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과 벌레
개인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결핵으로 40에 목숨을 잃었지만, 20세기 위대한 천재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신』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간소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직장에도 가지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점점 고립되고 멀어지다가 결국 방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그레고르는 사회와 가족에서 철저히 소외당합니다. 이는 현대인이 겪는 깊은 인간소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족의 기대, 역할과 책임 등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겉모습은 벌레가 되었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인간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줍니다.
우리 인간은 ‘사이에 끼인 존재’ 같습니다. 해야 할 일과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다양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거운 책임과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사이에서, 돈과 양심 사이에서, 탐욕과 베풂 사이에서, 심지어 사람이 될지, 짐승이 될지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며 사는 존재 말입니다. 정말이지 고달픈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가거나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 샤르트르의 말입니다. B는 birth, D는 death, C는 choice. 결국,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무수히 많은 선택이 있고 인간은 그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 둘 사이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언제나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못난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엘리야가 외칩니다.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고 말이지요. 제가 목사이다 보니 이런 말씀을 전하지만, ‘그럼 너는 온전히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저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루하고 못난 모습이지요.
인간의 삶은 이렇듯 언제나 가운데 끼인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직장(일)에서도, 가족에서도, 사람들 속에서도, 신앙생활에서마저도… 결단력 있게 하나를 선택해버리면 좋을 텐데, 우리는 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이쪽을 선택하고 난 후에도 다른 쪽으로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못난 모습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프란츠 카프카의 사후 100주년 기념으로 나온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이라는 책에 나오는 짧은 산문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너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마음의 안정을 잡아채는 것은 무엇이냐?
네 방문의 손잡이를 더듬는 것은 무엇이냐?
거리에서 너를 부르면서도
열린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아아, 네가 방해하고 있는,
네가 그 마음의 안정을 잡아채고 있는,
네가 그 방문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는,
네가 거리에서 부르면서도
그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이다.
▣ 나봇의 포도원
- 역사적 상황
솔로몬 왕국이 남(유다)과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이후, 유다의 르호보암이 이집트 침공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인 세겜을 강화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웁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이 강해지자, 유다의 아사 왕은 시리아의 벤하닷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혼란에 빠지고 암살, 자살, 음모 등으로 왕들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극도의 혼란한 상태가 이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령관인 오므리가 권력투쟁에서 최고 실력자로 부상, 쿠데타로 왕위에 오릅니다.
신명기 사가는 그에게 가혹한 평가를 하지만 그는 대단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앗시리아의 왕들이 북 왕국을 “오므리가의 땅”이라 불렀을 정도로 대단히 명성 있는 왕조를 창설한 것입니다. 그는 유다와 화해하고 왕가 사이의 통혼으로 협력을 더 공고하게 합니다. 요단 동편의 모압 족을 복속하고, 시리아와의 교역 활동을 통해 시리아의 침공을 막았고, 페니키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튼튼히 합니다. 페니키아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으로 우호 관계는 절정에 달하지요. 아울러 무엇보다 사마리아를 건설, 수도로 삼습니다. 사마리아는 언덕의 가파른 경사 때문에 함락이 어려웠고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에 위치해 전략적으로나 무역의 측면에서도 요지였습니다.
- 아합
그 위대한 왕의 아들이 아합입니다. 아합 왕은 남 유다를 비롯한 가나안 지역과 시리아 아람 지역에서 강력한 작은 제국주의 권력을 누립니다. 모압에게 어린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가 생산하는 양털을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성서에 수도 사마리아의 아합 왕궁을 상아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굉장히 화려했다는 것이겠지요. 그것도 모자라 사마리아에서 북쪽으로 38km쯤 떨어진 이스르엘 평원에 별궁을 짓습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땅이 비옥해 온갖 농산물이 생산되고 경치도 뛰어난 곳입니다.
- 나봇의 포도원
아합은 별궁에서 내려다보이는 좋은 땅을 눈에 담습니다. 왕은 별궁을 확장하고 별궁에 옆에 붙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사들여 ‘채소밭’으로 꾸미려 합니다. 원문으로 보면 ‘식물원’ ‘정원’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넉넉하게 쳐주겠다고, 돈이 아니라 땅, 포도원을 원하면 더 기름지고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주겠다는 인심 좋은 제안을 합니다. 나봇은 ‘네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 왕의 요구를 거부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 아합왕의 제안은 불합리하지도 않고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운명이 걸린 두 차례의 전쟁을 큰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속에서 시리아 아람 대군을 맞이해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와 인기도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것은 미쳤거나 바보거나 이지요.
그러나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신19:14) 나봇은 팔 수가 없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포도밭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밭이지만, 대대로 이어져 온 땅입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입니다. 절대로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충돌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왕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왕입니다. 힘으로 포도원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넘겨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앞선 두 차례의 전쟁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힘(하나님)으로 승리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최대한 배려하고 양보해서 좋은 제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지도요. 아무튼, 아합 왕은 나봇이 그를 향해 내뱉은 말 때문에 화가 나고 못마땅해서 궁으로 돌아옵니다. 침대에 누워 음식도 먹지 않고 끙끙 앓기만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아울러 신앙적인 갈등도 있었겠지요.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21:7)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외국인들이 들어와 이스라엘의 직업 군인이 되고 최고 군사 지도자 위치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은 이스라엘식 이름이 아닙니다.(아랍식 작명법) 따라서 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는 매우 성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종교적 색깔이 너무 짙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겠지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페니키아 시돈 왕국의 공주로서 바알 신앙 선교사를 자처하며 북이스라엘로 시집을 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신앙 행동법규들을 끝장낼 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대사회에서 토지를 포함한 국가의 모든 것은 왕의 소유입니다. 심지어 백성들의 생명마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아합 왕의 통치에 번번이 시비를 거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전통을 마침내 무너뜨릴 때라고 여겼을 테지요.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사법 농단을 통해 끔찍한 살인을 하고 토지를 빼앗습니다. 거기에 도시의 장로들과 귀족들이 협력하지요.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봇은 결국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라는 죄목으로 돌에 맞아 목숨을 잃습니다.
▣ 나가는 말
- 생명과 죽음의 대결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가 끊임없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세계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한 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세상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나요? 삶과 죽음의 선택의 순간에 죽임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 위한 기준.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의 순간에 사람이 되기로 선택하는 기준 말입니다.
