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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며 놀았던 幼年의 추억
개암 김동출
다시 돌아온 가을.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의 순리로 오가는 계절의 변화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느긋해야 할 텐데 오히려 조급해 짐은 노후의 준비가 덜 된 마음 때문일까? 문밖을 나서면 가을이 한참 익어가는 길목마다 아내의 백분 냄새보다 더 짙은 금목서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명징한 가을 햇살이 금빛 물결 윤슬을 만들고 아직 공터로 있는 맞은편 인공섬에는 [가고파 국화 축제] 준비를 위한 차량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 무르익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지금쯤 내 고향 가파른 뒷산 산마루에는 무더기로 피어난 억새가 외로움을 달래며 바람결에 홀로 춤추고 있으리라. 일 년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가을이 오면 고향 생각으로 수심이 깊어지는 것은 이 세상 소풍 끝나고 하늘로 돌아갈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리라.
화자의 고향은 거제도 동남쪽. 옥포만의 포구에서 북쪽으로 들어간 산골짜기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니, 하루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마을을 삥 둘러싸고 있는 너른 산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소먹이는 장소이자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 시절에 우리가 하는 중요한 일은 소먹이는 일이었다. 한 여름철 점심을 먹은 후 ‘물꼬랑’(사철 물 마르는 날이 없었다) 소나무 그늘에 매어 놓은 소의 고삐를 풀어 물을 먹이고 풀이 많은 곳을 찾아 ‘뒷재’를 오르면 황톳길에서 뿜어 내는 지열로 숨이 턱턱 막혔지만, 가을이 무르익은 시월의 산속은 우리들의 천국이었다.
짙푸른 잔솔밭의 왕새(억새)가 은빛 물결로 춤추는 늦가을이면 열댓 명 무리의 우리는 누렁소를 몰고 풀이 많은 배나무골 산비탈로 찾아간다. 못 미처 고랑 가에서 저마다 소에게 물을 먹인 후 쇠뿔에 고삐를 감아 워낭을 매단 나 먹은 우두머리 소부터 풀밭으로 내쫓고 봄부터 눈여겨 두었던 열매 따기에 나선다. 가을이 영그는 숲 속에는 산포도 넝쿨(머루의 열매), 다래 넝쿨, 보리똥나무(보리수나무), 굴밤나무, 도토리나무, 돌배나무, 으름덩굴, 산밤나무, 돌감나무, 산초, 박달나무들이 잘 익은 열매를 달고 개구쟁이 목동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고개 넘어 ‘범비 까뜽’ 골짜기에는 돌배나무와 돌감나무, 산밤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어린 그 시절에 나무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열린다는 신기함과 호기심으로 열매를 땄을 뿐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넉넉하였다. ‘홀리고랑’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배나무 고목이 있었다. 이 배나무는 우리 동네에서 산을 넘어 국사봉 가는 길목의 이정표였다. ‘부진포고랑’에서 ‘아랫 국사봉’ 가는 길에는 화자의 형제만 아는 박달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어느 해 가을에 빨간 박달 열매를 따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이는 뒷산 산마루에 올라 억새 덤불을 헤치면 키 작은 개암나무마다 잘 익은 깨금(개암)이 암팡지게 숨어 있었다. 개암을 따서 깨물어 알을 발라 먹으면 세상에 없는 고소한 맛이었다.
햇살 좋은 맑은 날에는 두 고개 넘어 민둥산 ‘샛재’에 올라 산 아래로 소 떼를 풀어놓고 민둥산 산마루에 올라 잔솔밭 사이로 산 아래 뻗어 내린 잔디밭에서 나무 썰매를 탔다. 왕새(억새) 밭에 숨겨둔 자가용 나무 썰매를 찾아 꼭대기에서 차례로 썰매를 타면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싫증이 나면 편 먹기 공기놀이, 비석 치기나 굴밤으로 구슬치기를 하였다. 목동들이 많이 모인 날이면,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편을 갈라 진똘이(진놀이)나 오징어 게임(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을 하고 이기면 좋으나 지면 그 (罰)로 소 찾기에 나섰다.
