더니….”
“이 한 몸? 그로 인해 죽어간 십만 생령의 원혼은 어찌하고, 그로 말미 암아 다친 백만 동학도는 어찌하고, 그로 말미암아 굶주리고 원망하는 천 만 백성은 어찌 하자는 거랍니까? 결국 그로 말미암아 국권이 일본에 넘 어갔습니다. 저 혼자 죽겠다는 것은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튿날 12월 5일 오전 이종만은 별동대를 이끌고 지명장으로 달려갔다.
“형님, 전봉준 대장이 김개남을 만나러 그끄제 순창 피노리로 갔다가 잡혔답니다. 김개남 장군도 하루 전 태인 종송리에서 잡혀서 완영으로 끌려 갔답니다.”
“북접 군은 전라도에 더 있을 필요가 없으니, 해월 선생님을 찾는 대로 북상하겠지요. 우리가 무주쯤 미리 나가 있다가 영접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조재벽 대접주가 전봉준 군을 따라 남행할 적에 이미 별동대 한 소대를 붙여 보냈으니 휘하의 남부 연대 지원대를 이끌면서 호북 군과 함께 기본 적인 호위는 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설치면 관아에서 무슨 눈치를챌지도 모릅니다. 우선 별동대 한 소대를 무주 접경에 보내서 호북 군 등 동향을 살피게 하고, 다들 올라오는 기색이 보이면 그때 출동해도 될 것입 니다.”
별동대 선발대가 무주군 남쪽 끝 안성장터에 북접 군이 집결한 것을 목 격했다. 12월 8일 별동대 본대 300명이 무주 접경에 나가서, 해월을 모시 고 오는 북접 군을 맞이했다.
“선생님, 그간 강령하십니까?”
“이종만 장군의 승전보는 잘 듣고 있었지. 싸우는 족족 다 이겼다면서?” “형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 장군의 쾌거는 잘 듣고 있었소. 영동에 들어서면 곧 큰 싸움이 벌어 질 텐데, 우리는 재래식 무기뿐이라 대적하기 어려울 것 같소. 아무래도 이 장군이 좀 지휘를 해주어야 할 것 같소.”
“예, 미력이나마 소임을 다 하겠습니다.”
이종만은 호중 군 중부 연대와 남부 연대를 총동원하기로 했다.
*
12월 8일 북접 군이 무주에서 영동으로 진출하자, 금영에서는 남접 군 이 다시 올라온 줄 알고 놀랐다. 급거 금영을 지키는 경리청군 가운데 70 명을 차출해서 보은으로 보냈다. 또 청주 병마사로 하여금 진남영 군 180 명을 보은으로 보내게 했다.
호중 군과 호북 군은 9일 청산과 황간에서 준동하는 민보군民堡軍을 각 기 척결하고, 10일 용산장터로 집결해 합진했다. 같은 날 보은에 있던 관 군도 동학군이 영동으로 진출한 것을 확인하고, 11일 청산으로 이동했다. 바로 그 날 동학군이 청산으로 넘어가는 수석리 길목에서 5백여 민보군을 박살내서 청산의 정토군征討軍과 대결 상태에 들어갔다.
이종만이 11일 청산에 집결한 관군의 동향을 염탐해 보니 경리청 군 70 명과 진남영 군 180명이 전원 양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3천여 명이나 되지만 거개가 화승총이나 기타 전통 무기를 들고 있었고, 양총을 든 자라고는 별동대 77명뿐이었다. 양총 1정이 화승총 100정에 해당한다고 가정하면 관군은 민보군까지 가세해서 전력이 동학군보다 4배나 강했다.
이종만은 11일 저녁 북부 연대 오일상과 남부 연대 조재벽을 대동하고 손병희의 호북 군 진영으로 갔다. 호중 군과 호북 군의 연합전선을 이루어 내려는 것이었다.
“형님, 경리청 군 70명과 진남영 군 180명이 합진해서, 지금 청산에 수 많은 민보군과 함께 집결해 있습니다. 내일 새벽 용산으로 쳐들어올 것 같 습니다. 우리 동학군은 수는 3천여 명이나 되지만, 양총을 든 자라곤 별동 대 77명뿐입니다. 관군 측이 민보군까지 있어서 전력이 우리보다 4배나 강합니다.”
