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된 북한의 고려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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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풍군 지봉면 탄동리에 있는 고려 제5대 경종의 능.
981년(경종 6) 7월 병오일에 나이 26세로 정전(正殿)에서 죽으니
경기 남쪽 산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1096년(숙종 1) 6월 신유일에 경종의 신주를 영릉으로 옮겼다.
능역은 너비 약 140척(尺), 오행(奧行 : 깊이) 약 250척으로 중위에 토류석원(土留石垣)을 둘렀으며 능역은 열석(列石)으로 3단면으로 구별되어 있다.
능의 높이는 12척 2촌(寸), 지름은 36척이다.
병석(屛石)은 12각으로 둘러져 있으며 높이는 2척 6촌이다.
한 변의 길이는 8척4촌이고 각 면석에는 12지신상이 입상으로 동물머리에 홀(笏)을 가진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4구(軀)의 석수(石獸)는 포복형태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석인(石人) 1쌍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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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742A23F556875372F)
2005년 한서대학 장경희 교수가 북한 당국과 교섭하여 현장에서
직접 실축 조사하여 사진으로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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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는 바로 이 경종의 왕비입니다.
뒷산의 숲도 모두 베어져 없고 석물들도 거의 사라져 너무나도 황량한 모습입니다
일명 천추태후(千秋太后).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대종(戴宗:추존왕)이다.
성(姓)은 할머니를 따라 황보씨(皇甫氏)라 칭했다.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다.
경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천추전(千秋殿)에 살았는데,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자주 출입하여 추문이 퍼지자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보냈다.
997년(성종 16) 성종이 죽은 뒤 아들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천추전에서 섭정을 하여 천추태후로 불렸다. 유배되어 있던 김치양을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使)로 삼았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헌정왕후의 아들인 대량원군(大良院君:뒤의 顯宗) 순(詢)을 강제로 출가시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살게 하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죽이려 했다.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정하자 1009년(목종 12) 김치양으로 하여금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역을 도모하게 했으나
서북면도순문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즉위시킴으로써 실패했다.
폐위되어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황주(黃州)로 옮겨졌고, 21년 후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다. 능은 유릉(幽陵)이다.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경종(景宗)의 비로 간택되어 입궐하였다. 입궐한지 얼마 되지않아서 회임을 하였고, 이때 경종은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어 고민거리 였기 때문이다. 회임과 동시에 헌애왕후는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헌숙왕후, 헌의왕후는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헌애왕후가 아들 목종을 낳았고 경종은 기뻐한다.
981년 남편인 경종이 죽자 당시 2살에 불과하던 헌애왕후의 아들 왕송(王訟) 대신 그녀의 오빠인 개령군 왕치(王治, 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출궁,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유교를 국교로 하려던 성종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에게도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였다.
아들이 없던 성종은 자신의 외조카이자 헌정왕후의 아들인 왕송을 개령군에 봉하고 궁궐에 데려다가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김치양과의 스캔들[편집]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치양의 본관은 동주(洞州)이며,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
김치양과 자주 만나던 헌애왕후는 그와 통정하게 되었는데, 성종은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만남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헌애왕후는 자신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김치양을 비밀리에 자주 만났고,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키다가 왕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는 헌정왕후의 사통 사건과 함께 왕실의 권위에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