가난한 농부에 불과한 나봇은 당대에 가장 강력한 왕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포기합니다. 오히려 왕의 눈 밖에 나고 자칫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자초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명령은 수백 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도 그런 믿음을 지키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익만을 좇는 세상입니다. 그냥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후하게 값을 치르겠다 합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신념(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 신념의 세계, 믿음의 세계를 삽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모두가 돈에 굴복하는 세상입니다.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의 소유입니다. 따지고 보면 전부 자기의 것인데, 백번 양보해서 대가를 치르면서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다니요. 그것도 그 핑계가 하나님(신앙) 때문이라니요. 땅은 왕의 것, 내 것인데, 하나님 것이라니요.
- 아합은 누구인가
역사적인 사실은 아합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룬 왕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사가는 그를 매우 우유부단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늘 타인에게 의존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남 탓을 하는 아주 비겁하고 못난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국가에 가뭄과 기근이 들었을 때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왕상18:17) 엘리야의 탓으로 돌립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도륙했을 때에도,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왕상19:1) 문제의 해결을 왕비 이세벨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이 침공해 왔을 때도,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왕상20:4)라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리려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을 때도 승리감에 도취하여,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왕상20:34) 다 잡은 고기를 놓아버리고 맙니다. 그 일로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자,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왕상20:43). 나봇이 포도원 판매를 거부했을 때에도,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21:4)… 보고 있자니 천불이 납니다.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싶습니다. 이러고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라 할 수 있을까요.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이었을까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 국내적인 화합, 종교적 갈등의 문제 등 너무나 많은 문제로 인해 생각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왕이니, 함부로 쉽게 이리저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혹은 그냥 마음 약한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세벨의 꾐으로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기는 것이었을까요? 나봇의 포도원을 이세벨이 어떻게 빼앗을지 몰랐을까요?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요? 보이지 않는 신념, 원칙,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알을 따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합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아합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아합처럼 마음속으로 변명하고 타협하면서 ‘상황이 어쩔 수 없다’라며, 이세벨의 뒤에 숨어서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방의 여인 이세벨이 하는 것이라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합의 비굴한 웃음 속에서 제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변명에 저의 변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성경은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선택하며 사느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흔들리며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 아닐까요. 이리저리 흔들리고 흔들리며, 비바람에 젖고 젖으며 사는 사람, 삶이지만 언젠가 그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길, 사랑으로 피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진정한 용서
창세기 50:15-21
I.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는 사람
오늘은 요셉을 주인공으로 “진정한 승리, 용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저 지난 주일에는 다윗이 용서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망한 이야기라면 오늘은 용서의 기회를 잃지 않고 용서하므로 가정이 살아나고 국가가 살아나는 귀한 역사를 보게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대개 시대적인 상황, 교회적인 상황, 목회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주제를 선정하고 본문을 선택하고 메시지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냥 감동과 메시지를 주셔서 이유를 모르는채 설교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저 지난 주일, 이번 주일 “용서”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는데 왜 제가 용서에 관한 설교를 하는지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특별히“은혜의 영성”을 다루는 삶을 통해서 용서에 관한 묵상이 두번 세번 반복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팬데믹 재난시대 세계적인 대공황을 치료하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 걱정 근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고, 불평 불만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들입니다.
비난할 대상을 찾아서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안이 되어야 되겠다. 내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가야되겠다. 나 혼자만이라도 위기에 파묻혀 살지 않고, 내가 이 시대에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 증명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영국교회가 세속화 되어지고 타락 일로를 걷고 있을 때에 여기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복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혁을 부르짖던 한 성직자가 있습니다. 종교재판에 회부 되어집니다. 재판관이 당신 혼자 이 싸늘한 댐즈강을 끓게 할 수 있겠소? 우리와 함께 협력하십시다. 이때 이 성직자는 그렇게 대답합니다.“나 혼자 댐증강을 끓게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댐즈강 가운데 집어넣었을 때 나 혼자만이라도 그 가운데서 이글이글 끓고 있을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예배의 위기를 맞이하고, 모든 사람들이 재난의 한복판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때에, 나 혼자만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예배지키는 충성의 마음 변치않겠습니다.
오히려 믿음 성장의 기회로, 하나님께서 역사는 기회로 만들어 내겠다고 결단하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의 이름은 참 재미있습니다.
플러스 더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플러스가 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가문 야곱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 가문에 눈을 뜨고보니 어머니가 넷이나 됩니다. 얼마나 헷갈렸을까요. 아마 하나님 나라 있을 때에 요셉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얘야, 이 집안에 네가 내려가야 되겠다. 이 집안은 믿음의 가문이니라.” 그래서 눈을 뜨고 보니까 믿음의 가문에 믿음이 없는 거예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빈대떡에 빈대가 없듯이. 하나님께서 요셉을 불러서 “얘야 이 집안이 복의 근원의 가문이란다. 내려 가거라. 그래서 내려왔는데 복이 없는 겁니다.
칼국수에 칼이 없듯이, 총각김치에 총각이 없듯이 말이에요. 이 가문에 요셉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쩔뻔 했을까요.
이런 가정에서 어린 요셉이 할 수 있는 건 꿈을 꾸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꿈 하나가 요셉을 지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한 종의 세월을 되돌아 보면 무엇이 나를 지켰을까? 때로는 포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인생을 멈추고도 싶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순간들도 퍽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오늘의 나를 지키지 않았나? 하는 고백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꿈은 참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씨앗 하나에 100만 배의 무게를 뚫고 올라오는 힘이 있는 거예요.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꽃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이게 꿈에 신비라고 하는 거지요. 꿈을 꾸고 나면 믿음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자꾸 그 꿈 얘기를 하게 돼요. “하나님, 나 이런 사람이 되고 이렇게 이렇게 세상을 섬
기고 싶어요.”그럼 기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자기 자신의 꿈을 정리하면 그게 확인이 되었집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꿈 얘기를 자꾸하면 그게 전도가 되는 거예요. 선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재난 상황 속에서 믿음이 식지 않는 이상한 힘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는데 내 속에 비전의 꿈이 이글거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겠다고 하는 계획이 지금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II. 재난의 시대 –네가 맡아라!
