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상한 감정의 상처를 치유받으라(2031.2020.6.14)
요일4:7-21
할렐루야
설문조사의 내용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받은 나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질문 가운데 ‘당신은 속상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라는 질문항목도 있었습니다. 20대 젊은 사람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다. 디스코텍에 가서 밤새도록 흔들어 댄다. 노래방에 가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차를 몰고 나가서 드라이브를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였습니다. 30대와 40대와의 대답도 비슷했습니다.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신다. 결국 한국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는 속상한 일이 많아서입니다.
설문조사의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그 속상한 일이 풀렸는가’였습니다. 그 질문에 답은 놀랍게도 100%가 ‘아니다’였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속이 상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서 해장국을 사먹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일로 속이 상하실 때 어떤 방법으로 그 속상한 일을 해결하십니까?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이 런일, 저런 일로 속이 상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겉모양만 보고서는 그 사람의 사정을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번 옆 사람 얼굴 보세요. 천사와 같이 미소를 짖고 속상한거 하나도 없어보이지 않습니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남모르게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고 괴로운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다 있지요. 아멘. 왜 그래요. 누구나 자기 체면 때문에 앞문은 굳게 닫고 교회와서는 웃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보면 누구나 자기만의 알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녀문제, 배우자 문제, 사업문제, 직장문제, 교회문제 등으로 속이 상해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를 다시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에게 얻어맞았을 때 그 속상함을 어디에다 풉니까? 어린아이들은 집으로 달려 들어와 엄마 하면서 어머니 품에 안깁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맞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또 격려해 주십니다. 그때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은 풀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내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혼자 괴로워하거나, 떠들고 다니시거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오셔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행사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께 손을 펴시고,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로하사 만족케 하시며 또한 좋은것으로 풍성하게 채워 주실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제일먼저 교회로 달려와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이 한마디 속에는 나의 억울함, 원통함이 다 들어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속만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생깁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나가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한 주간 동안 내 상한 감정의 상처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마시고 오늘 주신 말씀으로 치유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좋은 눈을 가지고 좋은 입을 가졌으니 좋은 것만 바라보고, 좋은 이야기만 하는 성도가 되셔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복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위와 톱과 사람의 혀가 서로 힘 자랑을 합니다. 먼저 가위가 이렇게 말하기를‘내가 지나가면 어떤 고급 비단이라 할지라도 다 조각이 나고 말어’그러자 톱이 기죽지 않으려고 이렇게 말하는데‘내 이빨이 닿기만 하면 수십년된 나무도 다 나가 자빠진다구’ 마지막으로 혀가 말하기를‘가소롭다. 미련한 것들, 나는 힘쓰지 않고도 내 말 한마디면 오랜 친구도 원수로 만들 수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평생 동안 한을 품고 살게 할 수도 있다구’이 말이 떨어지자 가위와 톱이 부들부들 떨면서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 속담에 ‘혀는 뼈가 없이 약하나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잘 사용하면 유익하나 잘못 사용하면 큰 해를 끼치는 것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교훈하므로 이 말씀을 의지해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지난 한주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좋은 일이 많으셨습니까? 좋은 것만 기억하면 좋은 일이 많은 주간이었을 것이고, 나쁜 일만 기억하면 나쁜 일이 많은 주간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좋은 일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이 많으셨지요? 이 주간에도 좋은 일이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옆의 분들과 ‘이 주간에 좋은 일이 많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설교말씀 듣기 전에 항상 서로 인사하고 웃고 말씀 듣는데 말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항상 평안함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살맛이 납니다. 그래서 마음도 즐거워지고 행복해집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일에 복을 주십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놀라운 상급을 주십니다. 이러니 이웃사랑이 얼마나 수지맞는 것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면 반드시 복이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 속에 나의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고 너의 인생의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도움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독생자를 보내 주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아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의 삶을 살수 있을 까요? 상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욕구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이거나, 의무감 때문에,동정심 때문에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사랑이 아닙니다.
