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청바지
小珍 박 기 옥
수필문학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수필은 새로운 견문이나 체험의 기록에서 출발했다. 기행문이나 시화집, 궁중비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기록 본능이다.
근대로 넘어와서는 시인, 소설가 등 문학인들에 의해 자아각성과 사물을 투시하는 수상적(隨想的) 수필이 쓰여졌다. 그들은 시나 소설을 쓰다가 떠오른 자투리 감상을 여기(餘紀)로 남겼다. 이불을 만들다가 남은 천으로 예쁜 밥상보나 보자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수필을 두고 서자문학(庶子文學)이니, 여기 문학(餘紀文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로 넘어와서는 전문 수필가가 등장하면서 수필문예지들이 출판되고, 일간지에 신춘문예가 신설되었다. 수필 이론에 관한 쟁점들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쟁점은 주로 수필문학의 허구성 문제나 3인칭 도입의 가능성 등이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수필인구가 폭증하여 수필 비평과 창작수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동시에 대학의 평생교육원과 도서관을 중심으로 수필 강좌가 개설되면서 수필 이론서도 출간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수필의 역사를 늘어놓는가 하면 수필의 역사가 청바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수필을 감히 노동자들이나 입는 청바지에다 갖다 붙이느냐고 몽둥이를 들고 덤벼도 어쩔 수 없다. 잠시만 들어보시라.
우선 수필과 청바지는 출신성분부터가 닮았다. 청바지의 역사도 수필 못지않다. 독일 출신의 노동자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금광, 즉, ‘골드러시(gold rush)’가 한창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다른 이민 청년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리바이가 가진 밑천이라고는 포장마차 덮개용 천과 텐트용 천이 전부였다. 그가 알고 있는 미국의 서부는 포장마차와 텐트의 무리가 판을 치는 신천지였다. 당연히 덮개 수요가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한 리바이는 색다른 아이템을 발견했다. 노다지를 캐는 광부들의 바지가 자주 찢어지고 헤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에 리바이는 발상을 전환했다. 텐트용 천을 이용해 튼튼하고 질긴 바지를 만들기로 했다. 리바이가 자신이 만든 텐트 천 작업복을 광부들에게 선보이자 바지는 만드는 족족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리바이의 바지(levi's pants), 즉, ‘리바이스’라는 브랜드가 탄생한 시점이다. 이후 리바이는 작업복 제조업자 겸 도매상으로 변신한 뒤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나날이 사업을 확장했다. 이는 여기문학 혹은 서자문학으로 알려진 수필이 자생적으로 진화하여 산문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다음으로는 수필과 청바지의 성장 배경이다.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웨스턴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카우보이 스타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영화 속 주인공이었던 배우들의 옷차림은 슈트 정장에서 벗어나 청바지와 웨스턴 부츠, 셔츠와 가죽 베스트 등이었다. 이때부터 청바지는 노동자들이나 입는 작업복이 아니라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하며 진화해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리소문 없이 들어온 청바지를 산골에서 콩밭 매는 아줌마에서부터 제주도의 이효리까지 다투어 입게 되었다. 값도 천양지차다.
지금 문학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수필붐 또한 산업사회가 빚은 자생적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화와 소비산업의 발달과도 관련이 깊다. 이는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가 현대인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청바지처럼 수필도 시대적 상황에 걸맞는 아이템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는 산문시대다. 그 중심에 수필이 있다. 바야흐로 수필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 현상을 보여 한국문인협회의 수필회원 수만 해도 무려 3,000명을 능가한다. 악화든 양화든 가시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수필의 미래이다. 우리는 21세기를 사는 작가들이다.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달로서만 이어져 나가는 사회가 아니다. 지적 상상력과 문화적 창조력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문학의 정체성과 실험정신의 융합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
오늘 아침 신문에는 한 청바지 회사가 56세의 부룩쉴즈( Brooke Shields)를 새로운 모델로 채용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녀는 15세 때 리바이스의 경쟁회사인 캘빈 클라인의 모델을 했던 할리우드 스타다. 56세에 청바지 모델이라니! 문 꼭꼭 걸어 잠그고 담장만 높이고 있는 문학동네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닌가!
현기증이 나도록 자유분방한 또 다른 세계를 넘보며 40년 전 캘빈 클라인이 그녀를 통해 내세웠던 도발적인 광고 문구를 떠올렸다.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
첫댓글 캘빈 클라인이 1942년생 미국의 디자이너이네요.
원문의 해석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서~~
수필과 나 사이를 가로 막는 게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오~~~~~~
정말 수필을 사랑하시는
존경하는 소진 선생님입니다~~~^^*
하하.
이렇게 말귀 밝은 사람일 줄이야!
기분 나이스!
한때는 부룩쉴즈가 내 이상형이었는데,
역시 세월은 흘러간 모양입니다.
미모의 젊은 여성이
'나와 청바지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하면
사람들한테는 아찔한 여성의 몸이 생각날 텐데
이게 어찌 하여 사람이 아니라 청바지 광고가 되었을까?
혹시 'Calvins'이 남성으로 의인화가 된 건가?
갑자기 드는 생각입니다.
지금 56세나 된 부룩쉴즈가 과거와 같이
'나와 청바지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하면
아마도 사람들은 이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도 좋지만,
그래도 뭔가 있는 것이 든든하지 않을까?
어떤 남자가 요렇게 살짝 문안을 다듬었다고 합시다.
'나와 청바지 사이에는 거시기가 있어요.'
원래 의미는 알몸으로 청바지를 입으면 피부가 긁힐 수 있으므로
속옷도 좀 제대로 갖춰 입자는 것이지만
이걸 이렇게 읽을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ㅎㅎ.
김인기 선생님.
원문보다 댓글이 더 근사합니다.
한참 웃었습니다.
재미 있습니다. ㅋ
청바지는 제가 매일 입는 옷이고 그만큼 편한데 수필은 왜그리 어렵고 걸치기가 쉽지 않은지 ㅋ
머잖아 수필도 청바지처럼 편해질 겁니다.
小珍이라는 수필가는 청바지를 가르켜
'산골에서 콩밭 매는 아줌마에서부터 제주도의 이효리까지 입게 된 옷'
이라고 하더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