요셉의 꿈은 너무 유명하죠. 교회 밥 몇 년만 먹어도 몇 번씩이나 듣는 얘기입니다. ①형님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에 절 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양치기 집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곡식과 관계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 곡식 재난과 관계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꿈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꾸는 건 아닙니다. 꾸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그림이 꿈으로 나타났다. 이 꿈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신비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② 해달별이 내 별에 절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굴복하고 살아갑니다. 해와 달과 별에 절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그 세상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게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권력과 세상 환경에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헛된 세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 풍조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정복하고 통치하고 살아가는 사람 이미 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빈둥거리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받았지만 꿈을 꾸었지만 빈둥거리면서 꿈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꿈을 뭐라고 그래요? 개꿈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수 많은 시련과 위기를 겪습니다. 형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배신을 당합니다. 잊지 말아 달라 애원했건만 그를 잊어버리고 역사의 무대 뒤안 길에 팽개쳐두고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린 요셉이 그 수많은 고난과 시련과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엘리야처럼 기적을 행한 적도 없습니다. 요셉은 사도바울처럼 많은 글을 남긴적도 없습니다. 요셉은 베드로처럼 위대한 설교를 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오직 품성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낸 사람이지요.
여러분 지금 이 위기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 믿음이 식지 않고 있다. 내 품성이 더 다듬어지고 있다. 내 마음에 행복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 위기 속에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주신 꿈 내가 버리지 않으면 그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방 왕 바로에게 꿈을 주십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요셉이 바로 왕의 멘토로,세상 재난의 치유자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역사를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미래를 조망하는 모습을 보고 임금이 이 재난 시대, 위기 시대를 누가 맡아서 다스리겠느냐? 네가 맡아라. 요셉의 이름이 애굽말로 사브낫바네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위기시대 네가 맡아라. 역사의 미래를 네가 맡아라. 사브낫바네아가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들어서 쓰시니 양치기 소년이, 감옥에 갇혀있던 어린 청년이, 감옥 바닥 걸레질이나 하던 이 소년이 하루아침에 제사장 가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서서 임금의 인장 반지를 들고 역사를 호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타는 수레 가운데 두 번째 수레를 물려받았습니다. 부유한 자산가가 된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로운 분이신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많으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믿음의 싸움을 했던 요셉 이제는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은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감옥에 갇힌 듯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 새장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꼼짝달싹 알 수 없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까?
누구도 당신을 기억해 주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가는 것 같은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 속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바로 지금이 믿음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
내 믿음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할 때입니다.
기도의 불을 끄지말고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해야 할 때입니다. 할렐루야!
II. 상처를 이겨낸 사람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큰 장점이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 또 다른 고난이 오겠지요. 그러나 고난을 이겨내는 백신이 내 안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시련을 견뎌내는 DNA가 내 속에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느껴지지 않는 인생의 커다란 자산이 내 안에 생겨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기라고 말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기회로 다가옵니다. 너도나도 절망하고 살아가는데 내게 희망, 꿈, 비전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나와 함께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겪은 사람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상처가 남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꿈은 이루었는데 상처가 남아 있으면 선한 역사를 남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선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내가 받은 상처로 누군가를 또 아프게 합니다. 보복하고자 하는 졸장부 기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보상받고 싶은 심리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이 없는 것이지요. 꿈을 이룬 사람의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용서라고 하는 것이지요.
요셉이 형들은 어린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물없는 우물에 묻어버리려고 했습니다.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아버립니다. 어린 요셉은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루으벤 형님, 유다 형님 차례대로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꿈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잊어버리는 능력을 용서하는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그 야속한 형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을까요?
요셉은 보디발 장군 가정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의리를 지켰습니다. 신실함에 배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댓가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꿈이 없었더라면 믿음이 없었더라면 똑바로 살아도 되는게 없네? 하나님 살아있을까?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할까? 하나님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허망한 노래를 부르고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부질없다~ 울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꿈 해석처럼 감옥에서 나간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그토록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 애원했건만 요셉을 잊었더라.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참, 세상만사 야속하지요. 되는게 없습니다. 나는 신실하게 살았는데, 나는 믿음을 지켰는데, 점점더 내 인생은 꼬여만 갑니다. 어려운 수렁에 빠져듭니다. 대게 사람들은 여기서 인생을 포기합니다. 믿음을 내려놓습니다. 주저앉아 버립니다.
바로 이때가 내 믿음, 나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될 때입니다. 예배의 위기가 왔을 때에 나는 예배를 드리는데 혼자 예배를 드리든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배의 불꽃이 타오릅니다. 창고곡간은 비어가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교회를 섬기는 일에 추호도 타협이 없고 게으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그릇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그릇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의 원망과 한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상처를 지워 주셨다는 겁니다. 나는 모든 상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게 용서입니다. forgive = forget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분노가 사라졌습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승리자의 반열에 이미 들어서고 있는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내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나는 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없다. 여러분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오늘이라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니면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얘야, 엄마가 너를 사랑했던 말인데 네가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얘야, 아빠가 너 잘되라고 했던 행동이었는데 너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었겠구나. 아빠 용서해 줄래?” “엄마가 잘못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눈이 이 만큼 커질거예요. 그러면서 “엄마 약 드셨어요. 왜 그래요?” 그럴 겁니다. 그래 신약
먹고 구약 먹었다. 신약에서 구약에서 다 엄마가 잘못했다고 가르쳐 주더구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만 상처 받은 것 아닙니다. 부모도 실망했을 것이고 나한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엄마, 용서해 주세요.” “여보, 미안해요.” 아무리 큰 문제라도 이 한 마디 말이면 모든게 끝나는게 공동체 아닙니까? 가정, 교회, 신앙 공동체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애굽의 7년 대풍년 대부흥 골든타임을 요셉은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실수가 있다면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 잘못이 있다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기회를 잃어버린 아픔이 있다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흥, 골든타임 우리가 잘나서 부흥기를 경험하는 줄 알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우리사회가 급성장할 때에 우리 민족이 탁월해서 이런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지요.
대풍년 대부흥의 기회는 고난의 시기를 잘 준비하고 사회와 소통의 능력을 기르고 교회가 더욱더 신실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았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부터 늦었다는 지금이 이제 새롭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골든타임을 너무나 잘 보냅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 영적준비, 내적준비를 해 나갑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골든타임을 준비하는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잊었다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시련 아픔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냐.
둘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에브라임 - 두 배의 열매라고 짓습니다.
