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민화이야기의 김영재입니다.
우리는 민화행 타임머쉰의 종착역에 닿았습니다. 전통민화, 재현민화, 실용민화를 훑어보았지요.
어떻습니까? 너무 고리타분하다구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통미의식을 담은 그림, 그러면서도 만국공통어로서의 예술언어를 재창조해나가는 그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요새 그림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구요? 당연하지요. 그림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언어와는 다릅니다. 조형언어이지요. 일상언어의 아래에 원초언어가, 위쪽에 초월언어가 자리합니다. 먼저 우리의 일상언어는 명칭언어, 의미언어, 개념언어로 나눕니다. 명칭언어를 십장생이라 합시다. 의미언어는 열 개의 장생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개념언어는 장수와 신선사상의 한국적 시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언어에서 명칭언어 이전에 원초언어가 있습니다. 원초언어란 언어 이전의 언어입니다. 울고 웃는 소리, 비명, 혹은 감탄사 등입니다. 정서적 정감적 언어를 포함합니다. 십장생 그림을 보고 포근한 느낌을 가졌다면 원초언어를 이해한 것입니다.
원초언어 위에 일상언어가 있다 했지요? 명칭 의미 개념언어의 위쪽에 초월언어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언어입니다. 텔레파시 비슷한 언어겠지요? 그러나 미술에서의 초월언어는 문맥이나 기호로 나타납니다.
문맥이란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조형적 논리를 말합니다. 기호는 숫자나 문자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만드는 상징적 도상일 수 있습니다. 이 언어는 하나의 문화권, 언어권에서 통용됩니다. 한국사람이 그린 그림은 한국사람이 이해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만국공통어라고 합니다. 세계사람들이 이해해야한다는 것이죠.
팸플릿 1. 전통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함께 볼까요?
그림1 춘월화조도
春月花鳥圖
선운사 문살1
선운사 문살2
1. 춘월화조도라고 작가 김용철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때는 봄이고, 달 속의 꽃과 새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산과 달 그리고 모란 새 포도 등이 그려졌습니다. 민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란은 부귀, 새 두 마리는 부부금슬, 당초나 포도는 자손이 많음, 그리고 산과 달은 십장생의 장생물일 수도 있지요.
작가는 산사의 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형언어의 탈바꿈을 보게 됩니다.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원형적인 색채와 도상을 통해 작가는 원초언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전통상징을 빌려오되 작가가 재해석한 언어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작가는 이 그림의 소재를 선운사 대웅전 뒤편에 있는 원통전 투각 문살그림을 번안 했다고 합니다. 투각이란 안쪽이 들여다 보이도록 파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절에서 민화의 소재를 얻어왔다니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불교는 민간신앙이나 민중문화를 수용하여 민중과 가까워집니다. 우리에게 불교는 더욱 친근합니다. 원시불교는 알타이 문화, 혹은 신시베리아 문화, 나아가서는 동이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결국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를 부메랑 효과라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김홍철이 이렇게 감동으로 옮기는 절의 민화란 바로 우리의 원형이 아니겠습니까? 김용철은 70년대 비판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80년대에 화합을 상징하는 하트 형의 그림으로 바꾼 후 90년대 국적확인의 그림으로 돌아섭니다. 미숙하고 촌스럽더라도 우리의 모델을 만들자 라는 목표아래 자생적 문화에 접근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고유모델을 세계무대로 가져가 보여줄 생각입니다.
특히 민화의 화려한 색채, 우리 원초문화의 신바람 등을 미술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이면서 바로 세계언어, 혹은 만국공통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화의 소재가 아닌 정신을 빌려 형상화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그림2 십장생도
민화십장생
박이선 십장생 90년 작
박이선 십장생 92년 작
2. 박이선의 십장생도입니다. 십장생도 같지 않다고요? 여늬 십장생도와 다르다면 소재와 형상에서 알아볼 수 있는 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조형언어에서 본다면 일상언어 즉 명칭 의미 개념언어의 위쪽에 초월언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가는 줄곧 십장생을 소재로 다루어오다가 3회전에서 그 소재성을 벗어납니다. 그래서 십장생을 찾을 수 없는 십장생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요? 그것은 언어적인 접근방식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작가가 초기에 십장생의 형태를 빌려와 강렬한 채색으로 번안했다면 그것이 원초언어라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보는 사람에게 그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조형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원초언어는 기본적으로 원색적인 언어체계입니다. 원생적인 감동, 원색적인 전달이 그 바탕입니다. 그림에서 반드시 원색을 쓴다는 의미보다 논리나 비판 이전에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형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 형상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작가의 언어는 초월언어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장생이라는 일상언어를 개념화한 후 단순화합니다. 십장생의 개념은 장수 평안의 염원입니다. 그것을 조형화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수직선과 수평선의 조화로, 돌 나무 구름들의 형태를 기하적 형태로 바꾸는 것은 초월언어를 향한 기호화라 할 수 있습니다.
