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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나침반 19>
마음에 묻는 憐憫연민
겨울은 가고 / 봄이 왔다.
그러나 봄이 / 혼자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이 봄을 잡았느냐 / 봄이 겨울에 묶였느냐.
아지랑이 감긴 가지 끝 / 움돋는 未完미완 의 봄.
서로 뒤섞인 / 애매한 이때가 좋다.
목련 꽃잎 / 뚝뚝 덜어져 버릴.
여흰 봄 難思난사 스럽다.
불확실한 미래에 맞설 / 불안이 일거리다.
새싹 돋을 때 / 푸른 생기 휘돌듯.
불안이 / 사람을 움직인다.
불안이 현실의 / 障壁장벽 이고.
그를 부슬 / 투쟁이 희망이다.
모두들 꿈을 / 이야기 하지만.
실체의 적은 / 불확실한 미래이다.
인간은 苦難고난 과 / 불안을 먹고 자란다.
곧 다가올 봄도 / 지나칠 과거 일 뿐.
모든 것은 / 다가올 미래이고.
없는 과거이다.
時間은 / 제멋대로.
흐르는 것 같지만.
人間事인간사 는 / 그렇지 않다.
쫓기며 살아가야하는 / 몸부림이.
인간의 역사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인식을 분명히 하고 출발하자.
개인의 삶과 직접 관련된 ‘역사’를 파헤쳐보자.
사람들은 ‘역사’ ‘역사’하며 ‘역사’를 내세우면 모두 손을 든다.
그러나 아이러니컬Ironical 한 것은 ‘역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附和來同부화내동 하여 강남 따라간다.
‘역사’는 好事家호사가 들이 지난 사건을 권력지향으로 기록한 것이다.
자기 삶을 위한 유용한 가치로 역사를 도구화 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종이에 찍힌 활자는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버린다.
기득권자와 위정자들은 자기들의 말이 진리라고 대중을 농락해왔다.
우리는 고귀한 인생을 무비판적으로 그들에게 맡겨왔다.
편견과 과학적 사실을 규명 해부하는 사회정의가 성숙하지 않다.
잘못이나 착각은 사회현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또한 상식에 대한 盲從맹종은 명백한 자기태만이고 欺滿기만 이다.
자신의 몸으로 부대끼며 고통을 겪는 체험이 ‘역사’이어야 한다.
그 과정의 고난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이 유일한 ‘主敵주적’ 이다.
인간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고 원스톱으로 설명이 안 된다.
각 개인의 뼈를 깎는 순간순간의 아픔을 刻印각인 한 것이 ‘역사’이다.
‘역사’는 타인이나 사회, 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줄이다.
마라톤은 한발 한발 칼로 足紋족문을 새기는 自虐자학의 극치이다.
사실Fact을 高志고지 곧대로 우직하게 행동Act 한 자취가 ‘역사’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不安·缺如결여’와의 전쟁이 삶이고 ‘역사’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불안해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용맹한 戰士가 된다.
봄을 노래 하지만 나는 봄을 붙잡고 애달게 떤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쓰다 남은 情感을 요리저리 아껴 나눈다.
씨 뿌리고 가꾸면 손질해달라고 한다. 봄은 바쁘다.
길가 민들레는 나를 멈추고, 추운 봄에 온 ‘얼레지’는 가엽다.
텅하니 언덕에 이는 아지랑이 일도 없이 혼자 논다.
熱病열병의 ‘Fun-Camp’ 이끌고 淨域정역의 봄을 점령한다.
봄 머리 해 볕이 / 서로 다투어 온 것 같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 내가 너를 끌었느냐.
온몸에 풋내 띠고 / 넓은 들 차지하여.
애탕쑥 뜯는 나 홀로.
8.5 노인.
眩亂현란 한 슬픔.
이제 사 슬픔이 / 燦爛찬란 하다.
이 봄에 / 형벌처럼.
한 없이 들녘에 / 흔들리고 싶다.
산 너머로 / 저녁 어스름.
가고 있다.
내 그림자도 / 쫓아갔다.
오랜만에 / 내 숨소리 들린다.
비로소 나는 / 나와 대면한다.
아무생각 없다.
피어오르는 / 산등선 물안개.
도망치고 / 따라오고.
그냥 두었다.
풀잎들이 다스리는 / 고요한 산자락에 누었다.
헐렁하고 좋다.
늘 거역할 수 없는 / 무엇인가에 쫓겨.
힘겨웠다.
내속에 內在내재 한 / 두 개의 相反상반 된.
‘零番地영번지’가 있다.
生計생계 라는 / 얄궂은 놀이와.
흙으로 돌아가는 연습이다.
어느 것도 / 버릴 수 없다.
다가올 미래 역시.
지난 과거 / 일수밖에 없다.
