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유시의
정착과 1920년대의 한국 시문학사
이념적 분화
3. 1920년대 시의 주요 경향과 특징
1) 낭만주의 경향의 시
1920년대 초기 한국시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낭만주의 경향의 시들이었다. 주로 3·1운동 이후 『창조』 • 『폐허』 • 『장미촌』 • 『백조』 등의 동인지에 발표된 시들을 이러한 범주로 묶어 논할 수 있다. 이 시기 한국 문단에는 상징주의 낭만주의 · 퇴폐주의 등의 다양한 문예사조가 혼류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주조를 형성한 것은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⁵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현상과 실재, 현실과 이상 세계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를 바탕으로 한 동경憧憬의 문학으로 설명된다. 낭만주의자들에게 현실은 인습과 허위가 지배하는 악한 세계이며, 이런 현실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는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그들은 현실의 속악함과 불모성을 거부하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태도를 취한다. 시적 상상 속에서 현실에 대비되는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표출하는 것이다.
1920년대 초기 한국시의 기조를 형성한 것은 이러한 낭만적 상상력과 이념이었다. 이 계열의 작품들에서는 낭만적 이분법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시적 자아의 방황하고 갈등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공통적인 주제를 이룬다. 이 시편들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허무와 비탄, 체념, 고뇌, 쓰라린 아픔, 막연한 비애와 애상, 그리움 등은 모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낭만적 자아의 고뇌를 나타내는 정서들이다. 여기에는 참다운 삶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식민지 지식인의 부정적인 현실인식과 울분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실이 어떤 진실도 존재하지 못하는 타락한 공간으로 인식될 때, 낭만적 상상력은 세속적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참된 삶을 꿈꾼다.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그 다른 세계는 악한현실과 대립되는 이상향으로서의 정신적 이데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 감각과 사고로는 포착되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서, 현실의 갈등을 해소하고 참되고 화해로운 삶을 이룩할 수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아- 나는 가다 캄캄한 내 밀실로
나릿한 만수향내 떠도는 내 밀실로 도라가다.
오- 검이여 참삶을 주소서
그것이 만일 이 세상에 엇을 수 없다 하거든
열쇠를 주소서
죽음나라의 열쇠를 주소서
참 ‘삶’의 잇는 곳을 차지랴 하야
명부(冥府)의 순례자 되겠나이다.
-박종화, 「밀실(密室)로 도라가다」 부분
ᄭᅮᆷ속에 잠긴 외로운잠이
현실을을ᄯᅥ난 ‘빗의고개’를넘으랴할 ᄯᅢ
비에문어진 잠의 님업는집은
가엽시 깁히깁히문어지도다
-박영희, 「ᄭᅮᆷ의 나라로」 부분
저녁의 피무든 동굴 속으로
아- 밋업는, 그 동굴 속으로
끗도 모르고
끗도 모르고
나는 걱구러지련다
나는 파뭇치련다
-이상화, 「말세(末世)의 희탄(希嘆)」부분
위에 인용한 시편들에서 ‘밀실’ · ‘죽음’ · ‘명부’ · ‘빛의 고개’와 ‘꿈의 나라’ · ‘동굴’ 등은 모두 낭만적 이분법 속에서 현실을 벗어나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이미지들이다. 이 시기 시편들에서는 이와 유사한 이미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침실’(이상화의 「나의 寢室로」), ‘흑방黑房’(박종화의 「黑房悲曲」), ‘유령의 나라’(박영희의 「幽靈의 나라」)와 ‘병실’(박영희의 「月光으로 짠 病室」), ‘묘장墓場’(홍사용의 「墓場」)등의 시어가 그러한 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서 동경의 대상들은 주로 유폐된 ‘어둠’의 공간이나 ‘잠’과 ‘죽음’의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시적 화자들은 이 어둠과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무너지고’, ‘거꾸러지’거나 ‘파묻히’려는 지향을 보인다. 동경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병적인 퇴행과 죽음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시적 주체들이 파멸과 하강의 몸짓을 보이는 것은 당대 작품들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이것은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절망적 인식이 극단화되어 나타난 역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참다운 삶에 대한 희구와 정열에 비추어 너무나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려는 의식이 오히려 ‘죽음’의 세계를 진정한 가치의 세계로 상정하는 역설을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삶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지향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현실 저편에 존재하는 일종의 환상이며 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적 동경의 태도는 흔히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규정된다. 즉 과거, 유토피아, 무의식과 상상적인 것, 유년 시절과 자연, 꿈과 광기에로의 도피 등은 일체의 책임과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동경에 위장되고 다소는 승화된 형식들이라는 것이다.⁶ 이런 관점에서 고립적인 태도로 퇴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이들의 시세계는 현실도피적인 성향의 발로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작품들이 내포한 또 다른 문제는 절망과 슬픔의 정서를 과장하는 감상적 태도이다. 감상은 진정한 가치에의 추구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번민이나 심적 태세를 쾌락의 질료로 삼는 감정의 타락이다.⁷ 감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에서 불완전하고 모순된 현실에 대한 절망을 관습적으로 되풀이하고, 그 표현 자체에 도취되어 자기위안의 방편으로 삼는다. 이렇게 되면 고통을 초래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참된 가치에 대한 지향은 흐려지고, 오직 절망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심미적 표현만이 부각된다. 당대의 낭만주의 시들이 역사적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상실하고, 고립된 개인의 감정과 포즈만을 형상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감상에의 탐닉은 주관적 감정의 과잉으로 이어져, 작품의 심미적 가치를 훼손하는 요인이 되었다. 현실적 소재와 감정은 예술적 형식 속에서 변용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적 대상이나 정서, 제재에 대한 심리적 거리와 절제의 태도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시종 개인적인 감정에 탐닉한 감상적인 작품들은 양식화의 거리를 통해 심미적 형상을 마련하지 못하고, 넘쳐나는 정서의 직설적 토로와 영탄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이 모색한 자유시 형식도 진정한 내재율을 창조하지 못하고 산만하고 무질서한 리듬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그것은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어감과 율조를 무시한 채 피상적으로 서구시형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초반 한국의 낭만주의 시들은 전대 문학의 관념성과 소박한 계몽주의를 극복하고 문학의 자율성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확립하는 진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실도피적 성향과 감상에 탐닉, 시적 형상의 미비와 무질서한 리듬 등 많은 한계를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당대의 시인들이 투철한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지니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외래 사조를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문학과 삶의 가능성은 역사적 상황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밀착할 때 탐구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주체적 요구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외래 문학과 사조의 피상적인 모방은 실패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삶의 경험과 문학 유산을 창조적으로 게승하지 못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리고 만 것 역시 당대 시인들의 몰주체적 서구지향성이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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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시 이처럼 다양한 문예사조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었던 것은 식민지 현실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서구의 문예사조를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 탓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일본을 통한 수용 과정에서 서구 사조들이 지닌 철학적 이념이나 역사적 근거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자의 처지나 관점, 취향에 따라 나름대로 받아들여 시 창작의 근거로 내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작품들을 일률적으로 서구식 낭만주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은 대체로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어서, 이러한 개념으로 묶어서 논의하는 것이 문학사 기술의 일반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6 아놀드 하우저, 염무웅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근세편』 하, 창작과비평사, 1981, 204쪽.
7 김홍규, 『문학과 역사적 인간』, 창작과비평사, 1980, 243쪽.
(전도현, 고려대 교수)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5. 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