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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실 스크랩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문화비판
김일수 추천 0 조회 48 07.01.23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0.15~1900.8.25)의 문화비판

 

                                               -  안 철 택 (고려대)



                                                                                           Ⅰ. 들어가는 말

   “문화가 한 시대 삶의 총체”라면, 니체는 그가 살던 시대의 문화 전체를 비판한 독설가였다. 심지어 “니체는 1871년 당시 독일 제국의 문화적 상황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모험을 시작하고 있다”고 스턴 J.P. Stern은 말한다. 󰡔비시대적 고찰󰡕의 제2부에서 니체는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역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즉 과거에 대한 지식이 한 사회의 삶을 강화한다는 당대의 문화적 풍토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개별적 인간과 사회,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서로 구별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정신’을 정치적 요소로 인정하지 않고 개별적인 인간이 갖는 문화의 한 측면으로 파악한다.” 기존의 역사를 니체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를 정치보다 문화와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과거에 대한 지식’은 역사로 명명되기도 하고 학문 혹은 인식 일반을 총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학문의 좌장 격인 철학은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니체는 보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문화였는데, 그는 다양한 삶의 현상들이 문화 안에서 미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문화에 대한 니체의 관심은 학문보다 예술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그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다른 해석의 중심에 그의 기독교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로 알려진 그의 기독교 비판은 그 당시 기독교 문화가 보여주는 여러 모습들에 대한 그의 반감의 표시이다. “기독교는 시초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느끼는 구토요, 권태감이었다.”고 진단하는 그는 죄의식, 현세의 부정, 내세의 미화, 허무주의, 도덕적인 가치판단, 절대주의 등 기독교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모습에 완강히 저항하며 그가 살던 시대의 문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러한 니체의 기독교 비판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도덕에 대한 비판이다. 기독교의 도덕은 ’떼거리‘ 우중들의 원한에 사로잡힌 불건강한 도덕이라고 비난한다. 아울러 니체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주의 철학을 비판하는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유일신과 상통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식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하다고 믿는 소크라테스의 이성중심주의가 갖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생각의 가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니체의 “자연”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문화 비판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데, 흔히 생철학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은 본능을 경시하지 않는 ‘몸의 철학’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인간의 인공적인 힘이 들어간 ‘문화’라는 개념의 반대편에 위치한 ‘자연’에 대한 니체의 관심은 우선 인간의 본능에 대한 강조로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철학 이후로 경시된 인간의 본능에 정당한 지위를 되돌려주려는 그의 노력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자연’을 통하여 이를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니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루소식의 자연 예찬은 아니다. 니체의 자연관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니체의 문화비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니체의 문화 비판은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문명으로 대표되는 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이다. 즉 문화 자체를 거부하는 문화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수준 높은 문화는 ‘자연성’까지 포괄하는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는 학문을 통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래서 “예술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과제이며 인생 본래의 형이상학적 행동”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인식을 통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삶에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하는 니체는 인식보다 더 강한, 삶을 원하는 예술을 통하여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Ⅱ. 문화로 세상 읽기  

  “나의 우선적인 관심으로서 ‘사회’ 대신에 문화복합체(말하자면 자신의 부분들을 고려하는 전체)”

  니체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짧은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사회’라는 개념 대신에 그는 ‘문화복합체’라는 개념을 쓴다. 사회라는 외적인 제도들 보다 내적인 삶에 관련되는 문화를 통하여 니체는 세상을 더 잘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부분을 고려하는 전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니체에 의하면 한 사회는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모든 부분들의 유기적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 문화적인 복합체라는 것이다.

