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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왕실관련 카페에 올린 글이예요
맨날 여기서 눈팅만 하다가 오늘에야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재미있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프랑수아 1세
'사자의 심장'이라 불리우던 프랑수아 1세는 당시 국왕이었던 사촌인 루이 12세가 안 드 브레타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와 결혼을 시켰다.루이 12세 역시 아내가 사망하고 얼마 안되어 유명한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와 재혼을 했지만
결혼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6주만에 그는 사망하고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가 악명높은 오라버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
그 뒤를 이어 프랑수아 1세가 국왕의 자리게 오르게 된다. 그의 나이 20세.
그는 넓적하고 호방한 얼굴에 보기 드문 장신(무기랑 갑옷을 보면 신장이 190cm 이라고 합니다.)이었고,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대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카를 5세와의 끊임없는 전쟁. 엄청난 비용이 들었던 이탈리아 원정,그가 세운 무수한 성과 화려한 저택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말할 수 없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전쟁포로가 되었을 때도 프랑스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어마어마한 몸값을 치루기 위해 성금을 모았다.
그는 예술을 발전시킨다는 미명하에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 것으로 자기 직분을 정당화 시키는 군주의 원형이 되었다.
프랑수아1세는 두 번이나 결혼했고 아내들에게 베풀지 않았던 애정을 정부들에게 마음껏 베풀었다.
그에게는 3명의 메트레상티트르가 있었다.
프랑수아즈 드 푸아, 안 드 피셀루, 디안 드 푸아티에
(디안 드 푸아티에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프랑수아즈 드 푸아 - 샤토브리앙 백작부인
(사진찾는데 실패했어요~ㅜㅜ)
1505년 11세의 어린 미소녀 프랑수아즈는 미사 때 19세의 젊은 귀족 청년 장 드 라발을 만났다.
장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1년후 그녀는 예쁜 여아를 잉태했다.(헐... 12살이면 완죤 어린인데...) 1508년 그들은 결혼했고,
1515년까지는 별다른 사연이 없는 행복한 잉꼬부부로 지냈다.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수아즈 드 푸아. 즉 샤토브리앙 백작부인의 굉장히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국왕은 그녀의 자색을 한 번 볼 요량으로 블루아 성에 이 젊은 부부를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 장은 왕의 초대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겨 부인에게 자기 영지 그대로 남아 있으라는 명을 내리고는 혼자서 국왕을 알현 했다.
그러나 여성을 유혹하는 재능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그녀가 궁에 제 발로 걸어오도록 기발한 계략을 짰다.
드디어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지성과 우아함이 넘치는 프랑수아즈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순간, 국왕은 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구애작전을 펼쳤고,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국왕은 질투하는 그녀의 남편을 멀리 떼어놓으려고, 장을 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변방으로 내쫓아버렸다.
프랑수아즈는 1518년~1528년 국왕이 가장 총애하는 메트레상티트르가 된다. 그녀는 왕국의 중요한 국가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또한 프랑수아 1세가 영국 왕과 담판을 짓는 국제회견장에도, 클로드 왕비와 함께 나란히 나갔다.
그러나 1528년에 그녀는 안 드 피셀루 라는 금발 미녀에게 국왕의 애첩자리를 넘겨 주게 된다.
왕의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는 매우 교양있고 지성적인 귀부인이었다.
루이즈 드 사부아
(이분도 장난 아니십니다.영국의 스윈포드에 비교해도 될듯...)
그녀는 12세가 되기도 전에 샤를 당굴렘백작과 혼인을 했다. 이 혼인 역시 당시 상류층의 결혼이 대게 그러하듯이
정략결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영지인 코냑에 도착하자마자,
곧 자기 남편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잔 드 폴리냑이란 여성이었다.(왜 폴리냑인지... ) 남편의 정부와 싸우기에는 너무도 나이가 어렸던 루이즈는 오히려 남편정부의 보호자가 되었다. 적대적인 연적관계에 놓인 이 두 여성은 기이하게도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나중에 잔은 루이즈가 낳은 아이들을 매우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었다.