흘러간 옛 노래 중에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라는 가사가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또 ‘울고 싶어라—울고 싶어라 이마음---’이라는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울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웃으면서 살고 싶고 웃음으로 일을 마치기를 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습니까? 웃으려고 왔습니까? 울고 싶어서 왔습니까? 누구든지 대답하기는 웃으면서 한평생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웃고만 사는 인생이 아니라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주지를 않기에 울고 싶은 날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모르게 눈물을 많이 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리찢기고 저리 찢긴 감정의 상처를 가지고 속상하고 의욕도 안생기고 무기력하게 살아 갈 대가 있습니다. 전3: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21년전에 상주감리교회롤 보내주실 때에 웃을려고 보내 주었습니까? 울려고 보내 주었겠습니까? 참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 때문에 많이 웃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웃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눈물을 흘려서라도 여러분이 속상한 것을 치유받고, 기쁨을 되찾고, 아픔을 치유받고, 상한감정을 치유받을 수 있다면 주님이 부탁하신 일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며, 상처를 입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유하며 흘기는 눈을 부드럽게 하며, 화난 목소리를 다정한 음성으로 바꾸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거칠고 메마른 마음으로 모든 일에 신경질 적인 사람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성도여러분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상한감정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함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느낌이나 감정을 무시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는 좋거나 나쁘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감정이 항상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감정이 상처를 입게되면 생활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요즘에 많은 질병들이 생기는 원인가운데 하나도 감정의 상처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감정조절을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상처를 받게되면 네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두려운 마음이생겨서 불안과 염려가 따라오고, 분노심이 생겨서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 질투 반항 등등이 오며, 실패의 마음이 들어서 좌절감과 열등의식과 실망과 죄책감을 가져오기도 하며,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편견과 이기심과 만용과 자만심이 생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 억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의약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의 치료 방법에 큰 힘이 되는 것은 의약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상처받은 감정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치료방법은 우리 주님이 이천년전에 행하신 방법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상한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해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 즉 상한감정을 치유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욕구중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정신적인 양식입니다. 현대는 사랑의 기근 때문이 허덕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냉정하게 살려고만 합니다. 날카로운 이성만 앞세우고 살려고 합니다. 가슴이 아주 차가워졌습니다. 바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을 아래위로 흩어보고 지나갑니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몰라도 인정이 메말라가는 시대입니다. 상처투성이인 감정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큰 그릇답게 모든 사람을 포용해 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본문의 교훈을 따라서 우리는 상한감정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1.내 상한 감정을 치유 받으려면 남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좋아하고 상대방을 위하고 기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 유익되게 하고 편리하게 하고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것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평가하는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더 귀한 것이 없고 더 요구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한 말로 하면 상대방을 좋게, 평안하게, 복되게 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좋은 것으로, 귀중한 것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요일4:8절‘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된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굶주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추운계절, 년말년시, 명절이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많이 발전해 가고 있으며 물질도 풍족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라 가고 불신만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마음이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좁아서 항상 따지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넓어서 무엇이든지 양보하며 그려 그렇게 해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게 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넓히는 운동을 해서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남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죄송한 이야기지만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남의 과실을 용서할만한 아량이 없이 남을 수용하지 못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나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면 언제나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자신에게 건강도 좋고 일들이 잘되며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가 되니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온통 더러운 물을 다 수용하듯이 우리의 마음에 싫은 사람도, 튼 사람도, 작은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다 수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도록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넓게갖고 남을 사랑하면 자신의 감정이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한 감정을 치유받기 위해서 먼저 남을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은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단번에, 무조건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신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죄가운데 있을 때에 영원히 멸망받을 아무 가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으며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속의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의무요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랑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하면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되어져야 합니다. 최우선적이어야 하며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빚진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많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치유받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이 바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사랑하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메말라 서로가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기 시작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미움과 시기와 증오심이 생겨서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심이 일어나면 감정조절이 되지않아서 가인과 같이 동생을 죽이는 살인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람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랑에 빛진자들입니다. 이 사랑의 빛을 갚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많이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해준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책임을 지는 것이고 존중해주고 이해해 주고 그리고 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마음이 기쁘기만 한 것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 철저하게 주고 기뻐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주는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고 주면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는 것이 주는자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같은 사람에게도 먼저 악수를 청하고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이 기쁠수가 없습니다.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감정을 치료받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남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내 마음의 상처가 치료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상한 감정의 상처를 가진 자들에게 치유할 수 있는 말씀으로 사랑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나가 위로해주며 베풀며 사랑해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은혜롭게 살도록 넓은 마음을 갖도록 우리 스스로가 노력을 해 봅시다. 주님은 죄인, 세리, 걸인, 병자들 강도들 까지도 다 포용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게 손해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않기 위해서는 내가 아픔을 참을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속이 상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삶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어지면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성령충만함이 없는 성도일 것입니다. 본문에 주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상한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인 마음을 넓혀서 큰 그릇이 되어서 남을 많이 사랑하라는 음성을 들었으므로 서로 사랑하되 먼저 남을 사랑하셔서 우리 모두의 상한감정이 치유받으시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 바라면서 마음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내 상한 감정을 치유받으려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키우고 있는 화초들도 주인이 늘 닦아주고 사랑해 주면 잘 자라납니다. 그런데 구박하면 일찍 죽어버리고 마는 것을 느끼실 수가 있습니다. 또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라도 주인이 사랑해주면 잘 자랍니다. 미미한 강아지라도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고, 한그루의 나무도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사랑스런 손길을 기다리고 있고 그 손길이 닿으면 아름답게 잘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랑받을 때만이 사람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는 사랑입니다. 현대인의 심각한 문제는 사랑의 굶주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많이 사랑해주고 사랑도 받아야 합니다.