  니체는 또한 문화의 진보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다. 인류가 문화의 진보로 여기는 것을 열대지역에서 온대지역으로의 이동 정도로 평가하며, 이 이동을 진보라고 긍정적으로 가치 평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울러 니체는 새로운 통합된 문화를 소망하는 데, 모든 요소들을 녹여서 하나의 통합된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을 ‘문화의 종을 주조하는 일’이라는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문화는 종과 같이 좀 더 조잡하고 저속한 물질로 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 보는 니체는 그래서 신의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의 통찰에 의지하여 이 대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또한 문화와 문명을 구별하여 쓰고 있는데, 위대한 ‘문화의 시간’과 강요된 ‘문명의 시기’로 나누고 있다. “문화의 정점과 문명의 정점은 분리되어 있다. 이 두 개념의 대립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위대한 순간들은 부패의 시간들이다. 도덕적으로 표현하면: 의욕되고 강요된 인간사육(‘문명’)의 시기들은 가장 정신적이고 과감한 존재들에 대해, 그리고 그 시기에 가장 적대하는 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시기들이다.” 니체의 문화 예찬은 볼테르의 문명예찬의 반대편에 서 있는데, 볼테르의 문명을 니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자연 상태는 무섭고 인간은 맹수이며 우리의 문명이란 이런 맹수 본성에 대한 전대미문의 승리이다: - 이렇게 볼테르는 결론지었다. 그는 문명화된 상태의 부드러워짐과 세련됨 및 정신적 환희를 경험한다” 볼테르에 의하여 긍정적으로 여겨진 ‘문명화된 상태의 부드러워짐’도 이에 반하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도 니체는 의의를 제기한다. 비도덕성을 용인하는 문화의 포용력을 둘 다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만에 대한 문화의 긍정성을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만에 비해서 문화를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중세에 대한 르네상스의 우월을. - 이것은 언제나 단 하나 : 즉 용인되고 있는 비도덕성의 거대한 양이다.” 비도덕에 대한 용인이 문화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니체는 문화의 전체 역사와 가장 수준 높은 문화의 징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문화의 전체 역사는 우연과 불확실한 것, 급작스러운 것에 대한 이런 식의 공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달리 말하면 문화란 바로 산정하기, 인과적으로 사유하기, 선수치기를 배우며, 필연성을 믿기를 배우는 것이다. 문화의 진흥과 더불어 악에 굴복하는 (종교 또는 도덕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원시적인 형식, 이러한 ‘악의 정당화’는 인간에게 불필요해진다. (...) 정말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와, 법칙 및 계산 가능성을 믿게 되는 상태는 악과의 전쟁이 권태롭게 의식될 때에 가능하게 된다. - 우연과 불확실한 것, 급작스러운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 기분 좋은 자극으로서 발현될 때에 ..... 가장 수준 높은 문화의 이와 같은 징후에 잠시 머물러보자 - 나는 이것을 강함의 염세주의 Pessimismus der Stärke라고 부른다.“  

  ‘악에 굴복하는 특정한 하나의 형식인 도덕적-종교적 해석’에 니체는 반대한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은 비도덕적인 요소를 열린 자세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가장 수준 높은 문화’는 비도덕적으로 여겨지는 ‘우연과 불확실한 것, 급작스러운 것’까지도 수용하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니체의 긍정과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니체의 시대 비판은 그 당시 문명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다. ‘비시대적 고찰’에 드러나 있듯이 니체의 생각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는 아주 다르며, 소위 말하는 ‘당대의 교양인’들과도 많이 달랐다. 왜냐면 니체는 ‘그의 방식으로’ 세상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문화 비판으로서 독자 비판

  이러한 니체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가 기대한 독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며 제대로 니체를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언젠가 니체는 그가 ‘기대하는 독자’에 관해서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기대하는 독자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차분해야 하고 읽는 데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읽으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교양’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끝으로 그는 마지막 결과물로 새로운 목록들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교육 기관의 미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행한 여섯 차례의 공개 강연의 서론에서 ‘본래 강연들과 관계가 없지만 강연을 듣기 전에 읽어야 할 서론’으로 니체는 독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별히 니체가 독자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그 당시 일반 독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니체가 바라는 독자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우선 니체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시간 절약 또는 시간 낭비라는 척도에 따라 평가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인 ‘조용한 독자’를 원한다. 이런 독자는 “읽으면서 사유하는 법을 아직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이요, “여전히 행간을 읽는 비법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시간에 매여 조급하게 빨리 처리하려는 산업화시대의 일반적인 ‘습속 Habitus’이 책을 읽는 독서행위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쳐, 진정한 독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니체의 “시대정신 비판”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느림의 미학’ 심지어 ‘게으름의 미덕’을 찬양한 그를 떠올려 보면, 동시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현상을 바라 본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 니체는 “자신의 교양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경멸할 정도로 충분한 교양을 갖추기를 바란다” 즉 “자신이 마치 모든 사물의 기준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인의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교양’을 하나의 척도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요청한다. 니체는 동시대인이 지닌 “야만성의 특수성”에 분노하고 있다. 그는

“19세기의 야만인으로서 다른 야만인들보다 두각을 나타내는” 동시대인을 말하면서, 이들을 “교양속물(Bildungsphilister)”이라 칭하였다. “내가 실존한다고 믿고 있는 너희 고독한 개별적 존재들” 그리고 “너희 관조적인 인간들”로 이들을 비꼬았다. 스스로 자기 행위의 진정한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은거와 불신의 동굴에” 기거하는 불쌍한 현대인의 모습을 니체는 비판하고 있다. 남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개별자. 축제의 흥겨움에 일정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조자. 이는 “이성”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서 연유하는 병으로, 인간의 인식을 통한 모든 것만을 믿는 새로운 형태의 “야만”으로 니체는 보고 있다. 지나친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읽을 수 있으며, 그의 ‘자연’에 대한 강조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독서의 결과물로 “새로운 목록들”을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새로운 목록들이란 ‘새롭게 정리된 정신의 도표’로 풀이할 수 있는데, “체계”에 대한 비판을 일삼았던 니체에게 어떤 정형화된 형태의 고정된 생각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인간의 지적 활동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거세다. 이는 절대 진리에 대한 비판, 너무나 진지하여 우스꽝스러운 학문의 엄숙성에 대한 희화화, 삶의 한 면만을 보는 학문의 편협성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삶에서 유리된 앎”의 세계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의 책을 읽고 난 독자는 그에게서 틀에 박힌 지식을 수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이 책을 파괴하고 잊어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의 책은 “스스로 무장하고 (삶이라는) 싸움터에 나간” 독자에게 전해진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한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읽으라’는 니체의 충고를 따라 ‘생각하면서, 행간을’ 읽다 보면, 그가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다르게 읽혀진다. 즉 독자의 조급성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조급증’으로, ‘교양’에 대한 비판은 ‘교양속물들’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목록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라는 주문은 체계화된 지식에 대한 믿음보다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중시하라는 메시지로 읽혀진다. 즉 니체의 독자에 대한 모든 바람은 더 자세히 읽으면 동시대인들에 대한 간접 비판이요, 넓은 의미로 그 시대의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진다.