루이즈는 일찍 작고한 남편 대신에, 늘 사랑스런 외동아들에게 폭풍 같은 애정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루이즈는 아들의 정부인 푸랑수아즈의 존재를 그리 탐착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차에 마침 아들이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나 귀국을 하게 되었다. '바로 기회는 이 때다!'라고 여긴 루이즈는 자기가 총해하는 시녀 안을 대동하고 아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당시 그녀에게는 두 고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불미스런 소문이 나돌던 참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예상은 적중하여, 프랑수아 1세는 젊은 시녀 안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국왕의 두 총비 사이에서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결국 푸랑수아즈는 다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30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메트레상티트르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왕과 서로 서신을 교환하는 우정 어린 친구로 계속 남게 되었다.
1532년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왕실에 보낸 브레타뉴인들의 충정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가 사는 지방을 방문했다.
그래서 구왕은 잠시 샤토브리앙 성에 체류하였는데, 바로 이 때가 옛날 애인사이였던 두 사람의 마지막 조우였다.
그 후 5년후 1537년 10월 16일에 프랑수아즈는 사망했다. 그녀의 남편 장은 1543년까지 생존했다.
그리고 이 평탄했던 부부 사이에 끼어들었던 프랑수아 1세 역시 1574년 3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프랑수아즈 드 푸아라는 이 역사적인 실존인물은 문학작품의 무한한 상상력 덕분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무런 역사적 근거없이 그녀의 남편 장 드 라발-샤토브리앙은 시기심 많고 음침하며 잔인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그는
불성실한 아내를 살해하는 악당이 되엇다. 그리하여 전설에 따르면 매년 프랑수아즈의 생일 대마다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 당한 그녀의 아리따운 혼백이 샤토브리앙 성에 출몰한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 따르면 프랑수아즈는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국왕의 애첩이 되었다. 그런데 두사람의 연인 관계가
그토록 오래 유지되었던 비결은 이 젊은 백작부인의 숨겨진 남다른 재능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술속에
오래 담근 영롱한 작은 포도 알로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
국왕은 이 묘약에 몹시 열광했고, 그로인해 그녀에 대한 국왕의 애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나중에 이러한 비밀을 알게 된 샤토브리앙 지방의 한 초콜릿 장수가 이 불운했던 미녀에게 최대의 경이를 바쳤다.
즉 그는 프랑수아즈의 술에 절인 포도와 신선한 버터로 살살 녹인 부드러운 편도 초콜릿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세련되고 우아한 초콜릿 덕분이 프랑수아즈는 프랑스 귀부인의 매력과 정신을 대표하는 훌륭한 문화외교사절로 후세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안 드 피셀루 -에탕프 공작부인
(여담입니다만 프랑스 야후 사이트에서 찾았는데
이때의 초상화는 몇몇의 그림은 제외하고 모두 이 각도에서 그리더군요.ㅋㅋ)
'나는 아무런 사심없이 그대에게 미의 금사과와 강렬한 충성과 월계관을 바치노라.'
프랑스 대운압파 시인인 클레망 마로가 예찬한 안 드 피셀루는 오아즈 지방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일찍 사망하자 그녀의 아버즈는 새 장가를 들었다.
안은 계모 마들렌 밑에서 완벽한 귀족여성의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문학 취미와 열정이 대단하였다. 그리스.라틴 문학 외에도 다양한 예술과 학문을 배웠다. 그녀는 시나 운문을 짓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1522년 그녀는 궁에 들어가 이듬해에 국왕의 어머니인 루이즈를 모시는 시녀가 되었다. 3년동안 루이즈의 밑에서
고상한 기품과 남성을 유혹하는 세련된 기법을 다시 익혔다. 루이즈의 치밀한 계산과 배려 덕분에 안은 포로의 몸에서 풀려난 국왕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그녀는 푸룬 눈에 눈부신 금발,또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몸매의 소유자였다.