“허-, 그럼 어떻게 하면 승전할 수가 있겠소?”
“용산龍山은 산세가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지름이 10여 리나 되 는 고리(環)를 이루고 있습니다. 관군은 내일 새벽 북쪽 청산에서 용산장 터로 남하할 것입니다. 양총을 든 별동대 77명은 천보총과 화승총을 든 조교대 300여 명과 함께 동서 양쪽 산록에서 V자로 북쪽을 향해 포진할 것입니다. 호중 군도 공격 태세를 갖추고 양쪽 산록에 숨어있을 것입니다. 호북 군은 일찌감치 청산 접경까지 나가 있다가, 관군이 공격해오면 대 충 싸우는 척하며 분지 남쪽 끝자락까지 5리 남짓 후퇴하십시오. 그들이 고리(環) 안에 다 들어오면 저의 공격 나팔 소리에 별동대와 호중 군이 동 서 산록에서 하향 사격을 할 것입니다. 호북 군도 산기슭으로 올라가며 들 판에 있는 적을 향해 사격하면 됩니다.”
“하, 탁견이오. 그대로 하겠습니다.”
예상대로 12일 새벽 관군이 북쪽 청산에서 민보군과 함께 쳐내려왔다. 이용구가 호북 군을 이끌고 청산 접경까지 나가 있다가 관군 민보군이 나 타나자 후퇴 작전을 잘 연출해 냈다. 관군이 분지 안에 다 들어오자 이종 만이 공격 나팔을 불었다. 별동대와 조교대 및 호중 군이 그들을 향해 사 격을 가했다. 호북 군도 고지로 올라가며 그들을 향해 사격했다.
관군 민보군은 뒤늦게 포위된 것을 알고 사상자를 많이 낸 채 혈로를 열 고 오던 길로 도망쳤다.
*
13일 북접 군은 장군재를 넘어 문바위골(門岩里,閑谷里)로 갔다. 임시대도 소臨時大都所로 쓰던 해월 가家를 비롯해서 온 동네 80여 호가 거의 다 불에 타고 빈터만 남아있었다.
“사모님과 따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리이긴 하나 지금은 도를 구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을 먼저 생각 할 때니라.”
이종만은 북접 군이 청산에 유진하는 동안 백화산白華山으로 첫째 부인 손씨와 최윤이 숨어있던 곳을 찾아갔으나 산막이 텅 비어있었다.
‘어디로 거처를 옮겨간 것인가? 혹시 잡혀간 것은 아닌지?’
이종만은 청산 관아를 덮쳤으나, 다들 도망가고 역시 텅 비어있었다. 청 산현이 옥천의 속현이라서 최윤이 옥천 관아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해월에게 옥천 관아를 치자고 건의했더니, 지금은 작전 중이 니 차차 해도 될 것이라고 만류했다.
북접 군은 16일 북쪽으로 행군해 워내미(元南) 장터에서 숙박하고 17일 아침 장내리로 올라갔다. 아-, 어찌 된 일인가…. 옥녀봉 기슭에 우뚝 서 있던 대도소가 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손병희가 지난봄 원 평 목수들을 초빙해 지은 가로 8칸 세로 6칸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이었 다. 천변에 줄지어 있던 초막 400여 채도 모두 다 불타버리고 흔적도 거 의 없었다. 가근방 마을도 장터도 성한 집이 별로 없었다.
*
동학교단의 본거지가 폐허가 되었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종만이 말하던 대로 이제는 산맥을 타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해 거 사 후 산간을 헤매던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리 동학군이 수 천 명이나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속리산 북록 용해(龍海,龍華) 솔면이(松面 里)가 좋을 것 같았다. 그곳은 쌀농사가 되는 고산 분지로 수천 명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올라가면, 해월이 전에 살던 단양 북쪽 영춘에도 의풍 에 그런 분지가 있다.
선진으로 가던 손병희 호북 군이 보은 관아를 점령해 불을 질렀다. 지난 10월 14일 이두황의 장위영 군이 장내리 대도소에 불을 지른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 과정에 시간을 소모해서 어느덧 저녁 때. 눈발이 많이 날 리기 시작했다.