Ⅳ. 국가 비판

  그 비판의 중심에는 국가가 있다. 니체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문화를 장려하는지를 밝힌다.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장려되는 문화는 올바른 문화가 아니라고 니체는 비판한다. 그래서 니체는 주장한다. “문화의 문제가 올바르게 파악된 적은 거의 없다. 문화의 목표는 한 민족의 최대 행복이거나 그 민족이 지닌 모든 능력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데 있지 않다: 문화는 그러한 발전들이 올바른 균형을 이루는 데서 나타난다. 문화의 목표는 현세의 행복을 넘어선다 :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문화의 목표이다.” 그 당시 문화가 민족이라는 단위와 맺고있는 관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런 관계는 곧 바로 국가 단위로도 나타나는데, 국가가 장려하는 문화, ‘국가 경향에 예속된 문화’를 니체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교양’이라 부르는 것을 장려하는 국가 경향이나 그런 식으로 장려되는 문화, 즉 이런 국가 경향에 예속된 문화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특별한 사정이 있다네. 이 국가 경향은 진정한 독일정신과 여기에서 도출되는 교양, 내가 자네에게 머뭇거리며 서술하고 있는 저 교양과 암암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반목하고 있다네. 이런 국가 경향에 이바지하고 그래서 국가의 대대적인 관심 속에 장려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학교 제도를 외국에서 숭배대상이 되게 하는 그런 교양 정신은 아마 진정한 독일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영역에서 유래하는 것일세. (...)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저 사이비 문화를 위한 향로가 흔들거리네. ‘교양을 갖춘’ 선생과 신문쟁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의 이름, 그의 품위를 부당하게 오용하고 ‘독일적’이라는 단어와 더러운 유희를 벌이고 있네.”

  국가는 교양의 목표나 이상이 될 수 없으며, 야만스런 국가가 “그래, 네가 교양이구나 ! 네가 문화구나!”라고 아첨하는 목소리에 속지 말고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교양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즉 국가 교육이 관직이나 생계수단을 위한 것이라면, 진정한 교양은 이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니체는 보고 있다.

  “젊은이들을 올바른 교양의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면, 자연에 대한 그들의 순진하고 신뢰에 가득 찬, 어느 정도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네. 숲과 바위, 강물과 독수리, 가지가지 꽃들, 나비, 들판과 산비탈이 나름의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그는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이미지와 반사들 속에서, 변화무쌍한 현상들의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이 자연들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해야 하네. 그렇게 하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사물이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자연의 위대한 비유에서 느끼게 되고 동시에 자연의 영원한 불변성과 필연성에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게 되지. 그러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되도록 자연 근처에서, 개인적으로 자연을 대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가 ! 많은 젊은이들은 너무 일찍 다른 진리를 배워야 하네. 마치 사람들이 자연을 자신의 발 아래에 예속시키듯이.”)

  자연과의 순수한 교감 속에서 진정한 교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니체는 이러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형적인 교양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한탄한다. “기형적인  교양인간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 그런데 우리의 학계와 언론계의 이런 기형적인 모습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네.” 학자들이 혹세무민하는 언론풍의 작품에 기웃거리고 이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니체는 이렇게 외친다. “기형적인 교양인간아! 교양을 위해 태어났건만 무교양으로 키워졌구나 ! 기댈 곳이 없는 야만인, 하루 하루의 노예로 순간의 사슬에 묶여 굶주리는구나 - 영원히 굶주리는구나 !” 이런 야만적인 교양인간에서 진정한 교양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니체는 ‘자연으로 돌아감’을, 아니 ‘자연으로 올라감’을 주장한다. “나 역시 ‘자연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이것이 원래는 ‘되돌아감’이 아니라 ‘올라감’이지만 말이다. 즉 보잘것없는 것에서는 피곤해하고 구역질을 느끼기에 큰 과제를 갖고 유희하는 것이 허락된, 햇살처럼 청명하고 두려운 자연과 인간의 자연성으로의 ‘올라감’이지만 말이다.”

  니체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잘못 정의된 자연 개념으로 인해서 바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연은 결코 유약하거나 안전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의 건강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건강한 자연성으로 올라감 Hinaufkommen이 니체가 주장하는 문화비판의 핵심이다.