물론 다분히 작위적인 것이었지만 그녀는 천사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병영에서 갓 풀려난 프랑수아 1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인 마로에 따르면 그녀의 안색은 매우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그윽한 푸르른 눈빛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색조화장을 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안은 순진무구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당차고 야심만만한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의 행동은 작위적이고 계산된 것이었다. 두뇌가 매우 영민했던 그녀의 소원은 바로 프랑수아즈를 누르고
제 자신이 국왕의 총비가 되는 것이었다. 프랑수아즈가 국왕과 합류하기 위해 뒤늦게 보르도에 당도했을 때 그녀의 새로운 연적의 이런 의도를 곧 눈치챘다. 결국 1528년안 드 피셀루는 나이든 프랑수아즈를 보기 좋게 누르고 국왕의 제일 총비가 되었다.이 두사람의 새로운 연인 관계는 국왕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 된다.
드디어 그토록 소원하던 국왕의 정부가 된 안은 미모와 지성으로 한껏 명성을 날렸다. 안은 자기 애인인 국왕에게 자기 의사를 교묘하게 관철시키는 영악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대놓고 국왕을 조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의견을 내놓고 국왕에게 그것을 경청 하도록 했다. 사실상 안은 신체적 용모보다는 정신적인 활력과 지성으로 프랑수아 1세의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그녀는 궁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궁정으로부터 존경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코 궁정에 기거하지 않았다. 또한 자기 저택에 문인을 초대하여 그들을 몹시 우대했다.
안 드 피셀루는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또 다른 막강한 경쟁상대를 만나게 된다. 디안은 당시 왕태자였던 20세의 청년 앙리 2세의 정부였다. 이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없었다. 안은 국왕과 왕태자를 동시에 조종할 줄 아는 디안을 매우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했다.
그녀는 디안을 제거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안은 결코 국왕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지만 국왕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할 줄 알았고 끝까지 애첩으로 남아 있었다. 브랑톰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만일 국왕이 에탕프 부인에게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국왕한테만 정절을 지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안 드 피셀루는 정치적인 음모에 가담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으나 그 결과 그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프랑수아 1세는 결코 국사와 남녀의 정사를 혼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은 프랑수아 1세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인이 되었다.
1534년 프랑수아 1세 자기정부인 안 드 피셀루를 장 드 브로스와 혼인을 시켰다. 추방당한 가문의 아들이었던 장은 이 결혼을 몹시 다행스럽게 여겼다.그는 국왕의 애첩과 혼인을 한 덕택에 브레타뉴 지방의 실지를 도로 회복했다. 국왕은 이 부부에게 에탕프 백령을 하사했다. 이 백령은 1535년에 공령이 되었다. 이 때부터 안 드 피셀루는 에탕프 공작부인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프랑수아 1세는 이 부부에게 아주 관대한 태도를 보였고, 장을 브레타뉴 지사로 임명했다. 국왕은 정부의 남편을 멀리 보내기 위한방편으로 이런 칭호를 하사했던 것이다. 또한 국왕은 안 드 피셀루에게 뫼동의 땅을 하사했다.
그녀는 국왕의 이러한 각별한 은총 덕분애 클레망 마로 같은 예술가들의 보호자로서 자신의 명성과 입지를 굳혔다.
1539년 안은 자신이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서서히 감지하기 시작했다.그것은 어느 새 자기의 라이벌인 디안 드 푸아티에의 수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디안과 대립하고 있었다. 디안은 독실한 가톨릭 지지자였던 반면에 안은 스스로 신교도 임을 자처하면서 서정시인 클레망 마로 같은 이들과 함께 칼뱅사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1545년 프랑수아 1세는 바도네 주교로부터 빼앗은 많은 봉토를 장 드 브로스 안드 피셀루 부부에게 하사했다.
