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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보지도 못하고...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지 베를린에 남아 있을지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후자 쪽에 마음이 쏠려, 가급적 뭔가 그 실마리라도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운명은 나를 자꾸만 전자 쪽으로 몰고 가는데......
가, 지리멸렬
사람의 일이란 종잡을 수 없다.
더욱이 나 같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에게는 그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변수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적절히 대응할 힘도 여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마디로 ‘지리멸렬’이었다.
*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업하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작업에 제동이 걸려 멈춘 상태로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집으로 옮겨온 이래 벌써 십수 일째 만족할 만한 드로잉 하나 못하고 있는데, 뭔가 모를 미궁에 빠져 작업감각을 잃은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여기 베를린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물론 해 놓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뭔가를 찾으려 안간 힘을 쓰고는 있지만, 어쩐지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하루하루 불안감만 가중되고, 사는 맛도 안 난다.
얼마 전 몸이 안 좋았던 상태에서 많이 회복되어 있는 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내가 해야 될 일의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나저나 내 삶은 왜 이리 고달프기만 한지......
8 . 30
*
오늘 아시아 도서관에 가서 한국 신문을 읽었다.
우리나라 형편이 어려운 모양이다.
허긴,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러시아 경제가 고꾸라져 유럽에도 영향을 미쳐 특히 여기 독일 쪽에 타격이 큰 것 같다. 일본도 그렇고......
그렇게 전 세계가 경제난으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국제 정세가 나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바로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가장 열심히, 그리고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야 할 나이와 시기에 세계 경제가 안 좋다는 것은, 기회 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일 수 있고, 그만큼 내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뜻이고,
베를린에서 아직 제대로 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의 나에겐 시운마저 따라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현상들마저 나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일부터 영어학원에 나가리라던 계획도 돈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8 . 31
‘그래도 나름 그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기는 했구나. 그런데 그걸로 끝난 거구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쳐나가지는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던 거구나. 그게 내 능력이지. 그러니까 하다가 만 거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고...... 근데, 그 상황에서도 ‘영어 회화’를 하려고 했던 것도 놀랍긴 하다. 언젠간 미국에 간다는 뜻을 꺾지 않고 있었다는 건데, 그 문제도 그렇다. 결국 그 10 여년 뒤인 2009 년에 미국에 갔잖은가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게 뭐지? 글쎄, 그래도 그 때는 뭔가 하기는 했는데...... 돈도 좀 만질 수 있었고, 그림도 몇 점 남겼고...... 그렇다고 그걸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나는 미국에 가면, 그저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화가일 뿐이고 뭔가를 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니까. 더구나 두어 달 전에도 미국을 거치기는 했지만, 돈이 없어 어딜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 하다가, 이렇게 물가가 싼 쿠바 같은 나라에 와서야 겨우 기를 펴고 지내고 있는 떠돌이일 뿐이니까......’
*
나는 마치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참으로 할 일조차 없는 사람처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베를린 FU대학에 나와 잔디밭에 앉아 있다.
점심때라 여기 젊은 학생들은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 가고 있다.
그 사이에 9월이 와 있다.
나는 세월이 간만큼의 긴 머리로, 베를린에서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보내고 있는데,
사실 나는 날이 너무 좋아서 날씨에 이끌려 밖에 나온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 하늘은 검은 구름들로 덮여가고 밝고 맑던 9월의 기운이 잿빛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햇볕’이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어떤 나무들은 연노랑 단풍을 내뿜는, 가을 냄새마저 풍기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나왔는데, 마음이 더욱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도 있고......
‘여기도 ‘햇볕’에 대한 말이 나왔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니,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일이다. '햇볕'은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있는 거니까. 다만 내 이해의 폭이, 그걸 이상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어쨌거나, '햇볕'은 마법사 같다.
날마다 비치는 햇볕.
더구나 여기는 열대 기후의 쿠바로, 그 햇볕의 양은 엄청나고 그것도 시간대에 따라 강도의 차이가 매우 큰데,
정말 사람의 피부를 익게 할 것 같은 강렬하고도 살벌한 한낮의 햇볕이 있는 나라니, 굳이 그 강함에 대한 얘기를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특히 어제) 아침부터 햇볕이 희미하다 보니, 이 열대의 나라 쿠바의 카리브 해안에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사람의 기분까지도 쓸쓸하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엷은 구름으로 덮여 있어, 그러면서도 바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여기도 이럴 때가 있네!’ 하고 놀라면서, ‘허긴 한국에도 이런 날은 있는 건데...’ 하다간, ‘독일 같으면, 대부분의 날들이 이런데......’ 하면서 그나마 날씨를 이해하려는 자세로 돌아와 있다.