Ⅴ. 기독교 문화 비판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잘 나타나는 데, 여기서 니체는 기독교를 ‘크나큰 거짓’으로 간주하고 이 거짓과의 싸움을 주장한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 가장 숙명적인 유혹하는 거짓으로, 신성하지 못한 크나큰 거짓으로 간주한다: (...) - 나는 그것과의 싸움을 강요한다. 비소한 사람들의 도덕성이 사물의 척도로: 이것은 문화가 지금까지 보여준 가장 구역질나는 타락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상이 ‘신’으로서 인류의 위에 드리워져 있다!!” 기독교에 대하여 ‘문화가 지금까지 보여준 가장 구역질나는 타락’이라고 말하는 니체의 말에는 아주 감정적인 비난이 섞여져 있다. 이유는 그것이 거짓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의 본능’에 유죄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목은 범죄 중의 범죄이다-삶에 대한 범죄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삶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오로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의 삶에 무관심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독이며 화를 불러온다고 본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니체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뭔가를 꾸며대는 그리고 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 가운데는 언제나 병든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있는 자와,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성”이라는 것을 몹시 미워한다. (...) 이성의 광기는 신적인 것이었으며 의심은 곧 죄였다.”

  그러면 이러한 기독교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니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리-동물-도덕 Heerden-Thier-Moral이 탈자연화한 것이 그리스도교: 절대적인 오해와 자기현혹 하에서 - 민주화는 이 도덕의 좀 더 자연스러우면서 덜 기만적인 형태이다.” 민주화가 ‘억압받는 자, 천한 자, 노예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고 마침내 권력을 획득하는 데 비하여,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자, 평범한 자, 만족하지 않는 자와 병든 자’들이 ‘정치적 상류계급, 예외자와 특권자, 건강한 자와 행복한 자’들에 맞서 싸우는데, 승리하면 ‘평범한 자’가 전면에 나서서 ‘권력자와 건강한 자와 행복한 자’를 설득하여 ‘예외자와 특권자’만 따돌리는 데, 이 때 준거가 되는 것이 “평균적 본성‘이다. 이 평균적 본성이 그리스도교로부터 승인을 받아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데, 이 평균적 본성을 니체는 ’무리본능‘이라고 이름한다. 즉 우둔한 ‘떼거리’ 도덕이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원한에 사로잡혀 만든 도덕의 바탕 위에 기초한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니체는 보고 있다.

  이처럼 원한에 사로잡힌 다수 약자들의 야만적 문화인 기독교라 다른 문화를, 다른 도덕(비도덕)을 용인하지 못하는 불관용성(엥똘레랑스)을 보여준다고 니체는 보고 있다. 왜냐하면 “야만에 비해서 문화를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중세에 대한 르네상스의 우월을. - 이것은 언제나 단 하나: 즉 용인되고 있는 비도덕성의 거대한 양이다.” 비도덕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기독교 문화의 불관용성을 기독교 문화가 가진 근본적인 야만성이라고 니체는 비판한다.

  이러한 니체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도덕에 대한 비판이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판단이 어떤 경로로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졌는지를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 -(...) -이 가치의 전도라는 저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 그 덕분에 지상에서의 삶은 몇 천년 간 새롭고 위험한 자극을 받아왔다: - 그들의 선지자는 ‘부’, ‘무신’, ‘악’, ‘관능’을 하나로 융합해 처음으로 ‘세상’이라는 말을 욕된 단어로 주조했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난함’을 나타내는 말을 ‘성스러움’이나 ‘친구’와 동의어로 사용한 것이 이에 속한다)에 유대 민족의 의의가 있다: 그들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시작된다.”

  그래서 ‘세상’의 세속적인 일을 천시하고 사후세계를 중시한다. 곧 바로 지상의 삶이 의미 없는 일로 여겨지고, 삶의 본능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반자연적인 기독교의 도덕이라고 니체는 보고 있다.

  “반자연적인 도덕, 즉 지금까지 가르쳐지고 경외되고 설교되어온 거의 모든 도덕은 이와는 반대로, 다름 아닌 삶의 본능들에 적대적이다 - 그것은 삶의 본능들에 대한 때로는 은밀한, 때로는 공공연하고도 뻔뻔스러운 매도적 유죄 판결인 것이다. ”신은 마음속을 꿰뚫어본다“라고 말하면서 반자연적 도덕은 삶의 가장 깊은 욕구들과 가장 높은 욕구들을 부정해버리며 신을 삶의 적대자로 만들어버린다 ...... 신이 기뻐하는 성자는 이상적 거세자이다 ...... ‘신의 왕국’이 시작되면 삶은 끝나버린다 ......”

  그래서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심지어 니체는 “삶의 근본 본능과 도덕간의 싸움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지금까지 지상에 있어 왔던 것들 중 가장 큰 비도덕성이기 때문이다.”고 보고 있다. 마침내 니체는 그의 유명한 도덕에 대한 아포리즘을 주장한다. “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즉 현상 자체는 아무런 도덕성을 띠지 않고,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도덕적 해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고 니체는 보았다.