나는 하나님 주신 꿈을 지킨 것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번성케 하셨다. 창성하게 하셨0다. 이게 바로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나의 그릇이 준비 되면, 축복의 그릇이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면 하나님께서 부으십니다. 열 배로 부으십니다. 백 배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독나무는 도끼로 그 나무를 찍으면 독을 풍겨서 찍는 사람과 함께 죽어갑니다. 나무도 죽고 찍는 사람도 죽습니다. 그러나 향나무는 도끼가 나무를 찍으면 나무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을 묻힙니다. 내 속에 독이 남아 있으면 나도 죽고 너도 죽는 겁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인생에 마이너스 인생으로 끝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으면 복음의 향이 있으면 나를 찍는 사람에게도 나는 향기를 나누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이름하여 그리스도인이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7년 대흉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애굽으로 몰려옵니다. 앞에 앉아있는 총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대열에 열명의 형님들이 양식을 구하러 옵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절합니다.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요셉의 꿈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현실 앞에서 전율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이게 역사의 운행자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
회개하지 않은 형들! 변화되지 않는 그 형님들! 믿음의 향상도 품성의 변화도 없는 그 형들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달라진, 신분도 달라졌고 믿음도 달라졌고 품성도 달라진 동생 요셉과의 저토록 극명한 대조를 보십시오.
요셉은 원수 갚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꿈은 형님들의 목을 꺾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세계를 치유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 70인 요셉 가족이 요셉의 품으로 들어옵니다. 애굽 땅 고센으로 이사를 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플러스의 인생입니까?
오늘 본문은 창세기 마지막 50장입니다. 창세기는 창조로 시작됩니다. creation. 50장은 장례식으로 마쳐집니다. coffin 관(무덤)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이름하여 CC의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시작이 있는 것이며 마지막 장례가 있고 죽음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하는 거지요. 시작이 있고 마지막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우리가 이루어내고 끝나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다. 나는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
바로 이게 인생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전반부는 아버지 장례식입니다.
후반부는 아들 요셉의 장례식입니다.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바로 요셉의 용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내 인생 시작과 끝자락 사이에 반드시 이 사건을 나는 이루어 내야 한다는 오늘 본문의 명령이요 오늘 본문의 메시지인 것 입니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상복을 벗기전 형님들이 요셉을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총리가 되신 당신에게 간곡한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에도 형님들에게 앙갚음하지 말고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두려워서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지요. 정히 아버지가 이 유언을 했다고 한다면 요셉을 불러서 할 일이지 형님들에게 할 말은 아닌 게지요.
50장 17절에 이 말을 듣고 요셉이 울었더라.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50:17)
나는 이미 다 잊고 용서했건만, 형님들은 용서를 믿지 못하는구나.
나는 지금 저들을 사랑하건만 저들 가슴 속엔 아직도 미움이 남아있구나.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를 용서하셨건만 다 덮었건만“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오늘도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나는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이 큰 은혜를 받고서도 용서를 받고서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독한 미움과 상처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용서할 수 없는 상황,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기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21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구원론 고백입니다. 나를 통하여 많은 생명을 살리려 하셨나니, 생명의 플러스로 나를 불렀나니 생명의 플러스가 되기 위해서 나를 선택하고 구원하셨나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자, 용서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악한 상황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용서하게 될 때에 영적인 질병, 마음의 병, 우리 삶의 모든 질병을 선으로 건강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항상 불평, 원망, 불만에 사로잡힌 인생을 감사와 찬양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믿음의 사람 긍정에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상처와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이 이웃과 세상을 치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할렐루야!
왜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지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이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십자가인가? 그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자 예수께서 불의한 자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이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그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는 사랑이 많다. 너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그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등,
그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그 재판관을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등,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즉,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 진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한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그 아들은 너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지 벌써 수십년째 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그 아들은 사실 언젠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왜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이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선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이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 훼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때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그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그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내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이 모습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한 걸음 나섭니다.
그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그 고통만큼이나 큰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네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그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저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그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그 양을 잡고, 그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그 양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양을 잡으면서, 그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그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과정을 통하여 이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될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그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그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이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첫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난 어린 아기는 ‘그 유월절양’입니다. ‘그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그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수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느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날 3시,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각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이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그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다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그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저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줄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이 때,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든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그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벽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든 군병이 가까이 그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너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너,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난 내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데요.”
“이리 나와 봐! 이 나쁜 놈.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너 저기 보이지. 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저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그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그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그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진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그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너 대신 그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그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 무서운 죽음에 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할 죄수들입니다.
즉,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 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그 당시의 “왕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왕 게임을 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산, 즉,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두 손을 양 옆으로 편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그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자,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더 큰 고통이 온 몸에 이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못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그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못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즉,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수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다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온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사람의 피가 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된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그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침,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넣고 그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그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잔이 무엇입니까?
이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품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잔, 즉,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그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그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그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한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어서,
그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즉 “그 죄에 대하여 내가 다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 답은 나 때문입니다.
나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다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장 3-10절
“…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감사의 진리
1. 감사는 선택이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감사를 선택하면 실제로 감사가 된다.
다니엘은 그의 삶 속에서 감사의 뜻을 정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감사를 선택하는 것은 능력이다. (예화: 한비야)
2. 감사는 훈련이다 수많은 연단과 아픔을 거치면서 습득되는 것이 감사훈련이다. 자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3. 감사는 능력이다 다니엘은 감사할 조건이 도래하지 않았을 때 미리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니엘은 순종할 뿐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미리 감사했던 감사내용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었다.누가 나에게 감사를 전해 주었는가? 나는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는가?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다.‘현재 나에게 미리 감사할 내용은 무엇이 있는가?’
빅터프랭클이라는 유대계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갈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삶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 이건 의미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빅터프랭클 자기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오슈비츠 수용소에 감금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나랑 동거 동락했던 그 사랑하는 친구가 가스실로 불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내가 불릴지 내일 내 이름이 불릴지 모르는 그런 상황 속에 놓였는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이 빅터프랭클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을 보니,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에도 이미 죽은 목숨이더라는 것입니다.
즉, 이미 절망의 그림자가 얼마나 강하게 엄습했는지 그냥 숨만 쉬고 있을 뿐이지 이미 다 죽은거나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빅터프랭클은 그런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희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깨진 유리조각을 구해
그것을 몰래 감춰 매일 아침마다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니까 상처도 나고 피가 나고 했지만, 그는 그런 일들을 매일 반복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용소에서 절망하며 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환경을 뛰어넘는 몸부림을 치고 나니까 놀라운 게 있었습니다.
독일 나치가 비록 자기의 몸을 수용소에 감금하는 건 할 수 있었지만 독일 나치가 그가 가진 외적인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가는 여기까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희망을 향한 나의 삶에 대한 태도는 빼앗아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는 그 태도를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헤르만 헷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사람들은 보통 어떤 조건이 대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대상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난관 속에서도 그 속에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헤르만 헷세는 재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달이지나면
추석이오지요
미국같으면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생각했던 게 무엇이었습니까?