날씨를 내가 어쩌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그런 것 같다.
‘햇볕의 양’에 따라 사람의 기분이 바뀌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상 같다.
특히 나 같이 ‘날씨 따라 변하는 사람’은,
'조금 긴 팔을 입어야 하나? 아니면 창의 차단막을 내려야 하나......' 하는, 다소 몸을 움츠리는 상황이니,
여기 쿠바에서도 나는 ‘너무 뜨겁다’고 한 편으론 불평을 하면서도, 이런 스산한 날보다는 해가 쨍쨍한 날을 더 좋아했던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만 해도, 환한 아침 나절의 강렬한 햇볕이 테라스에 가득할 때, 방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상쾌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현상은 내가 처음 유럽여행을 하던 중, 독일에서 며칠 머물다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아, 이래서 독일 사람들이 스페인 날씨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뼈져리게 느꼈던 일인데도,
날씨 문제는 곧잘 잊혀지기도 해서 그런지 매번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와 닿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도 따지고 보면, ‘독일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내가 ‘쿠바에 있어서 하는 얘기’인데,
그 당시 독일에선 오죽했으랴?
더구나 암울한 상황에 바짝 긴장한 상태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였으니......’
아, 나도 이들처럼 학생이라면 좋겠다.
부모들의 돈으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학위 받아 돌아가는 학생이라면 좋겠다. 다른 고민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니까.
(물론, 그런 학생들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9월이 오면 뭔가 새롭고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믿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첫날부터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낼 줄도 몰랐다.
내가 왜 살아있는 거지?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달렘도르프(Dahlemdorf)’ 길을 걸어보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오늘 처음 유화를 시작한 안나 부인은 퍽 만족해 하는 모습이다.
왜 아니겠는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내가 이 집에 머물고 있는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마냥 공짜로만 지낼 순 없는 거니까.
그리고 내 방에 들어와 연필로 끄적끄적 작업을 했다.
밤에 요한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그사이 편지가 세 통이나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난 이미 한국으로부터 오는 편지에 큰 기대를 접은지 오래다.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약속을 잘 안 지킨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그들과 어울려 산다.
물론 약속을 안 지킨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때의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했고 어울리려 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까지 배타적이지는 않다.
그래봐야 나만 손해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세상에 무뎌져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난생 처음 내 나라가 아닌 외국이었던 스페인에 살면서, 그 뒤로 멕시코에 살면서, 그리고 가장 그렇지 않을 것 같은(사람들이 철저하게 규율을 지키는 것 같은) 여기 독일에 살고 있으면서 종합적으로 느끼고 체득한 인생 경험의 총체적인 결과물일 수도 있는데,
어디든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결부되어야 관심을 보이고, 그렇지 않은 일에는 무섭도록 냉담해지는 현상에 대한 내 자세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 나는 돈의 위력에 짓눌려, 돈에 대한 경의가 커가고 있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이라거나 ‘교과서적’이라는 뜻과는 결부시키고 싶지도 않다.
그건 어릴적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그저 허울좋은 '말’일 뿐이니까.
그렇게, 어느덧 나는,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돈의 노예가) 돼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당장이라도 돈 있는 사람의 부류에 끼고 싶고,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칭송하고 우러러 볼 마음까지 준비돼 있는 사람이다.
그게 설사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지라도, 이 상황의 나에게 도움과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고마움으로 받아들일 자세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나에게 지금 돈이 많다면, 나는 ‘좋은 사람’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쌍한 사람들도 돕고, 뜻 있는 곳에도 쓸 테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
9월 1일에 나는 이런 복잡하고도 황당한 생각에 잠겨,
마치 내 삶이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으로 하루를 보냈다.
9 . 1
‘그만큼 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뜻인데......’
*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편지 세 통을 한꺼번에 받았다.
아무리 내 상황이 긴박하고 불안하다고 해도, 편지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래, 기뻤다.
어쨌거나 ‘편지’라는 것은 사람들 간의 마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라, 마음 한 구석이나마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읽자마자 나는 빨리 내 마음을 다시 전하고 싶어, 정신없이 답장을 썼고,
우체국에 달려가 부치기까지 한 뒤,
그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늘 오는 '동물원(Zoo) 역' 플랫홈에 와 앉아 있다.