Ⅵ. 이성 중심주의 비판  

  “세계는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세계를 논리화해두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니체는 우리 인간과 논리의 문제를 바라본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포함된 세계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하지만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가능한 ‘삶의 체계’를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파생하는 결과는 늘 현자들의 탄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문제」라는 글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에서든 최고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 삶은 별 가치가 없다고 ......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든 사람들은 그들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를 듣는다 - 회의와 우울 가득한, 삶에 완전히 지쳐버리고 삶에 대한 저항이 가득한 소리를.“

  결국 ‘모든 것은 헛되다’, ‘해 봤자 다 쓸데없는 짓이다’는 허무주의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삶에 지치고, 삶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소리 중심에는 이성에 대한 과도한 맹신이 자리하고 있다. 「철학에서의 이성」이라는 글에서 니체는 오류에 바탕을 둔 이성을 비판한다. 니체는 인간이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신적 존재라는 글의 비논리성을 지적한다. 니체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성 중심중의로 야기된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성범주들에 대한 믿음이 허무주의의 원인이며, - 우리는 세계의 가치를 순전히 날조된 세계와 관계하는 범주들에 의해 측정했었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 하는 것.”이라고 본다. 니체는 이를 다시 ‘생산적 힘을 가지는’ 능동적 허무주의와 ‘공격하지 않는 지친’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눈다. 종교는 이러한 ‘정신력의 하강과 퇴행으로서’ 나타나는 수동적 허무주의 풍토 속에서 ‘원기를 북돋우고, 치료하고, 안정시키고, 마취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니체는 보고 있다.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가 기독교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곳이다.  

  그래서 ‘모든 믿음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 형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은: 모든 믿음이, 모든 참-으로-간주함 Für-wahr-halten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하나의 참된 세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되다고 믿는 생각의 출처도 “우리 안에 있는 관점적 가상 perspektivischer Schein이다.”고 그는 말한다. 참된 세계 즉 진리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이제 세계는 더 이상 가치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가 ? ‘목적’ 개념이나 ‘통일성’ 개념이나 ‘진리’ 개념을 가지고 삶의 총체적 성격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가치함Wertlosigkeit의 느낌이 얻어졌다. (...)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목적’, ‘통일성’, ‘존재’라는 범주를 다시 우리에 의해 끄집어 내진다 - 이제 세계는 무가치하게 보인다 ...”

  니체의 기존 진리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이성 중심주의 비판과 궤를 같이 한다. 니체에게 “진리는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요 “신의 열광적인 광기”이다. 따라서 진리는 고정되어 있는 것도,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지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은 명예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위대한 헛것에 집착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리는 ‘지나가고 변화하며 바뀌어 가는 모든 것을 경멸하고 증오한다: - 지속하는 것 Das Bleibende이 가치 있다는 이런 평가는 어디에서 오는가 ? 여기에서 진리 의지는 명백히 단지 지속하는 것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요구일 뿐이다.’ 니체는 이러한 단순한 진리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만일 변화하지 않고 지속하는 영원한 세계로의 의지가 진리 의지라면 이는 사실 “힘에의 의지”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진리 의지란 이런 거짓된 특성들을 고정-시키는 것 Fest-machen, 참되고-지속적이게-만드는 것 Wahr-Dauerhaft-machen,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Aus-dem- Auge-schaffen이며 이 특성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지거나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창조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특정한 과정에 대해 이름을, 그 이상으로 그 자체로는 종결되지 않는 정복 의지에 이름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으리라는 어떤 것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과정에 있는, 능동적인 규정으로서 진리를 집어넣는 일, 이것은 ‘힘에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가장 잘못된 증명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을 단지 “삶의 기술”이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니체에게 기존의 진리는 단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라는 당당한 비유로 부른 것은, 인식을 가진 동물인 인간이 절망적인 방식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도피처라고 니체는 보고 있다.



Ⅶ. 생성하는 자연

  경직된 도덕을 가진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니체의 시대 비판은 이성 중심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수동적 허무주의 비판, 진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그의 시대 비판은 가능하면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물질만능주의와 모든 것을 더 빨리 하려는 속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나타난다. 니체는 이를 질병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능한 한 많이, 게다가 가능한 한 빨리. 이것은 정신의 질병이자 감정의 큰 질병이 원하는 것이다. 이 질병은 때로는 ‘현대’, 때로는 ‘교양’이라 불리지만, 실은 소모성 질환의 전조이다.”이런 질병이 생긴 이유는 ‘변화와 진보’를 구별하지 못하는 직선적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니체는 보고 있다. 니체는 세계의 움직임이 특정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만일 세계의 운동이 목표가 되는 상태를 가졌더라면, 그 상태는 도달되었어야만 했으리라. 그렇지만 세계운동이 아무런 목표 상태를 갖지 않았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근본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 상태가 필연적이라고 하는 모든 철학 또는 학적 가설(예를 들어 메커니즘)은 이 더할 나위 없는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
  이런 연유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존재자’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자’에 대한 가설이 세계에 대한 비방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니체는 ‘생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      