서둘 것 없다 / 내버려 두자.
‘永眠영면’ 할 그날은 / 반드시 올 것이니까.
이런 緣由연유 로 걷는 것이다. 걷다 죽을 거다.
잠시라도 세상을 뒤로하고 후미진 곳을 느릿하게 걷는다.
굽이굽이 산길 따라, 발길을 옮길 때마다 만나는 들풀과 나무와 숲.
이제 마음은 숲에 머물러 나를 본다.
모든 것을 접고 또 걷는다.
牧歌的 언덕에서 ‘엔솔러지anthology’에 沒頭몰두하며 혼자서 아름답다.
걷기는 발을 빌려 몸으로 ‘자연과 세상을 읽는 운동이다.
가장 원시적인 문화 읽기이며 앞서가는 모던modern 이다.
걷기는 쓰기위한 워밍업warming_up 이다.
‘일+여행+레저+감성+인식’을 걷기로 완성한다.
몸을 ‘펜대’로 삼아 자연과 모든 것을 땅에 새기고 써내는 것 이다.
글은 몸으로 밀어붙인 존재확인이며 裸心나심의 갤러리gallery 이다.
각본 없이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행위예술이며 思惟사유의 극치이다.
자연의 ‘속 알’을 부둥켜안고 熾烈치열 하게 몸을 던져 同化동화 한다.
몸을 ‘욕망’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熱望열망’으로 消盡소진 한다.
고유한 개별성을 渴望갈망 하고 현재와 미래 두 ‘장르’에 沒入몰입 한다.
‘인생훈련’을 ‘스팔탄spartan’보다 더 모질게 스스로를 담금질 한다.
힘들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마냥 내 자신이 부럽다.
이런 짓을 왜 안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민들레 홀씨처럼 어데 론가 떠돌며 숨겨진 기막힌 곳에 숨어든다.
혼자 무릎 치며 이 기쁨 누가 엿듣고 알까 조아린다.
이렇게 가슴 뛰는 일, 세상에 들킬까 생각하니 유쾌하다.
마음의 짐을 내리고 티 끝만 한 憐憫연민도 자연풍경에 맡겨 논다.
이제 근심걱정 자연에 放棄방기 하고 손을 턴다.
산다는 것은 ‘발끝’에 있다.
걷고 뛰고 발이 달아 문드러져야 세상이 보인다.
호기와 탐험으로 쏘다니며 출근을 ‘지구’로 ‘자연’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事緣사연을 사람을 넘어, 들풀과 흙에 맺는다.
여한 없다. 이대로 좋다. 마음껏 살았다.
이제 老香木노향목은 흙에게 당부한다.
내 ‘잎 새’ 다하여 땅에 사뿐히 지는 날 못 본체 해 다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제 됐다.
모든 것은 욕심 이였다.
꼭 이렇게 살아내고 싶다.
봄의 殘影잔영 / 짧은 그림자 저편.
들녘에 땅거미 내린다.
또 하나의 고향 / 머문 자리.
고향을 남긴다.
먼 옛날 고향집에 스쳤던 / 개구리 소리.
아스라하다.
이때 쯤 되면 / 슬픔으로 가득 찬.
아득히 들려오는 그 소리.
이 나이에도 / 개구리소리 들으려.
철없는 아이들처럼.
초저녁에 / 어슷거리며 논둑을 거닐지.
어제 밤에도.
근심걱정 / 개구리소리에 실려 보냈지.
神仙신선 티 신선한 계곡 가에 걸쳐 앉아 토끼잠을 청한다.
실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검불이 되여 깜박했다.
가난살이 다 버리고 ‘세상없는 어디론가 떠도는 꿈’ 이였다.
바람소리 물소리 나를 깨워, 福運복운 이란 없다고 소곤소곤 댄다.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처럼 나는 딴전을 피였다.
저 멀리 봄은 그대로 너울 인다.
日常에서 逸脫일탈 한 이런 저런 풍경
이때쯤 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외딴 두매 마을의 옥수숫대 김치 움집을 지나 쳤다.
얼마동안 침묵이 흘렀다.
언제 쩍 움집이던가. 다 삭아 흔적만 남았다.
마음 가는 곳이 있어 집 뒤 언덕을 향했다.
산행 때 ‘달래’를 한줌 나에게 건네주던 歇貧헐빈 한 할망구.
혼자 살던 그는 수년전에 집 뒤에 누었다.
그는 ‘터앝’에서 시름하다 이렇게 떠났다.
쑥 뿌리를 단기니 젖먹이의 살결 같은 밑줄기에서 알싸한 봄내···
부드럽고 새하얀 뿌리의 香臭향취를 할망구에게 풍겨주었다.
‘달래’를 건네주던 ‘쭈그렁 덩이’ 손목을 꽉 잡고 주저 않고 싶다.
