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 산95
인물(人物) : 김지대(金之岱)
고려 명종 20년(1190년)출생하여~원종 7년(1266년)졸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로 고려 고종 때의 문신. 초명은 중룡(仲龍). 1217년(고종 4) 3만 명의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冲)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그를 중용하였다. 1218년에는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이민(吏民)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고, 1240년 전라도 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이 진도에 숨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라는 사람을 지대에게 보내 그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지대가 직접 만전을 만나 그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만전이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므로,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원망을 하였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1258년에는 몽고병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자 서북 40여성이 안도하게 되었다. 1260년(원종 1)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党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 鰲山은 지금의 淸道)에 봉하였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네이버 백과참조)
▼ 대구광역시의 조산(祖山)이기도 한 달성군 유가면의 비슬산 용루보전(龍樓寶殿)에서 일조간룡(一條幹龍)이 손방(巽方)으로 사루하전(辭樓下殿)하여 일백여리(一百餘里)를 초초원행(迢迢遠行) 출장행맥(出帳行脈)함에 있어, 절절고기성봉(節節高起星峰)을 이루며 동분서치(東奔西馳) 행룡(行龍)하면서 출장(出帳), 과협(過峽) 무수거(無數去)하고 점점돈기(漸漸頓起)하여 천왕산을 특기(特起)한 후 진방(震方)으로 정간용진(正幹龍進)한 주룡(主龍)이 탁립(卓立) 탐랑성봉(貪狼星峰)인 호암산을 기봉(起峰)하고, 약동굴곡(躍動屈曲)하면서 행도(行度)를 계속하여 첨원수려(尖圓秀旅)한 화악산을 기봉(起峰)후 감방(坎方)으로 급락(急落)하여 질단과협(跌斷過峽)을 형성(形成)하고 특기(特起)하여 청도의 주산(主山)인 남산을 기봉(起峰) 북쪽으로 분지벽맥(分枝劈脈)한 수십조(數十條)의 지맥(枝脈)들을 뻗어 내려 분지(盆地)를 만든 곳에 청도읍을 형성하였고, 남산에서 진방(震方)으로 진출하던 용맥(龍脈)에서 현무봉(玄武峰)을 이루고 이방(離方)으로 분지낙맥(分枝落脈)한 일맥(一脈)에 청도김씨 시조묘가 있다.
▼ 청도김씨 시조묘가 있는 곳을 살펴보니, 묘후(墓後)에서 개장(開帳)한 용맥(龍脈)의 최상부(最上部) 사이 즉 와혈상(窩穴象)에 묘지가 있는데, 묘후(墓後)로 입수(入首)되는 유맥(乳脈)이 보이질 않고 오히려 묘후(墓後)가 요함(凹陷)한 것으로 미루어 진혈(眞穴)을 맺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밑에 있는 재실의 자리는 좋아 보였고, 돌배 나무가 자라고 있는 자리 또한 좋아 보인다.
물은 우수도좌(右水到左)하고, 묘지의 하처(下處)의 용맥(龍脈)이 좌선(左旋)하면서 회포(廻抱)하는 모습이 역역하다. 그러면 이곳에 명당(明堂)은 어디인가. 묘지는 높아서 좌청룡(左靑龍)이 좌선(左旋)하여 회포(廻抱)함은 내당수(內堂水)는 거두어 줄 수 있어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돌배나무도 자리는 좋아 보이나 중정(中正)을 얻지 못함으로 명당(明堂)으로 보기는 어렵다. 재실 또한 돌매나무 보다는 조금 낳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역시 중정(中正)을 얻지 못했음으로 이곳에 진혈(眞穴)즉 명당(明堂)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중정(中正)을 얻은 명당(明堂)은 어디란 말인가~~?
여기서 중정(中正)이란 중심(中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심(重心)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중정(中正)을 중심(中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 중심(中心)은 단순히 한 가운데를 말함이고, 중심(重心)이란 허(虛)와 실(實) 또는 강(强)과 약(弱)의 변화에 따른 중심(重心)이기 때문에 중심(中心)은 불변(不邊)이지만 중심(重心)은 상황에 따라 변화를 한다. 풍수(風水)에서는 허(虛)의 중심(中心)은 쓸모가 없고, 오직 실(實)의 중심(重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점을 망각하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 재실 옆에 부속건물로 지어서 사용하던 곳이 묘후(墓後)에서 분지(分枝)한 용맥(龍脈)의 사이 즉 골짜기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묘의 제절 밑 부분이 사태가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천운(天運)인지 관리하는 분이 거주를 하다가 집을 비운 후에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사태가 나서 쓸려 나간 부분을 보강하고 있는 중.
▼ 참으로 천만 다행한 일...........
▼ 시조묘의 격을 갖춘 듯 한 모습이지만 묘지를 보호하는 보호사(保護砂)가 없다....묘지가 공중에 떠있는 듯한 모습.
▼ 재실 및 관리사 염수당.
▼ 경상북도 기념물 제 119호로 지정되어 있는 염수당 앞의 돌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