“1) 생성은 아무런 목표 상태를 갖지 않으며, ‘존재’로 귀착되지 않는다.
2) 생성은 아무런 가상 상태가 아니고; 존재자의 세계가 아마도 가상일 것이다.
3) 생성의 가치는 모든 순간에 동일하다: 생성의 가치의 총계는 동일하게 유지된다: 달리 표현하면: 생성은 가치를 전혀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성을 측정하고, ‘가치’라는 말이 그것과의 연관하에서 의미를 획득하게 될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성’의 중요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다. 인간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화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까지 그 속에 포함되는 자연을 니체는 말한다. “너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많은 어리석음과 서툰 접촉이 있다. 그러나 너희의 정신이 진정 이러한 ‘자연’에 속한다.” 지금까지 온전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정신까지도 많은 어리석음과 서투름을 지니고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잘못이 없고, 순수한 자연이라는 루소의 자연 개념을 비판한다. 루소의 자연 개념은 근본적으로 항상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대한 숭배라고 니체는 말한다. 아울러 시인이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 괴테가 시인에게 원했던 것, 왜 괴테가 스피노자를 경외했었는지를 모르면 자연을 오독하게 된다고 한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인간의 완전성이 덕과 예절을 통해 드러난다고 보는 볼테르가 옹호하는 사회와 문명에 저주를 퍼붓고, 신의 섭리가 선한 자연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이러한 루소의 주장을 니체는 반박한다.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그가 기피했던 문명 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유는 19세기 유럽인은 자신의 본능을 덜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무조건적인 자연성, 달리 말하면 자신의 비도덕성을 시인”하게 되었고, 이런 모습을 혼자서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니체는 본다.    

  본능의 비도덕성을 시인하는 니체의 자연관은 󰡔선악의 저편󰡕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대들은 자연에 따라 살기 원하는가 ? 오 그대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이것은 말의 기만이 아닌가! 그대들은 자연이란 존재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하고, 한없이 냉담하며, 의도와 배려가 없으며, 자비와 공정함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동시에 황량하고 불확실하다.”

  자연의 본 모습을 말하면서 니체는 삶과 자연이 배치되는 스토아주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니체의 자연관은 인간의 신체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잘 드러나는데,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자신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 아울러 니체는 예술적 의미에서도 자연은 결코 참이 아니라고 한다.

  “예술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자연’은 결코 ‘참’이 아니다; 그것은 과장하고 왜곡하며 결함을 남긴다. ‘자연에 따르는 연구’란 예술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복속이고 약함이며 특정 유형의 숙명론이다.”

 

 


Ⅷ. 맺는 말 - 예술을 통한 삶  

  “절대 지식은 염세주의에 이른다: 예술은 이에 대한 치료제다.”라고 니체는 단언한다. 삶과 분리된 학문이 야기하는 잘못된 질병인 염세주의를 치료하는 치료제는 예술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식의 치료제’로서 예술이 발생한다. “예술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인식의 치료제로. 삶은 오로지 예술적인 환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논리적 세계는 자신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논리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 때 이 논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예술적인 세계인식이라고 니체는 본다. 그래서 인식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논리적인 것의 목적은 세계의 ‘비논리적 중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치 도덕이 논리학의 한 방식이듯이. 이렇게 인식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아울러 논리로 설명 불가능한 예술의 직관적인 세계는 ‘환상의 실존’과 ‘착각의 실존’을 인지하고 있다고 본다. “학문이 한계에 이를 때마다 예술로 변화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 즉 이론적 인간은 직관적 세계의 어떤 한 시점에서 환상의 실존, 즉 감성과 오성의 소박한 착각의 실존-여기에서 그는 인과율을 신중하게 사용하고, 또 논리적 메커니즘의 도움으로 착각의 실존에서 해방되었다-을 인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환상과 착각’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고 한다. 창조는 예술의 거대한 과제이다. 창조하는 예술인의 예를 그리스인들에게서 그는 보고 있다. “거대한 과제와 이런 과제 안에서의 예술의 고귀함! 예술은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고 완전히 단독으로 삶을 새롭게 탄생시켜야 한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에게 그리스인들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마도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예술에 의해서 불행까지도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괴테의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괴테에게 있어 시작은 천성에 걸맞게, 그를 완전한 인식으로부터 보호하는 치료제이다 - 비극적인 천성들에 있어 예술은 인식에서 해방시키는 치료제이다.”

  학문에 대한 예술의 우위를 주장하는 니체의 생각 근저에는 ‘개별화된’ 인간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는 그의 시각이 있다. “완전히 개별화된 인간은 너무 미약해, 학문, 개념, 악덕 등의 노예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으로 예술을 보았다. 이러한 예를 고대 그리스의 경우를 들어 그는 설명한다. “고대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은 개인적인 향유를 위한 것이 아니며, 예술의 위치는 고통 속에 있으며, 많은 이를 위로하는 데 있다.” 그래서 독창이 아닌 합창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 정신이 녹아있다고 니체는 본다. ‘개체화’의 위험이 나타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나오기 전의 그리스 예술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에우리피데스 극 이후 진정한 그리스 비극은 사라졌다고 본다.

