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추운 겨울 날, 폭 2m도 안 되는 좁은 비밀통로를 통해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피신을 한다. 역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1896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사이인 이 시기에 커피를 처음으로 마신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 그의 곁에서 매일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영화 <가비>는 출발한다. <조선 명탐정>의 원작자 김탁환 작가의『노서아 가비』를 원작으로, <접속><텔미썸딩><황진이>의 장윤현 감독이 오랜만에 내놓는 야심작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시기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고종은 쓰고도 달콤한 한 잔의 커피에서 씁쓸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로했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다. <가비>는 ‘검고 쓴맛이 강해서 독을 타는데 이용되기도 한다’는 커피를 소재로 고종 독살 음모설에 허구의 드라마를 덧입혔다. ‘고종 황제’(박희순)라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김소연)와 그녀를 목숨보다 사랑한 이중스파이 ‘일리치’(주진모), 그리고 조국을 버린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라는 인물을 창조해 낸 강렬한 스토리 <가비>.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라는 신선한 소재로 제작 초기부터 관심을 모아온 이 영화는 조선의 마지막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궁궐이 보이지 않고, 왕이 등장하면서도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지 않으며, 이국적인 러시아 공사관을 배경으로 클래식한 슈트와 드레스, 다양한 커피 도구들이 등장하여 동서양이 공존하는 색다른 사극이다.
감독은 조선의 독특한 시대상을 표현해 내기 위해 철저한 고증과 치밀한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또한, 시나리오 작업 및 기획기간만 3년을 거쳐 크랭크업하기까지 5개 월 여의 촬영기간 동안 전국 16개 지역 로케이션 촬영 및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경 CG소스 촬영을 포함한 160일간 치열한 프로덕션을 진행했다. 더불어, 당시 러시아의 르네상스 문물을 100% 이상 재현해내기 위해 철저한 고증과 세밀한 3D 미술 콘티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확보했으며, 조선 왕실의 커피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독특한 디자인의 ‘수동 커피 밀’, 터키식 커피포트 ‘체즈베’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커피 소품들을 수집하는가 하면, 전국의 커피 애호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 그들의 집기까지 빌려오기도 했다.
러시아 공사관과는 달리 모든 것이 좌식으로 꾸며진 실내와 일본식 검이 장식된 ‘미우라’(김응수)의 공간은 그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기모노 차림과 더해져 일본식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실제로 촬영이 이루어진 장소는 군산시의 ‘히로스 가옥’이란 곳으로, 정원부터 건물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돼 당시 일본 건축양식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또한, 고종의 접견실과 같은 동양적인 공간에서는 서양 인물들을, 손탁호텔 같은 서양적인 공간에서는 동양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확보할 뿐 만 아니라 시대적인 아이러니를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가비>의 독특한 시대 표현은 세트에만 그치지 않고, 배우의 캐릭터 구축에 필수적 요소인 의상 역시 철저한 고증으로 완성되었다. 영화 속에서 변화무쌍한 변신을 선보인 김소연은 누구보다 다양한 의상 덕을 톡톡히 봤다. 러시아 시절에는 보헤미안적 느낌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의 바리스타가 된 이후에는 바디라인이 돋보이는 단아하고 절제된 의상을 선보인다. 주진모는 날카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켜주는 일본 제복과 그의 묵직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던한 슈트 등 강렬한 의상들을 소화해 냈다.
<가비> 속 가장 특별한 의상은 ‘고종’의 백색 곤룡포. 여백이 많은 박희순의 이미지가 창백하리만치 차가운 백색 곤룡포와 어우러져 파격적이며 강렬하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국상을 치르지 않은 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공사관 내 모든 의상을 상복으로 설정한 영화적 독특함. 이러한 세심한 배려가 어우러져 화려한 러시아 공사관 이미지와 그 속의 조선인들의 시대적 아픔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영화적 깊이감을 더한다. 당시 한양에 존재했던 이국적 공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다채롭게 선보이고 싶었다는 장윤현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제작진의 공들인 미술작업으로 완성된 영화 <가비>는 관객들에게 시각적인 새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영화에서 장 감독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당시 커피 문화에 대한 표현이었다. 고종암살작전의 핵심에 있는 소재이니만큼 커피만은 특별하게 표현하고 싶어 했고, 오랜 고심 끝에 커피에서만큼은 고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고 다양한 커피 문화를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여기에 그의 전작들에서 펼쳐 보인 세련된 감수성과 모던한 연출력을 사극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며 고유의 맛이 있는 <가비>를 완성해 냈다.
“한 남자에게 <가비>는 사랑이다. 또 한 남자에게 <가비>는 제국의 꿈이다.”
'따냐'의 마지막 멘트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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