내게 주신 은혜가 뭐지? 내가 월급이 올랐나? 승진이 됐나? 건강이 좋아졌나? 뭘 감사하라는 거지?
우리는 조건을 생각했습니다. 감사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대상, 행복의 조건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대상과 조건을 뛰어넘어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가려내고 행복을 쟁취해내는 재능, 능력이 너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있느니라” (빌 4:11-13)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헤르만 헷세가 말하는 행복의 대상, 여러 가지 좋은 상황,
좋은 여건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편이나 궁핍에 처하든, 고난에 처하든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라도 거기에서도 감사 제목을 끌어내고 거기에서도 내가 행복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 감사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지 아니하고 이런 이야기가 무슨 허무한 이론에
그치지 아니하고 지난 1년 동안 성도들 가운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낸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 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가 막히게 실낱같은
감사를 뽑아내서 그것을 품고 1년간 지탱해 온 사람들이 주사랑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오늘 감사절이라하면 무슨 이론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삶으로 보여준 두 인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한 인물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 인물은 실제적으로 이 땅을 사는 사람입니다.
먼저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니엘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다니엘은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라는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게 정복을 당했고 나라가 자기를 지켜주지 못하니까
그 어린 청소년 나이에 원수의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다니엘이 그 역사에 함몰되어 그 인생이 하루아침에 비극의 한복판으로
끌려가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씨개명을 비롯해서 엄청난 수모를 겪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단 1:6-7)
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재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쳐진 이름 벨드사살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벨이라는 것은 바벨론 신의 봉사자와 예배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는 이름에서 초라한 이방 잡신을 섬기는 이름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으로 바벨론 왕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그런 불행한 일이 펼쳐졌습니다.
여러분 그 다니엘의 자괴감이 어떠했겠습니까? 안 그래도 청소년기는 생각이 많고 갈등이 많고 반항하는 시기인데 다니엘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을 했겠습니까? 사실 그런 비극이 초래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교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의적입니다. 자기가 한 짓들은 생각 안하고 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렇게 멸망가운데 가도록 내버려 두시냐고, 무능하신거 아닌가, 하나님 없는거 아닌가라는 불평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니엘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6장을 보면, 그는 페르시아 제국에 중앙 총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다시 패권을 잡고 왕조가 바뀌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왕조를 뛰어넘는 인정을 받던 그런 요직을 그가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가 어떻게 그런 진흙탕 속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 같은 인생이 됐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감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담겨져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6장 10절을 한번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 (단6:10)
지금 다니엘에게는 절대 절명의 위기입니다. 다니엘의 정적들이 지금 다니엘이 급부상하는 것을 경계해서 그에게 올가미를 씌웠습니다. 이제 다니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목숨을 부지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배신하지 않고 사자 굴에 가서 죽음을 당하든지 하는 이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는 선택합니다. 하나님을 택합니다. 죽음을 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할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믿음과 절대 감사.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 속의 다니엘을 보면서 감사와 관련해서 참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는 선택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다니엘은 감사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적에게 둘러싸여있습니다. 정적의 올가미에 씌어있습니다. 죽음이 자기를 기다릴지 모르는 위기에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다니엘이 감사를 선택하니까 그게 감사가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한비야씨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 그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분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언젠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참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습니다. 원래 아버지가 유능한 기자출신으로 유복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그 후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대학진학을 못했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명문대학교를 다니는 남학생이 한비야씨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그게 정이 들고 교재를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교재하다 보니 남자친구 집에서 사귀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남자친구 집으로 초정받았다고 합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뛰어나와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비야는 어느 학교 다니니?” 한비야씨는 아무 생각없이 “저는, 아직 학교를 안 다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반갑게 맞아주었던 남자친구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꼭 이런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고졸인 네가 감히 내 아들을?’ 얼마나 그것이 마음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었겠습니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날 이후로 한비야씨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아픔이 넘쳐 마음이 심약한 사람들은 2박 3일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한비야씨가 했던 말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날 그 모욕적인 순간을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는 에너지로 썼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잊혀지지 않는 눈빛을 마음에 그리면서 대학을 가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이 얼마나 상처가 됐으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하겠습니까만은 한비야씨는 그것을 자기를 파괴시키고 자기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흐르지 아니하고 그 상황을 인생을 비상하는 쪽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찰스 스윈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제의 10%는 객관적인 사실인데 나머지 90%는 우리의 반응에 의해 결정이 된다”
한비야씨가 그날 그렇게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한 그것이 보통사람에게는 100%의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사실이 ‘나는 자살해도 될만한 충분한 조건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사실적인 것은 10%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90%는 이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해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객관적으로 너무나 많은 풍요로움 때문에 많아서 감사하는게 아니고 그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내가 감사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단1:8)
이것이 다니엘을 다니엘 되게 했다면 다니엘은 그의 삶 속에서 감사도 뜻을 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감사를 선택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감사는 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57편을 보면, 처음부터 다윗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저절로 감사했습니까? 1-7절까지 얼마나 많은 엎치락 뒷치락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가 원수를 보고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이 되는가 싶으면 또 현실 앞에 함몰이 되고 또 힘을 내는가 싶으면 또 마음이 무너지는 이것을 무려 1-6절까지 계속 반복하고 반복하다가 9절에 가서야 드디어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57:9)
1절서부터 대뜸 감사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훈련입니다. 수많은 연단을 거치고 수많은 아픔을 거치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습득되는 것이 감사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평탄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사훈련학교에 입학시키실 때 그 눈물을 삼키고 감사를 선택하는 능력을 구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아까 읽었던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1)
자족은 배우는 것입니다. 성격이 아닙니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것은 훈련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눈물 나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아픔과 어려움들이 자족을 배우는 도구로 사용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들여다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한다 했는데, 지금 감사할 내용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집에 돌아가셔 가지고 오늘 본문 전후를 가만히 읽어보시면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 그가 상황적으로는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는 미리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뿐만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그가 미리 감사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것은 그 이후부터 사자 굴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 후의 삶에 미리 감사했던 그 수많은 감사내용이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감사가 매일 여러분 삶에 실제 구현되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환경이 너무 답답하고 감사가 나오지 않고 원망과 불평이 나올 상황에 당겨서 감사하시면 오늘 드린 이 감사가 내일의 여러분의 삶에 능력이 될 줄을 믿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성경 한 구절 읽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까 읽어드렸던 그 말씀을 다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있느니라” (빌 4:11-13)
하나님이 그 삶에 개입해서 그런 감사를 선택하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날개 달린 천사를 사용하신 게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를 적용해서 여러분에게 기도제목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메신저였습니까? 두 번째로 여러분은 그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고 계십니까?