  ‘개체화’의 지식에 바탕한 문화의 한계를 지적하며 진정한 삶에 다가가는 길은 오직 ‘예술’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 서문인 ‘자기 비판의 시도’에서 “학문을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고, 그러나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했다.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예술을 통하여 ‘다시 자연적인 태도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의 진실성: 이제 오직 예술만이 정직하다. 우리는 그렇게 엄청난  우회로를 통해 다시 자연적인 태도로 회귀한다(그리스인의 경우). 지식으로 문화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거칠게 그는 유럽의 문화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역사적인 것과 자연과학은 중세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했다: 신앙에 대항한 지식. 이제 우리는 지식에 대항하여 예술을 설정한다: 삶으로의 회귀! 인식 욕구의 통제! 예술 본능의 강화!” 지식에 대항하여 예술을 강조하는 니체도 예술에 대한 강조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술 또한 삶의 향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한다.

  “ ‘예술을 위한 예술’ - 이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원리이다. 이것과 함께 잘못된 대립이 사물들로 도입되며, - 실재에 대한 비방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현실에서 분리되면, 현실은 낮추어지고 빈약해지며 비방된다. ‘미를 위한 미’, ‘진리를 위한 진리’, ‘선을 위한 선’ - 이것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악한 눈길의 세 형식이다. - 예술, 인식, 도덕은 수단이다: 이것들 안에 있는 삶의 향상이라는 의도를 인식하는 대신 사람들은 이것들을 삶의 적대물과, ‘신’과 관계시켰다.“

  따라서 인식 욕구의 통제와 예술 본능의 강화는 궁극적으로 삶의 향상을 위한 것이다.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런 예술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형식이 음악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정신의 본질을 음악에서 깨닫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문화를 음악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는지 이해한다.”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특히 아폴론적인 것에 대항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하여 이를 보여주고 있다. 도취에 기반을 둔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꿈에 뿌리를 둔 아폴론적 예술과 거리를 두는 데, 니체는 음악과 조형미술의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과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준다.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왜 음악을 니체가 강조했는지를 알아보자. 니체는 “음악은 무한한 의미화가 가능한 언어이다“고 말하였다. 하나의 고정된 혹은 유한한 소리로 해석되지 않는 음악의 다성적 성격을 말하고 음악을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언어로 니체가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음악은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자극과 자극 상황을 재현”하는 것으로 “언어를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음악에 바탕을 둔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삶의 긍정성’이다. ‘수동적 허무주의’를 달래는 치료제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운명애 Amor Fati의 한 형식이다. 그래서 삶의 유일한 가능성을 니체는 ‘예술 안에서’ 본다.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니체는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음악에 바탕을 둔 예술, 음악과 연관된 문화를 발견하는 것을 ‘우리 시대의 과제’로 여겼으며, 모든 문화들이 어떻게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그의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과제: 모든 진정한 문화의 내적 연관성과 필연성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문화의 방어 수단과 구원 수단. 이러한 것들이 민족의 천재와 갖는 관계. 모든 위대한 예술 세계의 귀결은 하나의 문화이다.”

  결국 니체의 세상 읽기는 그의 독자비판을 통한 동시대인들의 세계관 비판으로, 기독교 문화 비판의 핵인 도덕비판으로, 학문의 중심에 놓인 이성중심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생성하는 자연의 힘을 중시한다. 이 ‘자연의 힘’의 다른 이름은 “삶”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생한 삶을 위해서 니체는 예술을 중시한다. 특히 예술 중 음악을 통하여 그러한 삶의 가능성이 펼쳐진다고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위대한 예술’이 귀결되는 지점은 다시 ‘문화’이다.    

 


참고문헌

1. 1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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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genröte/ Idyllen aus Messina/ Die fröhliche Wissenschaft
- Also sprach Zarathustra I-IV
- Jenseits von Gut und Böse/ Zur Genealogie der Moral.
- Der Fall Wagner / Götzen-Dämmerung/ Der Antichrist. Ecce homo/Dionysos-Dithyramben/Nietzsche contra Wagner.
- Nachgelassene Fragmente 1869-1874.
- Nachgelassene Fragmente 1882-1884.
- Nachgelassene Fragmente 1885-1887
- Nachgelassene Fragmente 1887-1889.

 


2. 2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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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ie Kulturkritik Friedrich Nietzsches

Ahn, Cheol-Taek (Korea Univ.)