이종만이 점지한 용해 솔면이는 50-60리나 떨어져 있어 빈속에 눈 속 을 뚫고 밤을 새워서 가기는 무리였다. 이종만은 손병희에게 관아 방화로 시간을 소진해서 너무 늦었고 눈까지 많이 내려 장거리 행군이 무리라고 말했다. 손병희는 근방에서 용산과 비슷한 길지를 찾을 수 없겠느냐고 되 물었다. 이종만은 그에게 삼년산성 북쪽에 북실 분지가 좀 작기는 하지만 야산으로 둘러싸여 고리(環) 모양을 이루고 있어, 남쪽 입구로 적군이 들 어오면 미리 포진하고 있다가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잘못하면 도리 어 후퇴조차 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손병희는 보초를 몇겹 세우면 된다며 북실로 가자고 고집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가운데, 동학군은 북실 분지 내 종곡 등 여러 동네에 흩어져서 식사를 한 후에 화톳불을 피워놓고 담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간 청산에서부터 일본군과 민보군이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동학군이 수가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야간 에 기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동학군이 북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삼년성 남쪽 귀인점貴人店에서 식사를 하고 기다렸다. 자정이 되 자 북실로 접근해 들어가면서 보초를 하나하나 조용히 해치웠다.
기습이 시작되자, 동학군은 화톳불을 피워놓고 쉬고 있다가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빴다.
정토군 병력은 미야케(三宅) 대위가 지도하는 김석중의 민보군 240명에 구와하라(桑原)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40명으로 모두 양총을 들고 있었다. 동학군은 별동대 77명이 양총을 들었을 뿐 거개가 화승총이나 기타 전통 무기 뿐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 화승총에 불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얼핏 보면 정토군이 용산 전투 때처럼 동학군보다 4배 정도 강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번에는 잘 훈련된 일본군이 선두에 섰기 때문에 정토군의 전력 이 6배는 될 것 같았다.
이길 수 없는 전투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밤에 3 천여 병력을 이끌고 어디로 급히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북접 군을 지난 10 월 중순 보은에서 결성했으므로, 본거지 보은으로 돌아와서 일부 귀가도 시키고 게릴라 부대도 결성할 예정이었다. 상의 끝에 지도부는 즉시 용해 솔면이로 이동하고, 이종만 부재 시 호중 군을 지휘한 북부 연대 오일상 대접주가 현지 임국호 대접주와 함께 현장 병력을 지휘해서 전투를 계속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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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눈이 많이 와서 보행이 어렵습니다.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이종만은 해월을 업고 밤 새 지도부를 안내해서 눈길을 걸은 끝에 날이 샐 무렵 용해(龍海,龍華) 분지에 들어섰다. 신흥사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요기를 했다.
정토군이 또 추격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종만은 다시 지도부를 북쪽으로 인도해 어릴 적에 공부하던 화양동 서원으로 갔다. 서원은 폐쇄 되었지만 건물은 그대로 있어 그런대로 한밤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튿날 지도부는 다시 길을 나서 음성 외서촌外西村 되자니(都孱里,보뜰)로 갔다. 음성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십승지지로 이름이 있었다. 손병희가 지난 10월 초 북접 군을 이곳 황산에 집결시킨 것도 그런 지리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일찌감치 그의 누이동생인 해월의 셋째 부인 손씨와 5 살 먹은 어린 아들 동희東曦를 이곳에 피신케 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와 서 보니 금방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동학군은 12월 24일 저녁 되자니(都孱里)에서 동쪽으로 5리쯤 되는 무극 장터를 지나가다가 관군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두세 시간 대소 전투를 벌이며 피해 다니다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해월은 두령들을 불 러놓고 각자 흩어져 피신하라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해월은 그날 밤 일단 그곳에서 15리 떨어진 마르텍 이용구 집으로 간다 고 했다. 마지막으로 처자를 찾아 상봉하고 강원도 방면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해월이 이종만을 불렀다.
“이종만 장군, 그동안 나를 돕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어. 이제 여기서부 터는 각자가 도생圖生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우리가 간대야 늘 다니던 충청도 강원도 산악지대일 것일세.
내 나이 70이 다 되어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네. 장군은 동학 지도부 가 운데서 가장 젊고 공훈도 많고 능력도 출중하니, 앞으로 도를 전하고 나라 를 지키고 민족을 구하는 데 힘써주기 바라네. 그리고 내 딸 윤潤이를 잘 부탁하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내 강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