음산한 봄옷 입은 ‘산 할아비’ 그냥 구슬퍼 글썽인다.
쑥 뿌리를 꽉 싸잡고 온몸을 조아렸다. 할멈의 쑥 향 온종일 같이한다.
언젠가는 지나칠 때 라면을 건네주었다. ‘건 머유?’
‘집에 할머니는 있쑤?’ 왜요 하고 되물었다. ‘글쎄 늘 혼자 길래’···
그는 지금도 궁금해 할까. 산자락 저편으로 봄날이 떠있다.
산속의 긴 겨울도 금이 가니, 틈새로 물이 졸졸 흐른다.
눈이 녹아 없어지듯 이 정경도 이내 슬어 없어질 것들···
이게 웬 일인가.
커피를 내리는데 서재방에서 왁자지껄 여자들 소리가 난다.
황급히 발을 옮기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바랬던 착각 인가.
‘너’라고 하기엔 거북한 ‘그대’~ 아니, ‘그녀’들 소리였다.
옛날 자주 듣던 귀에 익은 그녀들의 ‘山 소리’···
아득한 회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은 또 회상을 한다.
마른 방에 봄이 왔다.
하고 많은 밤을 지새워 무언가 지껄이며 우의를 다지던 ‘그녀’들···
이 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그녀’들을 떠올린다.
어느 때는 깊은 산중에 마주앉아 멍하니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았다.
자정능선 넘으며 비수어린 초생달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지.
길 없는 험악한 산을 헤매며 우리가 제일 멋지다고 氣焰기염을 토했다.
우리는 설날·명절 때도 집을 버리고 자유·해방의 히피로 깔깔댔다.
그들은 그때 20대였으니 지금은 50 안팎 나이 쯤 되었을게다.
한참 멋스러운 나이인 그녀 들의 ‘자화상’이 무척 궁금하다.
이런 옛글이 있다.
<나이 50이 되어 돌아보니 49년이 헛되었다. 五十而知 四十九非>
그들의 예전이 또 나른 나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50대 전후의 여성을 나이 지긋한 ‘여인’ 이라고 부른다.
굳이 말하자면 ‘아주머니’ ‘부인’ ‘주부’라고 불리위지는 계층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듯이 ‘Lady’ 로 받들어 諷刺풍자 한다.
그 Lady를 ‘샤빼롱chaperon’이라 부르고,
크리스털글라스의 신비스런 광채가 교차하는 와인 향을 상상하자···
‘샤빼롱’이란 사교모임에 나갈 때 우아하고 세련된 성장을 갖추어 입고
젊은 숙녀를 대동하여 참석하는 나이 지긋한 교양과 예의 바른 ‘Lady’를 말한다.
50세 전후의 젊은 귀부인이다.
옅은 향 풍기는 미니부채와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손안에 든 망원경과
가냘픈 몸매에 품위 있는 지성이 은은하게 풍기는 여인은 계몽시대와 모던시대의
문예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제 샹그릴라shangrila 살롱에서 담소하는 샤빼롱을 엿보자.
그들은 음악회, 갤러리, 오페라하우스, 살롱 등의 사교모임에 자주 모여 담소하며
고품격의 문화를 즐겼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에 이어 17~18세기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시작으로
이태리 등 점차 전 유럽으로 전파 되었다.
살롱은 단순한 사교장이나 오락장이 아닌 지성의 산실이였으며
계몽사상의 창출과 전파에 상당한 역할을 했고 프랑스 혁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혼의 만남과 문화적 담론을 위해 살롱문화가 역사의 흐름을 형성했고
오늘의 서구문화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서구사람을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무척 편하고 쉽다.
그러나 그 개인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담론하기를 일상화한 극히 사교적·사회적인
인간애를 바탕 한 자연을 사랑하는 훈련된 자유인 이다.
사회 풍파를 이겨내고 초월하며 평화와 안식을 일상으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사회정의와 규범을 잘 지키는 시민들이다. 유럽적 인간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그 폭 넓은 사교성은
그들의 부모와 조상 그리고 이웃과 살롱광장에서 대화와 토론문화로 다져진 문화전통이다.
나는 늘 산에 가면서도 내가 바라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 이었다.
이 모델로 세상을 항해하고 싶은 열망으로 늘 주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小我的소아적 존재방식을 슬프게 여기며 산을 드나들었다.
삶에 있어 어떤 發生史발생사적 필연이 있다면 ‘고매한 여인’들의 상징적
‘플라톤’의 심포지엄이 펼쳐 보여주는 와인 잔을 기울이며 담론을 즐기는
‘아고라Agora’의 ‘佳人才女가인재녀’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재치와 雅趣아취 그리고 세련된 지성과 말씨와 에스프리는
그대로 詩이며 문예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우리의 사정을 생각해본다.