떠나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사람들, 그들을 배웅하거나 마중 나온 사람들... 그 속에, 또 내가 끼어 있다.
‘그런데 누구의 어떤 편지를 받았다는 그 어떤 설명도 없으니, 내가 다 답답하다. ’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다소 쌀쌀해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러는가?
내가 왜 이리 가라앉아 가는 나를 수수방관하고 있는가......
9. 2 저녁
*
맑은 가을 날, 나는 다시 FU 사과나무 밭에 앉아 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오늘 같으면, 여기 베를린도 우리나라 가을 부럽지 않은 날씨다.
어젯밤 일은 생각하기 싫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침을 먹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아시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신문 이틀 치(9.1까지)를 읽고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달렘도르프(Dahlemdorf)’ 쪽으로 걸어와, 지난 번 한 번 같이 식사했던 유학생을 만나 학교 식당에 가서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런데 세대가 달라선지 어쩐지 서먹해서 바로 헤어졌고, 다시 혼자가 되어 사과나무 아래 잔디밭에 와 앉아 있다.
그 집을 나와야 하나? 돈이 있어야 집을 얻지. 그렇다면 그냥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무의미하게 이런 생활을 계속한다는 건 아무 가치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건데, 그러기 전에 덴마크에는 꼭 가보고 싶다.
G를 한 번은 만나고 싶은데, 그것 역시 돈이 없어서 가능하지 않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햇살이 따갑지만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남의 나라 대학 한 귀퉁이에서 시간만 보내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9 . 3
‘흠, 그 즈음에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거야......’
*
하늘도 나에게 베를린을 빨리 떠나라고 하는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이 곳에 남아있을 여력이 없다.
나는 여기서, 이 한 대목의 기록을 내 일기에서 지우기로 했다.
만약 이 일(내 인생을 정리하는)을 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내 역사를 정리한다면서 25 여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삭제’하는 것으로,
이 것도 처음이거니와 앞으로도 이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인데,('지난 역사를 인위적으로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일을 하는 내 철칙이니까.)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게 결코 아닌, ‘베를린’이란 곳에서 더 이상 오갈 데 없던 나를 한동안 거둬주었던 ‘안나 부인’의 고마운 정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사실 나는 일기에 이 일 역시 구체적인 묘사는 자제하는 식으로 기록을 해두긴 했지만, 그 이후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알리거나 밝히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이 일기에서조차 지워진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는 없던 일’이 될 일이긴 하다. 다만 당사자인 ‘안나 부인’이 스스로 타인에게 발설하지만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그 집에서 나오면 갈 곳이 없는데, 그렇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겨우, ‘당분간’이나마 내 한 몸 머물 곳이 해결되는가 싶었는데, 그마저도 파탄이 난 것이다.
그렇게 베를린은 끝까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태세다.
숨이 막힐 것 같아 나는 그 집에서 나와,
한동안은 잊고도 있었던 그 ‘오스트리아 청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걸고, 그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앞으론 그를 찾을 일도 없을 테니까.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세 시 40분 쯤 전에 식당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4시까지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인연이 아닌가 보다.
여기 베를린을 빈 손으로 떠나야 할 입장에서, 그나마 좋은 친구를 하나 건져보고도 싶었는데, 베를린은 나의 그 바람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젠 안녕!
그러고서도 나는 갈 곳이 없어, 결국 '동물원 역' 플랫홈에 와 앉아있다.
9 . 5 저녁
‘근데, 그나저나 내가 그 ‘오스트리아 청년’의 이름도 몰랐나? 왜, 이름 대신 항상 ‘오스트리아 청년’이라고만 했다지? 좌우간 일기 기록엔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는데, 혹시 그 당시의 ‘수첩’에는 이름이라도 남아 있을까? 근데, 지금은 그걸 찾아볼 수도 없는, ‘쿠바’라......
아무튼, 지금 생각해도 슬프네...... 그 청년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친구로 남았을 수도 있는데......’ 하면서 나는 또, ‘사람들은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그걸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거야. 그건 내 생활방식으로 굳게 자리를 잡은 상태라...... 그리고 나에겐 지금도 여전히 ‘찾고는 있지만 만나지 못한’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독일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함부르크의 '서 00씨'의 경우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