꿈은 대가를 요구한다
창 37:12-36
시작하는 말씀
할렐루야!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큰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분, 주일날 교회에 나오실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오셔야 되는가 하면, 교회생활을 통하여 이 교회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믿고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 는 사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 님의 사람들이 교회가 없이 여러분 들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끝까지 잘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 각입니다. 교회라는 영적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이 귀한 축복이 없으 면,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이겨낼 방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좋은 아내와 좋은 남편을 얻 는 것 이상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좋은 교회는 우리의 삶의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뜻은 어 머니는 자식을 낳을 뿐 아니라, 잘 먹이고, 입히고, 양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어머니의 역할은 자식을 교육하고, 훈련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 서,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이 교회가 내 생애에 아름 다운 영적인 내 영혼의 어머니가 되 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마음의 기 도를 드릴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메 시지와 찬양을 통하여 예배를 통하 여, 여러분들을 훈련시키시고, 교육 시키시고, 구걸하는 신앙이 아니라 내 스스로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자립신앙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0.1 새 천년의 미국 사회의 꿈과 희 망은 (목회적 대형)교회의 등장이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이 시대의 흐 름을 정확하게 예측했던 우리시대 최고의 미래 예견 학자인 Peter Druker는 21세기의 미국의 미래는 '목회적 대형교회의 손에 달려있다' 고 갈파했습니다. 한달 전에 그는 Fobes(포브스)지에 '지난 30년 동안 미국사회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회 변화 현상은 목회적 대형교회의 등 장이다'라고 밝히면서, 예를 들어 시카고의 Bill Hybel 목사님이 섬기 는 Willow Creek교회나 남가주의 Rick Warren목사님이 섬기는 Saddleback교회는 300여년의 미국 역사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고, 큰 역할을 하는 교회들인데, 이 교회들 은 오래된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 라, 단 시일 내에 20년 내지 25년의 짧은 시간 내에 300년 미국 역사에 서 가장 큰 목회적 대형교회가 되었 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이야말로 앞으로 21세기를 가꾸어 나아가고 열어가야 할,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참으로 기념비 적인 사건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 다. 목회적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미국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 천년의 인간정신을 결속시 키는데 특별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견되는 것입니다! 저는 대형교회, 큰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교회들 이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잘 감 당해서 주일날 교회 나오는 하나님 의 백성들이 참으로 의식과 기대를 함께 모아서 은혜 받게 하시고, 교 회 나올 때마다, 주일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무장됨으로 말미암아 한 생애를 하 나님의 사람 '요셉'처럼, 요셉이 애 굽의 이민 생활에 정착해서, 영광스 런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의 사역 과 신앙의 표상으로서 영광을 가졌 던 것처럼, 우리들도 동일하게 요셉 의 사건을 통하여, 영혼의 어머니의 역할을 확인하고 돌아갈 수 있는 축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은 '꿈을 꾸는 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창 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 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 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 다. 영적으로 성공하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꿈을 꿨는데도, 그를 죽이겠다고 음 모를 꾸미는, 마귀의 공격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Story를 보시면서, 기억하실 것은 한 사람이 꿈을 가지 고, 그 꿈이 이루어 지고, 한 생애를 펼쳐가는 가운데, 성경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우리에게 예가 되는 것입 니다. 요셉을 하나, 하나 살펴 볼 때, 여러분들의 과거의 생애와 공감 함을 느낄 때가 참 많이 있을 것입 니다. 요셉은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 는 하나님의 인도에 관해서, 참 좋 은 Example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창 37:12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떼를 칠 때에"
이 세겜이란 곳은 목초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겜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34장에 보면, 이 세겜에서, 요셉의 이복누이 '디나'의 성폭행사 건으로 인해서, 그 오빠들이 음모를 꾸며서, 세겜에 있는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 곱이 유목민으로서 할 수 없이, 목 초지에 가서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되기 때문에, 세겜으로 아들들을 보 냈습니다만, 야곱이 근심하게 됐습 니다. 아들들이 세겜에 가서 무사히 잘 있는 지, 또 살육전을 펼쳤는데, 그들이 보복하지는 않겠는가? 하는 마음의 근심 때문에, 요셉을 정찰병 비슷하게 보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그냥 보냈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이 때, '요셉은 콩 볶은 것과 시루떡을 쪄서 형들에게 가져 갔을 것'이라는 이 얘기를 여러 번 군침을 흘리면서 들었습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요 '산 위에서 봄바 람 불어온다, 강가에서 봄바람 불어 온다. 봄바람 살며시 날 찾아와 송 이 송이 꽃송이 맺어주네' 저도, 저 의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이 노 래를 제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습 니다. 혹은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등의 찬송 을 요셉이 아마, 콧노래를 부르면서, 갔을 것입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 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 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 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I. 꿈에는 (마귀)의 (공격)이 있다. 그렇게 야곱의 요청으로, 요셉이 세 겜에 도착해보니 형들이 없었습니 다. 그래서 물어보니까, '세겜'에서 30Km 떨어진 '도단'이라는 곳에 갔 습니다. 그 도단성은 아주 평평한 목초지로서, 그의 형들은 꽤 먼 거 리에서도 '저기 꿈 꾸는 자가 오는 도다'라고 서로 말하고, '그 꿈이 어 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 는 독한 마음을 품고, '잡아 죽이 겠다'는 악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 니다. 요셉의 형들의 마음속에 그 동안 미움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 니다. 이 미움이란 나무는 시기와 질투와 이기심의 물을 먹고 자랐고, 오늘 이와 같이 마귀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드디어 쓰디 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르 우벤(맏형)이 나중에 구출할 마음으 로(창 37:20) '죽이지 말고, 구덩이 에 던지자'고 의견을 내었고, 르우 벤의 숨은 계획을 알지 못하는 형제 들은 그 생각을 따라주었습니다. (아마,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큰 가 중한 죄를 지었는데, <서모 빌하와 통간> 이 때 그의 잘못을 덮고 회 복할 마음이었던 것 같으며, 맏아들 로서 막내를 봐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음) 그러므로, 아주 나 쁜 사람도 없고, 아주 좋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은혜 안 받 으면 꼭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요셉을 구덩이(그 당 시 목동들이 우기에 빗물을 받아 두 고, 나중에 가축에게 먹이는 곳=> 수증기의 증발을 박기 위해 마치 항 아리 같은 형태로 입구는 좁고 밑으 로 내려가면 큰 방 같은 곳으로 입 구를 돌 하나로도 막을 수 있었다) 에 던졌습니다. 