원초언어나 초월언어는 조형언어의 대등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조형언어가 만국공통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젖먹이의 언어같은 원초언어와 선승의 화두같은 초월언어가 모두 하나의 조형언어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 그림의 세계입니다.
한국의 작가들이 한국의 마음으로 제작한 한국그림이 어떻게 세계언어가 될 수 있을지 다음 그림에서 알아볼까요?
그림3 .첩첩산중
3. 이희중의 작품입니다. 첩첩산중이라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의 산이란 첩첩히 겹쳐 있습니다. 그것을 서구적 원근법이 아니라 평면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모든 산들이 같은 거리에 놓인 것처럼 그려집니다.
꼬부랑 길이나 황토마루같은 느낌의 정감을 담았습니다. 작가는 민화에서 소재를 선택합니다. 처음 보여드렸던 김용철의 소재해석과 비슷합니다. 민화의 형태는 물론이고 정감, 감동 등이 화면에 도입됩니다.
그 다음은 기호화과정이 따릅니다. 박이선은 개념화를 거쳐 기호를 만들었습니다. 이희중은 원초언어에서 바로 기호를 만듭니다. 산에서 접하는 새, 나비, 절 등이 민화의 십장생 모란도 연자도 등이 해설없이 나열됩니다. 그래서 민화의 소재는 객관화합니다. 이윽고는 그 자체가 기호가 됩니다.
그 다음에 하늘과 땅과 인간, 즉 천지인의 사상으로 이 그림은 구조화됩니다. 하늘에 해가 떠있고 산 속에 인간이 온갖 염원과 동경을 담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읽어질 수 있는 설화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은 원초언어와 초월언어를 통합합니다. 즉 정서와 감동의 색면구성과 기호화한 상징언어가 하나의 화면에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조화와 공존의 화면에서 우리는 국제언어화의 강렬한 동기와 의지를 읽습니다. 소재는 객관적으로 선택 해석됩니다. 동양적인 윤곽선이 부드럽게 그려집니다. 그 안에 민화의 한국적인 원색을 누그러뜨린 중간색이 들어갑니다, 외국인들도 먹을 수 있는 김치같은 그림이랄까요?
이 작가는 서구적인 교육에 의한 서구적 방법론이 이미 그 국제언어의 기본틀이라 봅니다. 그 위에 우리의 정감을 얹었을 때 충분히 국제언어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순차적으로 원초언어, 초월언어, 국제언어의 예를 들었지만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소중한 우리의 저력입니다.
맺음
낙관 / 인주 .
우리는 다국적 정보화 사회, 국경 없는 경제전쟁 혹은 문화전쟁의 와중에 서 있습니다. 국적도 국민 국어도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통합되는 시대가 21세기입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민족적 주체성입니다.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세계화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고향을 잃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가다듬고 동양문화와 정신의 원형인 동이정신에서부터 우리의 민화를 재조명합니다.
민화, 마지막 시간이니 결론을 내립시다. 조선의 도화원은 중국 문화를 모방했습니다. 중국문화의 원형은 동이정신과 신화입니다. 동이문화의 하늘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민화입니다. 신선의 땅에서 하늘의 기쁜 소식을 누리다가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염원이 깃든 그림입니다.
하늘의 율법과 이치를 도장 찍듯 새겨 따르는 그림, 하늘민족의 하늘을 향한 어릿광을 담고 있는 그림, 그래서 천인화라 불렀습니다. 하늘민족의 하늘정신을 담고 오늘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만국공통어의 가능성을 이 그림에 담아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의 저력일 것입니다.
결어
동양문명이 탈근대사회의 보편적 사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설문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이 16%, 일본인이 38% 한국인이 90%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21세기의 한국이 세계를 주도하리라는 기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언어로서의 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