12절에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표현된 그 사랑을 우리가 나타내 보일 때 우리안에 거하심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의 마음속에 쏟아 부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롬5:5)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안에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표현함으로, 그리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하시고’는 ‘체재하다,머물러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 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가지고 베풀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놀라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체험이 아니겠습니까?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자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사람들은 젖먹는 아기들도 자기방과 침대에 혼자두고 자게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어머니 품에서 자라고 학교갈 때 까지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잠을 잘 때는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자기도 합니다. 만지막 하면서 지냅니다. 미국 아이들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독립심은 있는데 애정이 결핍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미국인들 가운데 정신질환자가 많은 것은 그 육아법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옛날 우리 어린이들은 엄마의 젖을 갖고 놀았는데 이제는 몸매 망가진다고 해서 모유를 먹이지 않고 분유를 먹여서 키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손가락 빠는 아이들도 많아졌는데 이것이 다 엄마의 젖을 흡족히 먹지못한 사랑의 굶주린 어린이의 표정입니다. 또 소젖을 먹고 커서 그런가 말도 잘듣지 않고, 많이 낳지 않고 키워서 그런지, 버릇도 없고 부모를 치받는 자녀들고 있어 속이 상하고 감정이 상하고, 사랑을 주었는데 사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랑이 결여되면 사랑의 결핍증으로 끙끙 앓게 되는 것입니다.
요13:34절에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외로운 세상입니다. 감정이 메마른 세상입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서로’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갈6: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엡4: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빌2:2-3‘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벧전4: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봉사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이 코이노니아의 정신인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서로가 함께 사랑합시다. 우리 이웃끼리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따뜻하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상한 감정들은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많이 사랑합시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아침에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특별히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전하므로 마음의 감정을 상처받은 사람들이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짓말 하는 자니’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고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안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이해 할 수 없는 사랑, 놀라운 사랑이 이웃의 마음을 녹이는 것입니다. 형제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까이 있는 이웃과 가족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나누어 보십시오. 그것은 작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 줄 엄청난 증거가 될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일찍이 요일3:18절‘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말과 같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은 미완성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12절에‘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삭막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서로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안에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웃을,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 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가슴이 더욱 뜨거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내 상한 감정의 치유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사랑만이 해결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배반하지 못하도록 한 가지 규례를 정하여 주었습니다. 출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 때부터 선택을 하여 선민으로 삼아주셨는데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이 말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치료의 약속을 했고, 말4: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했습니다.