그런고로 요셉이 거 기에 던져졌을 때, 얼마나 원통하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었는지 살펴 보 겠습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 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 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 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 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마치 신문 기자가 아주 담담한 어조 로, 감정의 굴절 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처럼 이렇게 나와 있습니 다만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애걸 복걸하며 꿈의 대가를 치뤄야 했습 니다. 어떤 꿈도, 그 꿈이 제대로 이 루어지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꿈에 는 마귀의 공격이 있는 것입니다. 허공만 울리는 컴컴한 동굴 속에 갇 혀서 통곡하면서 '살려달라'고 형들 에게 빌었을 것입니다. 애걸 복걸하 고, 슬피 울면서, 그야 말로 통절한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잔인한 인간성을 다음의 말씀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창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 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 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 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 가는지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동생이 죽 어가는 데 음식이 넘어갈 수 있습니 까? 사랑하는 아내가 아파서 수술 받고, 누워있는 데 음식이 넘어갑니 까? 주위에 어려움 당하며 고통스러 워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입에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데, 여기 서, 이 잔인한 형들은 동생의 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던져서 죽게 만든 후에도 여전히 아버지 야곱이 보낸 음식을 먹으면서 '빵 좀 더 없 니?'하고 묻는 그들의 행동 앞에 우 리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성 타락의 깊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은 그들의 마음 속에 박힌 질투와 미움의 근육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 했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무자비하고, 잔인한 인간성 행위에 대해서,
아모스 6:6에
"대접으로 포 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 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 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표현했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런 종류의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 께서 보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 그네와 같은 우리의 인생 길에 주님 이 허락하시는 꿈을 가지고, 제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런 공격 들을 감당해 낼 만한 힘이 없습니 다. (찬송422장. 나그네와 같은 내가 힘이 부족하오니 전능하신 나의 주 여, 내 손 잡고 가오니 / 불과 구름 기둥으로 갈 길 인도하소서 / 나의 주여 힘과 방패 되소서 / 나의 주여 힘과 방패 되소서) 저는 이런 공 격 당하면 못 살겠어요. 마귀의 공 격 앞에서, 하나님의 힘과 방패로 요셉이 보호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 가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요셉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던가? 아니면, 피기도 전에 요셉이라는 꽃봉오리가 떨어지게 되었나? 많은 사람들이 하 나님이 주신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 도, 누가 공격을 하고, 반대를 당하 면, 의기 소침해져서 자신을 좌절의 구덩이에 던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 니다. 한번 낙심해 버리고, 어려워지 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 니다. 인생의 도단 땅(Dothan)의 구 덩이에서 던져 지고 난 후, 다시 회 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하 여, 하나님께서 급하셔서, 이스마엘 사람들을 통하여, 낙타와 약대 떼를 동원하여 달려오고 계시는 줄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역시 같은 아브라 함의 자손인 요셉을 위기에서 구하 려고 달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 님의 절묘하고도 기가 막힌 Timing 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통하여 한 차원 더 높은 제안을 합니다. 창 37:26-28
"유다가 자기 형제에 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 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 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 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 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 어 올리고 은 이십개에 그를 이스마 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 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형들은 요셉을 죽인 들 유익이 없으 며, 차라리 팔자는 유다의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 들였고, 이의를 제 기할 만한 르우벤은 마침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요셉은 구덩이에서 올 려져서 그 당시 남자 노예의 보통 가격인 은 20에 팔렸습니다. 르우벤 은 돌아와서 기가 막혔습니다. 창 37:30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 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 로 갈까"
너무 슬퍼하는 르우벤의 모습이 나 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9명의 형제들은 지독한 속임수를 짜내었습 니다. 요셉의 채색 옷을 취하여 거 기에다가 숫염소의 피를 칠해 아버 지께 보냈습니다. II. 꿈은 (정직)을 요구한다.
창 37:32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그 결과로 더 못된 저질적인 거짓을 행합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우 리 형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 이라고 말함으로 책임회피를 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야곱은 이 후에, 너무나 슬퍼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위로도 위로 가 안 되었습니다. 사실 못된 자식 들의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었겠습 니까? 여기서 얻는 큰 교훈은 '죄는 더 큰 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따 라서 꿈은 정직을 요구하는 것입니 다. 오늘 요셉의 형들의 한번의 속 임수가 근 20년간 내려가게 되었습 니다. 즉 죄의 속성은 한번만 범하 고 끝이 난다든지, 한가지 죄만 범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 다. 한번의 죄는 그것을 숨기기 위 해서 또 다른 한 가지, 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거짓을 가리기 위해서, 20년 간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겠습니 까? 20년 동안 아버지 야곱은 날마 다 자꾸 확인했을 것이고, 다른 가 족과 친지들도 얼마나 많이 물어 보 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기억할 것은 꿈은 정 직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 로 하면, 우리가 한 번 범죄 하게 되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죄를 특별 히 쉽게 거리낌 없이 계속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 범죄 확대 재생산의 법칙입니다. (저의 원리임) 어떤 한 사람이 살인을 범했다고 했을 때,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서 수 많은 거짓말을 꾸며댑니다. 형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얼마나 이 형들 이 못 되먹었습니까? 그 아비 야곱 이 슬퍼서 죽기 직전에까지 이르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Mechanism입니다.