이렇게 놀다가 때때로 소 떼의 행방을 놓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우리 동네 소 떼가 평소 잘 다니는 산길을 따라 워낭소리를 따라가거나, 고랑 물이 흐르는 다랑논(沓) 가에 가면 찾을 수 있었다. 어떨 때는 말썽꾸러기 어린 소가 나무울타리를 뚫고 남의 논밭에 들어가 다 자란 농작물을 함부로 뜯어먹어 쑥대밭으로 만드는 사고를 쳤다. 산에서 소를 잃어버렸을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뿔에 감아둔 고삐가 나뭇가지에 걸려 소가 옴짝달싹 못 할 때이다. 그런데 이럴 때는 신기하게도 사고를 당한 소의 새끼나 어미가 주위에서 울면서 주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것을 보면서 소를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우리 마을 가까이 있는 ‘물꼬랑’ 위 산비탈에는 다래, 머루, 으름 넝쿨이 숲을 이루어 있었다. 늦가을 어느 날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을 오르면 속살을 드러낸 ‘국산 바나나’ ‘으름’을 맛볼 수 있었다. 보리똥(보리수) 나무 가시를 헤쳐가며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를 한 줌 따 입에 넣으면 시금털털한 그 맛이 허기를 채워 주기도 하였다. 그때 어렵게 따온 산초 열매는 가을철에 추어탕의 양념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소를 먹이며 산속에서 놀았던 유년 시절의 경험이 젊은 교사 시절 보이스카우트 대 지도자가 되어서 야영을 하거나 산행을 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
산은 언제나 위험한 놀이터였다. 산중 무덤가에서 놀다가 땅벌이나 말벌에 쏘여 의식을 잃기도 하였고, 겁을 모르던 우리 소꾼 대장 ‘석구’ 형은 가을 산에서 독사에 물려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나무 썰매 타기 위해 자주 찾았던 ‘샛재’ 산마루 큰 바위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렸다. 소를 몰고 억새밭을 지나다 보면 소는 물론이고 우리들의 팔다리에 야생 진드기가 붙은 것도 모르고 며칠 동안 지내다 고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내 몸의 팔다리와 무릎은 나뭇가지에 할퀴고 풀 잎새에 베이고 돌부리에 부딪혀 난 상처가 마를 날 없었다.
시월의 지금쯤이면 내 고향의 다랑논에는 긴 가뭄 속에 덤벙 물 먹고 자란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학창 시절 재거름 져 날랐던 우리 집 큰 밭에는 부지런하신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 듣고 고구마, 무, 배추, 수수, 조, 콩, 참깨, 고추가 가을 햇살에 토실토실 영글어가고 있을 때지만, 적막한 산골 마을의 정겨운 그 모습은 흔적이 없고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수많은 아파트가 들어서 조선소에서 일하는 지구촌 가족이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되었다.
웬만한 농촌에서는 소가 했던 농사일을 기계가 대신하니, 학교 공부를 파하고 산에 올라 소먹이며 숲 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놀았던 나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고 말았다. 뒷산 마루 고개 넘어 우리가 소먹이며 놀았던 아름다운 산골짜기 그곳은 지금 별장과 농원이 들어서고 은어가 올라와 뛰놀던 청정한 시냇가는 파헤쳐지고 아름다운 청석들은 어느 집 정원석으로 뽑혀 나가고 말았으니 개발을 핑계로 자연이 파괴되는 곳이 어디 내 고향뿐 일까.
오늘 문득, 그 시절에 선머슴처럼 함께 뛰놀며 놀았던 친구가 보고 싶다. 샘이 많아서 걸핏하면 잘 토라졌던 아랫집 ‘○자’와 눈이 아름다웠던 아랫마을 ‘○이’는 아들딸 낳아 시집장가보내고 지금은 할머니 되어 있을 테지…. 그녀들도 나처럼 간간이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소로 쟁기 몰아 농사짓던 시절에 고향 산속에서 소먹이며 동네 친구들과 뛰놀며 놀았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보는 지금 눈가가 시려 든다. <♧ 위의 글에 나오는 지명(地名)은 그 시절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지어 부르던 방언>
2024.5.10.
