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윤창범,신창석
출연: 이미연(명성황후),이진우(고종).유동근(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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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씻어내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본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등 역사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사극. 7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이미연이 명성황후 역을 맡아 당시로는 최고인 회당 700만원선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를 모았으며, 당초 100회로 기획했다가 시청률이 높아 120회로 연장 방영이 결정되자(최종 124회 방영됨), 연장분에 대한 출연을 거절한 이미연 대신 81회부터 최명길이 명성황후의 40대 이후를 연기하였다. (이미연은 당초보다 빠른 80회로 마감하고 극의 연속성을 위해 최명길을 조기 투입함.) 조수미가 부른 주제가 “나 가거든”이 수록된 O.S.T는 30만장이 넘게 팔렸고,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돼 대만 웨이라이TV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주요배역인 명성황후 대원군 고종 등의 의상 300여점을 비롯, 청군 일본군 등 개화기의 의상 1만여점을 제작했으며, 1885~95년 당시의 명동 진고개 거리를 KBS 수원센터 1,500여평 부지에 20억원을 들여서 재현하기도 했다. 120회 방영 동안, 1만 4000여 명의 연기자와 4만 3000여 명의 엑스트라, 9000여명의 스태프 등 6만여 명이 제작에 참여해 총 8600여시간의 방송시간을 기록했다.
계해년 철종 14년인 1863년 12월 8일 경진일.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안동 김씨들의 막기 위해 조성하(조대비의 조카로 승후관의 벼슬에 있었다), 조영하로 궁궐을 엄중히 감시하게 하고 궁중의 어른으로서 국새를 쥐고 영중추부사 정원용, 판중추부사 김홍근, 영의정 김좌근, 좌의정 조두순 등 중신들을 중희당에 소집시켰다. 철종의 후사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못했던 안동 김씨 세력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미 흥선군과 밀약을 맺은 정원용이 왕위의 결정권을 조대비에게 넘긴다. 그러자 조대비도 지체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가 결정을 내리겠소.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조대비의 남편) 왕의 대통을 잇게 하시오." 조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 김좌근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대비의 말은 흥선군 아들 이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왕을 잇게 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어 조대비는 이명복을 익성군에 봉한다는 언문교지를 내린다. 곧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과 김병익이 대왕대비의 교지를 채색된 가마에 싣고 흥선군의 집으로 향하였다. 흥선군의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폐옥처럼 볼품없이 날고 황량한 흥선군의 집을 보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열대열이 도착하자 익성군이 대청에서 내려와 몸을 굽히고 대신들을 맞이했다.
민치상이 앞으로 나가 익성군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고 대왕대비의 교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익성군이 대청 위로 올라가 책상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민치상이 교지를 읽었다. 익성군이 대청 아래로 내려와 네 번 절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올라서자 민치상이 무릎을 꿇고 교지를 전했다. 익성군이 받아보고 책상 위에 올려놓자 대신들이 물러섰다. 잠시 후 익성군이 복건과 푸른 도포에 얇은 비단 흰 띠를 두르고 검고 긴 가죽신을 신고 말이 끄는 교자에 올라 탔다. 소년왕이 탄 보련(?)이 공덕리 구름재에 올라섰다. 백성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연도에 몰려들었다. 행렬은 삼엄했다. 선두에는 근장군사 대호군과 선전관이 행렬을 인도했고, 창검으로 무장한 근장군사 2백여 명이 보련의 앞뒤에서 엄중하게 호위를 하고 있었다. 연도의 백성들 중엔 아녀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노랑 저고리에 호박색의 무명치마를 입은 13세의 한 소녀가 보련 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소년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민자영. 후일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피를 말리는 싸움에서 승리한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의 뒤에서 발을 치고 정사를 좌지우지하다가 마침내 일본인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철의 여인 명성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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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씻어내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본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등 역사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사극. 7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이미연이 명성황후
역을 맡아 당시로는 최고인 회당 700만원선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를 모았으며, 당초 100회로 기획했다가
시청률이 높아 120회로 연장 방영이 결정되자(최종 124회 방영됨), 연장분에 대한 출연을 거절한 이미연
대신 81회부터 최명길이 명성황후의 40대 이후를 연기하였다. (이미연은 당초보다 빠른 80회로 마감하고
극의 연속성을 위해 최명길을 조기 투입함.) 조수미가 부른 주제가 “나 가거든”이 수록된 O.S.T는 30만장이
넘게 팔렸고,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돼 대만 웨이라이TV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주요배역인
명성황후 대원군 고종 등의 의상 300여점을 비롯, 청군 일본군 등 개화기의 의상 1만여점을 제작했으며
, 1885~95년 당시의 명동 진고개 거리를 KBS 수원센터 1,500여평 부지에 20억원을 들여서 재현하기도
했다. 120회 방영 동안, 1만 4000여 명의 연기자와 4만 3000여 명의 엑스트라, 9000여명의 스태프 등
6만여 명이 제작에 참여해 총 8600여시간의 방송시간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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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 철종 14년인 1863년 12월 8일 경진일.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안동 김씨들의 막기 위해
조성하(조대비의 조카로 승후관의 벼슬에 있었다),
조영하로 궁궐을 엄중히 감시하게 하고 궁중의 어른으로서 국새를 쥐고 영중추부사 정원용, 판중추부사 김홍근,
영의정 김좌근, 좌의정 조두순 등 중신들을 중희당에 소집시켰다. 철종의 후사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리 후사를 정해놓지 못했던 안동 김씨 세력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미 흥선군과 밀약을 맺은 정원용이 왕위의 결정권을 조대비에게 넘긴다. 그러자 조대비도 지체없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내가 결정을 내리겠소.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조대비의 남편)
왕의 대통을 잇게 하시오." 조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 김좌근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대비의 말은 흥선군 아들 이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왕을 잇게 하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어 조대비는 이명복을 익성군에 봉한다는 언문교지를 내린다. 곧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과 김병익이 대왕대비의 교지를 채색된 가마에 싣고 흥선군의 집으로 향하였다. 흥선군의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폐옥처럼 볼품없이 날고 황량한 흥선군의 집을 보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열대열이
도착하자 익성군이 대청에서 내려와 몸을 굽히고 대신들을 맞이했다.
민치상이 앞으로 나가 익성군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고 대왕대비의 교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익성군이 대청 위로 올라가 책상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민치상이 교지를 읽었다. 익성군이 대청 아래로
내려와 네 번 절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올라서자 민치상이 무릎을 꿇고 교지를 전했다. 익성군이 받아보고
책상 위에 올려놓자 대신들이 물러섰다. 잠시 후 익성군이 복건과 푸른 도포에 얇은 비단 흰 띠를 두르고 검고
긴 가죽신을 신고 말이 끄는 교자에 올라 탔다. 소년왕이 탄 보련(?)이 공덕리 구름재에 올라섰다. 백성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연도에 몰려들었다. 행렬은 삼엄했다. 선두에는 근장군사 대호군과 선전관이 행렬을
인도했고, 창검으로 무장한 근장군사 2백여 명이 보련의 앞뒤에서 엄중하게 호위를 하고 있었다. 연도의
백성들 중엔 아녀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노랑 저고리에 호박색의 무명치마를 입은 13세의 한 소녀가
보련 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소년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민자영. 후일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피를 말리는 싸움에서 승리한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의 뒤에서 발을
치고 정사를 좌지우지하다가 마침내 일본인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철의 여인 명성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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