잠 14: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여기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성실하 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도 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거 짓과 거래하기 시작하면 죄는 분명 히 우리의 삶을 파괴할 것입니다. 한번의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 고, 결국은 그것이 자신을 목 조르 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 들을 넘어뜨리고 괴롭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것은 마치 당 신의 손가락을 감은 실과 같습니다. 실 한 가닥을 끊기가 너무 쉽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한번의 거짓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들 은 '남들도 다하는데... 한다 그리고 그 한번의 거짓말 때문에 벌을 받지 도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리하여 다시 한번 거짓말을 합니다. 마치 손가락에 실 두개를 감은 것과 같습니다. 이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의 속성, 죄의 속성은 한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케 하는 악령의 역사 가 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더 하다가 마침내 당신 손가락은 실 때 문에 너무나 꽉 조여져서 더 이상 손가락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여 러분, 이러한 죄의 패턴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 오! 하나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 고 회개하십시오! 왜 사람들이 거짓 말을 합니까? 그것은 '내가 정직하 게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알겠지?'라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 더 큰 결과가 우리를 얽어 매는 것 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 락하신 꿈을 위하여 정직에 대한 대 가를 지불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꿈은 (슬픔)의 과정도 요구한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 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 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꿈은 슬픔의 과정도 요구한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어려움을 당했던 요셉의 나이가 그 당시에 겨 우 17세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 오! 우리 주위에 17세의 자녀들의 뭘 합니까? 아마 운전면허 따 가지 고, 그저 Drive하고 고등학교 졸업 반의 나이를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이 어린 17세의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노래하면서 도단성에 갔 었고, 그 후 20년간 가족을 볼 수 없는 슬픔을 겪었으며, 형들이 나를 너무나 미워하여 어둠의 구덩이에 던져졌고, 그 구덩이에서 너무나 애 절하게 슬프게 울부짖고 울었는데도 아무도 날 도와 주는 자가 없고 팔 리기만 했다. 나는 먼지가 흩날리는 낙타대열에서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 지 않을까 하고 연신 뒤를 돌아보았 지만 아무도 날 구해주러 오는 이가 없었다.'면서, 너무 너무 슬펐다고 생생하게 증언했을 것입니다. 요셉 은 팔렸고, 참으로 슬펐습니다. 이것 이 꿈에 대한 대가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요셉의 생애 의 끝이 아닌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Not Yet!) 제 꿈의 사역의 핵심은 인생에게 슬 픔이 있어도 아무리 슬퍼도 가장 좋 은 것은 아직 오지않았다는 것을 믿 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가 장 좋은 것은 오지 않았다고 믿습니 다. 제 인생도 끝이 가장 좋을 것입 니다. 정 안되면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
(결론) 1) 꿈은 (주님)의 손(안에) 있을 때 (안전)하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때만 안전하게 지켜집니다. 물건처 럼 팔려서 낙타 등에 실려 애굽에 내려가면서 요셉은 아마도 안전하다 고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요셉은 안전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의 육신의 아버지는 가나안 에 남겨져 있었지만, 그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애굽에 내려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 지상의 아버지의 얼굴은 늘 볼 수 없어도, 그의 천상의 아버지는 늘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여 러분,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안 전한 집이 아니라, 냄새 나는 낙타 등에서 펼쳐 지는 것을 기억하십시 오! 요셉이 낙타 등에서 뭘 생각하 고 있었을까요? 그의 할아버지 이삭 의 얘기가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요? 할아버지의 특권은 손자들에게 깊은 영향력, 따스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Touch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 셉의 할아버지가 순종의 사람, 이삭 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창세기 22장에서 증조 할아버지 아 브라함이 칼을 빼고 죽이려고 할 때 에 순종했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양 을 준비하고, 그 양을 제사로 드리 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축복을 받 아 누렸고, 거기서, 천사를 통한 용 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 기 24장에서 증조 할머니 리브가가 낙타 타고 왔던 것을 기억하고, 낙 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 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요셉에게
"
요셉아, 네가 만일 네 증조 할아버 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 네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게 어떤 일이 발생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네가 어디에 있고, 네 삶 이 얼마나 힘들든지 상관없이 하나 님이 너를 위해 앞길을 예비하실 것 을 너는 발견케 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 었기에 그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었 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 님께서 여전히 그의 삶을 통치하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 27: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 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 다."
아마도 요셉은 이런 은혜도 어쩌면 낙타 등에서 그가 죽을 뻔 했는데 그의 목숨을 살린 르우벤과 구덩이 에서 건져 올린 유다의 제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영감으로 알았을 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반드시 하나 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부 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 다. 우리가 만약 그 순간, 요셉의 형 들에게 왜 요셉을 팔았느냐고 물어 본다면, '그 기분 나쁜 요셉의 꿈을 없애기 위해서!'란 대답을 들었을 것이고, 만약 이스라엘 상인들에게 왜 요셉을 샀느냐고 물어 본다면, ' 애굽에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 들은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주권과 섭리 속에 그들의 범죄도 합 력하여 선을 이루고, 상인들의 이기 심도 결국은 그 형제와 가족을 살리 는 데 도구가 되었습니다. Key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 분의 계획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가면서 노예의 삶과 고통에 대해서 슬퍼하고 실망 했을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그 어 떤 사람도 어려움, 깊은 고난을 겪 지 않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 다. 귀한 신앙 선배인 A. W. Tozer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먼저 깊은 상처를 받게 하시고, 위대하게 쓰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의 깊은 인격의 소유자들 을 한번 보십시오. 그 옆에 가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삶의 향기가 짙 은 분을 보게 됩니다. 반드시 그의 인생에서 고난과 깨어짐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분들입니다.!! 젊은이 사역을 할 때 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고통 받고, 깨진만큼 그 젊은이의 생의 향기가 짙은 것입 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슬픔의 밤의 눈물들 때문에 고통한 사람들 을 통하여, 따뜻한 위로와 감격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을 바꾸어 주 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생각해 보십시 오! 하나님께서 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셨을까요? 계속 가나안에 있으면, 70여명밖에 안 되는 한 웅 큼의 식구를 갖고는 그 포악하고, 잔인한 가나안 사람들의 먹이가 되 든 지, 아니면, 가나안의 음란한 문 화에 동화가 되든 지 둘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갖 주위의 우상으로부터 격리되는 곳을 찾으셨는데, 애굽이 가장 적당했습 니다.
창 43: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석 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하니 애 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 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 당시 애굽 민족은 자만심 강하 고, 독일이나 중국, 일본, 한국처럼 단일 민족화 하여서, 타민족에 배타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센 땅에서 나온 요셉의 보호 아래 자기들만의 소중한 전통 을 지켜가며, 400여년동안 애굽 사 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당당한 민족으로 클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애굽은 당대 최대의 강국이었습니 다. 세계 최대의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으로 피라미드가 이미 여 러 개 건설되고 있었고, 도서관, 대 학들, 예술과 문화의 총 본산이 되 었으니, 거기에서 요셉이 가족들을 잘 보호하고 키워줌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모세와 같은 Leadership과 모세 5경을 저술해낼 정도로 찬란한 문명과, 학문을 힘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슬픔으로 낙 타 등을 타고, 애굽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하 나님께서 요셉과 범사에 함께 하시 매,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아직 좋은 것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일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시 30: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 리로다"
할렐루야! 오늘 이 말씀 그대로 믿 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 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