19~20세기 격동기의 조선의 ‘開化百景개화배경’을 통해 그때의 봉건적인
남존여비 풍속을 살펴보면 여인은 짐승에 가까운 삶을 살아야했다.
여인들은 억압과 통곡으로 몸부림치며 노예의 제물로 삶을 마감 했다.
내가 어렸을 때인 70년 전만해도 여인은 죄인처럼 갇혀 살아야했고
갖은 모멸과 비인간적인 수난을 당하는 현장을 똑똑히 보아왔다.
그 여인들은 오로지 여자로 태어난 죄 아닌 죄만으로 살아야했다.
그 누구도 이 殘惡無道잔악무도 한 죄악을 고발하지 않고 외면했다.
‘이규태’ 작, ‘세상의 불샹한 죠션 녀편네’란 책을 다시 펴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포악한 역사를 비통한 마음으로 개탄하며
우리의 주위를 다시 살펴본다.
나의 눈에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받는 ‘현대판 인간의 군상’을 떠올리며
그 인간들이 눈 뜰 날은 언제일까? 한숨지으며 책을 덮었다.
서두에서 지루하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언급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희생물이 안 되려면 그 역사에서 탈출하여
개인의 生의 역사를 만들어 살아야한다
時間밖의 고아로 당당하여야한다. 그 고아는 홀로서기로 자유롭다.
역사의 逆轉역전 즉, 미래에 있을 역사를 개인적이며 선택적으로 현재로 둔갑시켜서
逆發想 利用역발상이용을 하는 辨證法변증법을 말한다.
逆利用 辨證法역이용변증법이다. 이런 학설은 없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 메커니즘을
응용 활용하여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려고 힘써왔다. 흔히들 말하는 理念이념이나
진보 따위가 아니라(그것에 또 인간은 현혹되고 구속당함으로) 자연을 주축으로 한
개인의 취향문화를 펼치는 자유영역의 1인 특허 문화설계를 말한다.
미래를 당겨다 지금에 쓰는 철학이다.
唯物論유물론, 有神論유신론이 아니라 ‘有然論유연론(有 自然論유 자연론)’을 말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有然論유연론, 唯然論유연론 이라는 단어는 없어 너무나 다행스럽다.
학설을 만들어 사는 최초의 재미이다.
미래의 時·空間시·공간의 실체를 당겨올 수는 없지만 미래의 ‘꿈이나 생각과 구상’같은
무형가치의 관념은 얼마든지 현재화하여 이용할 수 있는 인간만의 특권이 있다.
有然論유연론을 무슨 종교나 이념처럼 신봉하고 심취하자는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조립하고 해체하고 굴리고 날리면서 순간순간의 변화를 즐긴다.
자연에 노는 보람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옛 ‘그녀’들이 다시 궁금해졌다.
혹시 병원에 누워있지 않나···
남편과 서로 노려보며 갈등에 지쳐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 자식을 걱정하느라 주름이 몇 개 더 늘었나?
몇 일전 K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건강 하시죠’?
‘요즘 봄이 되니 그 옛날이 너무너무 생각이나요’
‘깐돌이 선생님!! 뵙고 싶은데 미안해요···’
‘선생님만은 돌아가시면 안돼요. 너무 아까워요···’
나는 죽지 않는다!! 죽어서도 살 것이다. ‘그녀’를 다시 볼 것이다.
헛소리 마음껏것 하는 지금이 산 증표인가?
초인종이 울렸다. 젊은 여자이다. ‘국가보훈처’에서 나왔다고한다.
왜냐고 물었다. 집에 전화를 몇 번해도 받지를 않아서 왔다고 한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건강하신가요?’ ‘어데 불편한 것 있으세요?’ 하며 어색해한다.
아하! “저승사자 하수인” 이로구나. 이제 나도 이 지경에 왔구나···
운구차는 갖고 왔나요? 하고, 농을 하려다 실수를 했다.
산에 갔다 오느라 전화를 못 받았네요.
‘어머나!! 큰일 나시려고’ ‘꽃샘추위에 감기 들렴 어쩌시려고···’
‘노인정에나 나가시지요’ 한다.
그리고 사인을 하란다. 죽고 사는것이 사인인 것을 이제 사 알았다.
나는 이럴 때 어찌해야하나? ‘저승사자’ 알바 또 올까 겁난다.
‘알바’ 몰래 내일도 산에나 가야겠다. 119구급차 올까 무섭다.
글 쓰고 난 뒤의 미진한 여백···
서성이다 행주치마 걸치고 부엌에 든다.
이렇게 남은 날을 살 일이다.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린다.
얼마 안있으면 개구리가 기지개를 펴고 나올 것이다.
2012년 3월.
득달 같이 뛰어나가고 싶은 깐돌이: 박상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