2. 고희古稀의 아침, 오늘에 감사하며
개암 김동출
오늘은 2024년 4월 30일로 음력 삼월 스무이튿날. 필자가 태어난 지 꼭 70년째 되는 날이다. 아내의 축하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딸과 아들 내외에게서 온 축하 전화를 차례로 받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내가 태어난 그날인 듯 싱그러운 신록이 물결치고 시야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봄꽃이 나를 반겨 주는 듯하니 기쁘고 행복한 아침이다. 연둣빛 싱그러움이 물결치는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과 주님 은혜에 감사기도를 올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세월 참 빠르다.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할아버지 졸라서 청강생으로 초등학교 입학한 때가 마치 어제 같다. 아직도 마음은 청년 같은데 내 나이가 벌써 일흔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내 인생 7할을 소진하고도 아직도 살아갈 3할이 남아 있으니 오로지 감사할 따름일 뿐.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삶을 보여주신 부모님과 조상님께 덕분이다.
필자가 태어난 그 시절 고향마을의 지금쯤은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춘궁기였다. 집집이 양식이 다 떨어지면 논밭에 파종할 씨앗만 남겨둔 나머지 곡식을 죄다 모아 맷돌이나 절구로 빻은 가루를 금방 캐 온 생 쑥을 한데 버무려서 시루에 쪄내 만든 쑥버무리를 밥처럼 먹었다. 그렇게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산모들은 아기에게 젖까지 물려야 하니 춘궁기에 출산한 산모들은 미역국은커녕 굶어서 전신이 퉁퉁 부어 고생하는 사람이 비일비재하였다 한다. 힘든 그 시절에 필자가 태어났으니 산모인 어머니께서는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話者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자녀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님 덕택이다. 6.25에 참전하여 육군 장기 하사로 제대하신 아버지는 6년간의 군대 생활 중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자식 교육에 누구보다 진심이셨다. 열아홉 살에 한 살 위의 신랑에게 시집온 의령 옥 씨 어머니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다부지고 살림살이의 지혜가 뛰어나신 여장부였다. 당신의 젊은 시절에는 먼바다에 나간 남편을 대신하여 시부님을 도와 천수답 농사를 지으며 자녀교육과 시부모님을 봉양하며 맏며느리 역할을 다하였기에 어버이날에 효부상을 받으셨다. 이러한 부모님 덕분에 어려운 농촌 살림 속에서도 교육대학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선생님의 꿈을 이루고 마침내 지난 2019년 2월, 42년간의 교직에서 정년퇴직했다.
누르고 감추고 감내하며 살아온 70년 세월의 나의 인생 뒤안길. 청소년 시기에는 주위에 피붙이 멘토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살았기에 자칫 친구들은 이러한 나를 교만하다고 여겼을지 모르겠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경남의 도시와 농촌, 섬 지역에서 보낸 나의 교직 생활은 영광도 많았지만, 남들 모르는 시련은 더 많았다. 다행히 5십 후반에 가톨릭에 입문하여 하느님을 찾은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찾은 기쁨’과 같았다. 주님께서는 젊은 시절에 내게 남들보다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신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족한 내 탓이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정년퇴직한 뒤에 비로소 간절한 나의 기도에 기적 같은 큰 은혜를 주셨다.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게 했던 병들고 낡은 심장을 2020년 4월 어느 날에 어느 뇌사자의 튼튼한 심장을 찾아 바꾸어주셨다. 청년 시절에 엄한 벌을 내려 주신 하느님께서 왜 이런 기적을 내려 주셨는지 오늘도 보속補贖의 기도 속에 헤아려보지만, 여전히 어리석은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살아오는 동안 지은 죄 중 가장 큰 죄는 부모님께 불효한 것이다. 농촌 아낙으로 고생하신 어머님은 쉰둘의 나이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 자식들이 제대로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어머니 사후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생가는 지금의 ‘한화오션’ 배후 도시개발로 헐리고 말았다. 대토代土로 받은 시내에다 새집을 짓고 재혼하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세월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벼랑 끝에 서서 방황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젊은 계모는 재산에 눈이 멀어 부자유친의 천륜까지 끊으려고 했다. 새로 튼 둥지에 어린 친자식 둘을 데려와 결혼까지 시켰다. 마치 비둘기의 탁란 같은 후안무치한 패악은 참아내기 힘들었지만, 아버지 생전에는 외면하며 살았다. 어머님이 선종하신 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버지와의 소원한 그 무거운 틈새를 메워 준 분이 본가 이웃에 사는 누님과 매형이었다. 그러기에 1981년부터 고향을 떠나와 타관에 나와 살았던 필자는 두 살 터울 누님을 의지하면서 살았다. 고향을 찾은 명절에는 6남매 동기간이 매형댁에 모여 살붙이의 정의를 나눴기에 덜 외로웠다.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셨던 매형이 나의 칠순을 앞둔 지난 4월 중순에 혈액암으로 선종하셨다.