안은 정치생활에 관여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할 무렵에 그녀는 카를 5세에게 국가기밀을 팔아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미래의 국왕 앙리 2세의 정부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와의 위험한 경쟁관계가 이처럼 대외정책에서도 불미스럽게 표출된 셈이다.
즉 돌발적인 실패로 왕태자 앙리 2세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해 안은 카를 5세와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중대한 국가기밀을 넘긴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 군대의 행군까지도 적국에게 소상히 알려주었다.
안이 저지른 죄상의 소문이 재빨리 퍼지도록 부추긴 장본인은 바로 디안이었다, 그러나 안의 이러한 돌출 행동을 미리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샹보르 성의 벽에 다음과 같이 한탄스럽게 기술했다.
"변덕스런 여성을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지!"
국왕은 이 사건에 자기 아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고 그냥 혼자서 결정을 내렸다.
가급적이면 이 일을 조용히 수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앙리는 가끔 비정상적인 에너지를 부툴 시키며 자신에게 함부로 대들곤 했다.
프랑수아 1세도 역시 디안이 몹시 못마땅했으나 그녀를 절대로 내치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자기 상속자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 불을 보듯 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상대를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놀칠 수 없었던 디안은 프랑수아 1세에게 용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국왕은 주변의 압력게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셈이었다.
그녀가 국왕으로 부터 하사받았던 재산과 보석은 거의 압류되었으며
(보석은 결정적인 공헌을 한 디안에게 일부가 하사되었다.)
자신의 공령으로 좌천되고 그녀의 보호 하에 있던 사람과 철저히 격리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안을 거의 18년동안이나 브레타뉴 지방에 있는 성에 유폐시켰다.
1576년부터 그녀는 자기 성에 신교도들의 우두머리를 하나 둘 씩 맞아들였다.
안은 오래장수했다.
1547년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고 1559년 앙리 2세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1566년 자기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의 죽음까지 목도했다.
그리고 1580년 가을에 "미인 중에 가장 학식이 높고 학식 있는 여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높이 숭앙을
받았던 이 여인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tip : 첫번째 왕비 클로드 프랑스는 어머니의 절름발을 물려받았으나 외모는 물려받지 못했다고 하죠.
앙리 2세는 왕태자 시절에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그 딸에게는 디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p.s : 김복래의 '프랑스 왕과 왕비'에서 발췌한것으로 이야기를 좀 줄이고 각색도 조금 하였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ㅎㅎ 프랑수아 2세는 그냥 여자 꼬시기 천부적인 바람둥이 같기도 한데 또 성격 자체가 여자한테는 상냥하달까 천성이 그런 것 같더라구요. 미인도 아니고 평범 그 자체였던 첫 왕비한테도 바람질 빼고는 잘 해줬는데 천하의 웬수가 등 떠밀어 보낸 두번째 왕비한텐 그 웬수 땜에 보란듯이 냉정했지만; 다 무시하던 외국인 며느리를 똑똑하고 고상하다고 혼자 감싸준 사람도 프랑수아였으니.
천성이 여자한테 약한 그런남자??같아요 왕비들만 불쌍하지...
국왕 정부들의 삶이 하나같이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하네요. 그 복마전 같은 왕궁에서, 국왕의 총애 하나에 지위가 좌지우지되고, 때로는 생존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그런데 다른 건 그렇다쳐도 에탕프 공작부인이 국가기밀을 외국에 넘긴 사건은 경악 자체네요. 그저 궁정에서 기싸움하는 라이벌을 응징하겠답시고 국가 기밀을 외국에 넘겼다는 것도,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개인 저택에 유폐되는 걸로 끝났다는 것도요. 사형까지는 몰라도 감옥에 가거나 추방되기는 할 줄 알았는데... 혹시 당시 정서에는 개인 저택에 유폐되는 것이 엄청나게 무거운 형벌로 여겨지기라도 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