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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30 : 장영도(張榮道, 男, 1933年 6月7日生.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 |
*최초증언일: 1995. 10. 2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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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니까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이 배가 부산으로 가지 않고 어느 항구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반세기 동안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를 딛고 1945년 8월 24일 마이즈루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우키시마호가 폭파 침몰됨에 따라 고혼이 되신 어머니 영전에 증언합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아버지(張鍾植), 어머니(鄭福男), 누나(張玉南, 창씨명:中山幸子), 형 장영문(張永文, 창씨명:中山文南), 나 장영도(張榮道, 창씨명:中山光雄), 여동생 장옥성(張玉成, 창씨명:中山花子) 모두 여섯 식구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시모키타반도 오미나토에 있었던 스가와라 조에 소속된 청부업자로서 주로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동포를 빼내어 자유노동자로 고용하면서 군사시설을 구축하는 토건업에 종사했습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어 독립되자 우리 온 식구는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기쁨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해방이 무엇인지, 독립이 무엇인지 몰라서 누나에게 물었더니 누나는 한복을 입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가 강권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수탈을 당한 사실과 이제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줬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온 가족이 만세를 부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장영도씨 진술을 기록하는 한종술 변호사와 이진견 사무국장.
그러던 즈음에 한국 사람들을 고국으로 보내준다는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명령에 따라 당시 강제징용돼 있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우키시마호를 타기 위해 기구치잔교에 가보니 수 천 명의 한국인들이 고향으로 간다는 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우리 가족은 기구치잔교 근처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작은 배를 타고 멀리 정박하고 있는 우키시마호에 옮겨 탔습니다. 우키시마호에 타고 보니 남자는 배 위쪽에, 여자와 어린이는 배 아래쪽에 타라고 명령하여 아버지와 형은 배 뒤편 위쪽으로 가고 누나와 동생과 나는 어머니와 함께 배 아래쪽인 선실에 자리 잡았습니다. 8월 22일 오미나토 항을 출항한 뒤 나는 배 위쪽에 있는 형한테 가 보았다가 또 지루하면 선실에 있는 누나와 동생한테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이 배가 부산으로 가지 않고 어느 항구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4일 오후 5시쯤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누군가가 “육지가 보인다. 배가 항구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갑판위로 올라가 구경하려고 어머니 곁을 떠나려 하니까 여동생이 같이 나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고 타일렀는데 여동생은 나를 따라 나오려다 다시 제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나가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갑판에 올라가서 오래간만에 육지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항구를 향해 속도를 늦추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우리가 탄 배보다 작은 두 척의 배가 앞으로 나가면서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는 속도가 더 떨어지더니 완전히 멈춰 섰습니다. 어린 마음에 배가 항구에 닿지 않았는데 왜 멈출까 하고 의아해 하면서 배 아래쪽을 보니까 구명보트가 내려지면서 일본 해군 너 댓 명 정도가 보트를 타고 모선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있던 곳이 배의 오른쪽 중앙부분 갑판이었기 때문에 보트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잠시 뒤 ‘쾅!〜’하는 폭발소리가 두 세 번 나면서 배의 가운데 부분부터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물기둥은 전혀 없었으며 바닷물은 단 한 방울도 몸에 튀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라앉지 않은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갑판이 시계방향으로 넘어지는 듯 하며 기울기 시작했고 동시에 갑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 때 이미 바다는 중유로 덮여 있어 많은 모든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뤘습니다. 내가 바다에 뛰어들려 하는 순간 어디서 오셨는지 아버지가 나를 잡고 ‘바다에 뛰어들지 마라’하여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배는 천천히 가운데부터 가라앉으면서 갑판이 다시 시계 반대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 그 때 민간인 어선이 구조하러 다가와 아버지와 같이 어선으로 구조되었습니다. 뭍으로 나와서 형은 만날 수 있었으나 어머니와 누나와 여동생은 찾을 수 없었으며 어머니가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하신 그 말씀은 유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우리의 단란했던 가정은 파괴되었습니다. 그 해 9월 16일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부산일보>에 가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폭로하여 1945년 9월18일자로 일제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이상은 생존자 장영도씨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에 보내온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