치료에는 세 가지의 치료가 있습니다. 육체의 치료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의 발병 원인을 보면 죗값으로 오는 병이 있고, 또는 신앙의 연단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죽을 때가 되어서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이 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정신의 치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창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신이 잘못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병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병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영혼의 치료가 있습니다. 다른 어떤 병보다도 영혼의 병이 더욱 무섭습니다. 다른 병은 인간을 단지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영혼의 병은 인간을 영원한 멸망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이 영혼의 병은 반드시 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메데르 박사는 그가 정신과 의사로서 20년만에 인간의 정신속에 병을 만드는 원인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죄는 만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해서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독생자까지 주신 분입니다. 본문에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집을 나간 탕자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그 아버지는 꾸짖지 않고 품어주십니다. 탕자가 집을 나간 후에 고생한 다음에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께로 가야겠구나’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께로 갔을 때에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뛰어나가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의 목을 끌어앉고 환영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왜 순종하지 않았느냐? 재산은 다 어떻게 했느냐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서오라 새옷을 입혀주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라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안에는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심각한 문제라도 하나님의 사랑안에는 그것을 녹이고 맘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먼저 사랑를 나누어야 그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 왕중에 에드워드7세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산책을 나갔다가 자기 아내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만 아내가 발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큰일났습니다. 빨리 치료를 해야 될텐데 민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조금한 민가가 보였습니다. 이 에드워드 왕이 이 민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오’,‘그 누구시오’,‘나 에드워드 7세 왕이요’,‘그 거짓말도 심하네. 거짓말하지 마시오. 왕이 어떻게 여기에 온다 말이오’,‘나 왕이요’,‘왕은 무슨 왕’,‘나는 당신의 왕이요’,‘무슨 왕. 우리 왕은 왕궁에 계실텐데’ 이 촌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왕은 문을 두드렸어요. 혹시나 하고 문을 삐거덕 열었는데 정말 왕이 밖에 서있는 것입니다. 백배 사죄를 하면서 ‘대왕이시여.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몰랐습니다’ 그는 뉘우치면서 ‘왜 내가 진작 문을 열지 않았던가’그는 일생동안에 왕을 밖에 세워 두었다가 죽을뻔 했던 그 경험을 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왕이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여러분의 상한 가정을 치유 하시려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문 밖에 세워두시겠습니까? 이 시간에 마음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시길 바랍니다. ‘주님 내가 사랑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주소서’이렇게 기도하시면서 주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이 시간에 문을 열어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문을 열면 왕은 여러분 속에 들어가셔서 여러분과 함께 먹고 입고 살아가시며 여러분의 삶 옆에 계셔서 여러분의 사랑하시는 사랑 받는 복된 존재로 여러분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사랑을 받으십시오. 사랑을 받기 위해 이 시간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귀한 사랑을 영접해 드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상처받은 현대인들이 이 감정의 상처를 치유받을 길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사랑으로 위로하고 돌봐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되기 위하여 노력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상한 감정을 먼저 치유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마음속에 기쁜소식 진리에 목말라 있는이도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만한 관심있는가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이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서 상한 감정으로 상처난 사람들에게 누가 치료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할 수 있다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고는 주님 이백성을 사랑하고 궁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를 하니까 응답이 오기를 나는 2천년 전에 이 백성을 사랑하고 궁휼히 여기어 주었다 이제는 네가 할차례다라는 음성을 들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가 감정이 상한 영혼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외로운 현대인을 찾아봅시다.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의 증거를 통하여 저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받아 주안에서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행복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도 상처입은 치료자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속상함의 감정의 상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육체의 상처와 괴로움이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대단한 상처를 받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경제적인 상처를 받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픈 상처만 어루만지며 탄식하지 말고 내게 아픔이 있기에 나를 위해서 피흘려 주시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지금 고통과 상처를 받으셨다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내죄로 인해서이든, 이웃으로 인해서이든 생활가운데 와지는 환경의 억압으로부터의 입은 상처가 있으면 이 시간에 우리를 대신해 상처를 입으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마음 깊은 곳에 입은 감정의 상처들을 치료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면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아직도 수많은 상처입은 자들을 향하여 치료하는 역할을 해 나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상주교회는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팔할 정도가 아니라 그 아품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그리스도로 치료하는 자리까지 나가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상한 감정의 치유는 남을 먼저 용서하고 사랑할 때에 치유가 가능한 것이고 또한 사랑을 받을 때에 치유가 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적인 결단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들 간에도 만남을 통해서 서로 용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가족간에 참 평안을 찾았으면 합니다. 모든 아픈상처 때로는 기억속에서 사라진 것 같은데 불쑥 뛰어나와서 받는 상처들 모든 실패와 육신의 질병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감정들을 우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서 깨끗이 치료받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