  In der vorliegenden Arbeit wird versucht, die Kulturkritik Friedrich Nietzsches zu erhellen. Zu diesem Zweck werden verschiedene Aspekte, z.B. Nietzsches Interesse an der Kultur, Leserkritik als Kulturkritik, Kritik des Christentums und Logizismuskritik untersucht. Als ein Ausweg seiner Kritik ergibt sich auch die Betonung der Kunst. Durch die Kunst, d.h. durch den Umweg über die Kunst, findet er eine Lösung in der Natur, die ein anderer Name für das Leben ist.
  Nietzsche liest die Welt und die Geschichte der Menschheit nicht mit der Optik “Politik”, sondern mit der Optik “Kultur”. Deshalb spielt der Begriff “Kultur” bei ihm eine entscheidende Rolle. Als ein Oberbegriff ist die Kultur in der Betrachtung einer Gesellschaft sehr wichtig, und auch in der Analyse gesellschaftlicher Phänomene ist die Kultur bedeutsam. Den Unterschied zwischen der Kultur und der Zivilisation bemerkt er und legt den Schwerpunkt auf die geistige Kultur. Die negativen Seiten der Zivilisation kritisiert er heftig.
  In seinen öffentlichen Vorträgen “Ü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 erwartet er von den Lesern drei Eigenschaften. Seine Erwartung von den Lesern kann als eine Kulturkritik seiner Zeit verstanden werden. Er erwartet zuerst, daß die Leser ruhig sein müssen und daß sie sich nicht daran gewöhnen, den Wert jedes Dinges nach der Zeitersparnis oder Zeitvergeudung abzuschätzen. Zweitens müssen sie gebildet genug sein, um von ihrer Bildung recht genug, ja verächtlich zu denken. Und drittens dürfen sie nicht fordern, dass am Ende unbedingt Resultate oder Tabellen stehen sollen. Diese drei Eigenschaften, die er von den Lesern erwartet, enthalten die kulturkritischen Elemente seiner Zeit. Er kritisiert den Gedanken “Zeit ist Geld” und er appelliert an die Leser, daß die Bildung allein nicht vollkommen ist, sondern immer eine Selbstreflexion benötigt. Nicht zuletzt betont er, dass man eine Schlussfolgerung nicht braucht.
  Die Kulturkritik Friedrich Nietzsches richtet sich auch an Staat und Volk. Die damalige Beziehung zwischen Staat und Kultur hält er für ungesund. Aber die heftigste Kulturkritik seiner Zeit findet sich in seiner Kritik des Christentums. Er betrachtet das Christentum als eine große Lüge, denn das Christentum verneint das Diesseits und bejaht das Jenseits. Nach der Meinung Nietzsches ist der Kern des Christentums die christliche Moral, die er als ein Ressentiment der Schwachen betrachtet.
  Er kritisiert die Wissenschaft und zwar besonders die Philosophie, denn seit Sokrates sei der Glaube weit verbreitet, daß man nur mit der Vernunft die Welt erfassen könne. Dieser Logizismus birgt die Gefahr, daß man mit der Erkenntnis alles erklären kann. In Bezug auf den Nihilismus kritisiert er die Logik, daß die Welt oder das Leben nur gültig sind, wenn man sie mit der Vernunft erkennt. Seine Kritik am Wahrheitsbegriff basiert auch auf dieser Logoszentrismuskritik. Er meint: “Die Welt erscheint uns logisch, weil wir sie erst logisirt haben.”
  Ein Ausweg aus dieser problematischen Kultur kann die Natur sein, und die Bedeutsamkeit der Natur findet Nietzsche besonders in ihrem “Werden”. Das Werden hat kein Ziel und keinen Wert, denn es fehlt etwas, woran es zu messen wäre. Das Werden ist kein Scheinzustand, sondern die seiende Welt ist ein Schein. Nietzsche kritisiert Rousseaus Definition der Natur. Die so genannte “gute Natur” von Rousseau gebe es nicht, sondern die Natur sei so, wie sie ist. Die Natur übertreibe, verzerre und lasse Lücken. Das sei die wahre Natur.
  Am Ende dieser Arbeit findet sich eine Beschreibung, wie ein Leben, d.h. ein anderer Name der Natur, durch die Kunst möglich sein kann. Nietzsche betrachtet die Kunst als ein Heilmittel gegen den Pessimismus, zu dem das absolute Wissen führt. Wenn man die Grenzen der Logik erkennt, akzeptiert man die Phantasie der Kunst durch das Umschlagen der Wissenschaft in Kunst. In der Kunst spielt die Kreativität, die man bei den alten Griechen sehr oft sieht, eine große Rolle. Besonders in der Musik als einer Art der Kunst entdeckt Nietzsche derartige Eigenschaften. Deshalb meint er, sei “die Aufgabe unserer Zeit: die Kultur zu unserer Musik zu finden.” Und die Konsequenz jeder großen Kunstwelt sei eine Kultur.  


키워드:

니체, 문화비판, 국가비판, 기독교비판, 예술을 통한 삶
Nietzsche, Kulturkritik, Staatskritik, Christentumkritik, das Leben durch die Kunst

․투고: 2004년 1월 12일
․심사: 2004년 2월 20일/27일
․게재확정: 2004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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