형제 계契에서는 매형이 타계하신 며칠 뒤로 다가온 필자의 칠순 상을 지난 일요일 오후 둘째 여동생 집으로 초대하여 근사하게 차려주었다. 어항 근처에 사는 동생은 아침 일찍 항구로 나가 공판장으로 가던 갑오징어와 아귀 등 싱싱한 횟감과 고둥을 한 다라 사와 직접 회와 무침으로 장만하고 여제들과 제수씨는 번듯하게 상을 차려내었다. 이태 전까지만 생선을 다루는 일은 모두 매형께서 수고하셨던 일이라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동안 내내 매형 생각이 그리워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생일상 앞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가슴이 미어졌지만 차오르는 슬픔을 꾹 참고 동생의 칠순 자리에 앉은 누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애써 슬픔을 참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불시에 찾아온 둘째 여제의 쌍둥이 손주가 귀여움 떨면서 즐거운 분위기로 바꾸어주었다. 형제 계에서는 이번 나의 칠순 생일을 기해 지나간 아내의 칠순 축하금까지 챙겨주었다. 이 자리에 이어 대체공휴일이 시작되는 5월 초에 슬하의 남매가 사돈 어르신까지 초대하여 축하 자리를 또 마련해 준다니 기쁘다. 한편으론 이런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떠나신 부모님께 못내 송구한 마음 숨길 수가 없다.
평생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사셨던 부모님의 대를 무던하게 이어온 나의 역할은 오를 여기까지다. 미래는 초등교직에 종사하며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원 강의에 출강까지 하는 딸과 최근 글로벌 전기전문 기업의 총괄팀장으로 승진한 아들 부부와 초등학생 두 손녀에게 희망을 걸고, 이들의 아름다운 성장을 지켜보며 지나간 내 삶을 승화된 문학으로 기록하는 일만 남았다. 지금 내 심장은 새로 산 자동차 엔진처럼 날마다 부드러운 고동 소리로 마음 설레게 한다. 그러나 그동안 과부하로 고생한 나머지 장기들이 신체 곳곳에서 경고음이 내고 있다. 세월 탓이니 뭐 어쩌겠나. 조상들이 깨진 수티(장독) 테 메어가며 평생 썼던 것처럼 미리 걱정할 것 없다.
비록 척박한 산비탈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부지런한 부모님 덕택에 한평생 교단에서 가르치는 보람을 누렸고, 가고파의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보금자리도 있고, 제자도 가끔 찾아 주니 더 바랄 게 없다. 여기에다 남은 내 인생을 인도하실 주님과 성모님도 만났으니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 그지없다. ‘성령칠은’ 중 평화와 온유의 미덕으로 이웃을 생각하며 신앙생활 안에서 반듯하게 살아가련다. 또한 지금과 같이 동기간同氣間에 우애를 나누면서 서로 건강하게 살다 하느님 나라로 함께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가끔 새들 떠난 둥지에 ‘우리 부부만 남았다’라는 생각을 하면 때로 외롭고 쓸쓸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인생인 것을. 여기에 덧붙여 본다. 교육자의 박봉 속에서 남편의 대학, 대학원 공부를 뒷바라지하며 슬하의 남매를 올곧게 키워낸 사랑하는 「경주 최 씨 ‘水月堂’ - 아내」에게 심중에 숨겨둔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던 나에게 ‘다시 뛰는 심장’을 주고 가신 이름 모를 영혼과 그분의 가족에게 늘 감사하며 삼가 그분의 영원한 안식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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