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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방에서 찾은 법열(法悅)
어둠에 잠긴남산이 눈을 맞자 희끄무레하게
되살아났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쓴 정휴가
다시 지함이 있는방을 찾았을 때,
지함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술을들이키는 중이었다.
그러나 옆에 여자는 없었다.
정휴는 말없이 지함의 앞으로 가 앉았다.
지함 역시 말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휴는 술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지함이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얼마나 술잔을 주고 받았을까?
정휴는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술잔도 지함도사방의 벽도 빙빙 돌고 있었다.
지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함이 흔들리는 것인지 정휴의 눈이 흔들리는것인지,
지함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정휴는 벽에 몸을 기대고 스르르 무너졌다.
졸음이몰려왔다.
사르륵. 사르륵.
눈 내리는 소리일까?
아니 아까 그 선화라는 기생이
옷 벗는 소리 같기도 했다.
눈을 떠야지, 눈을 떠야지.
그러나 정휴는 점점 더 깊은 잠속으로빠져들어갔다.
타는 듯한 갈증에 정휴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뜨면 기다렸다는 듯 들려와야 할
방장 스님의기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용화사에서는 늘 방장옆방에서
시자 노릇까지 도맡아 했기 때문에
한밤중에도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기억이 나질 않았다.
뒤통수가 빠개질 듯 아팠다.
자리끼를 찾으려고 팔을 움직이던 정휴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 여인이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 매끄러운맨어깨가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정휴는 방을 휘 둘러보았다.
이태백의 시구가 적힌병풍이
한쪽 벽을 가리고 있었고,
원앙금침같이 물색고운 이불이
방 한가운데에 깔려 있고,
그 안에여인이 누워 자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휴는 엊저녁,
지함과 함께 한 술자리가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함이 밖으로 나간 후 벽에몸을 기댔던 것만이
어슴푸레 기억났다.
그리고 눈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었다.
선화가 옷 벗는 소리같다고도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싸한 냉기가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어깨가 흠칫떨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가사를 모조리 벗고있었다.
정휴는 부산하게 가사를 챙겨 입었다.
정휴는 여인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여인의하얀 어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대체 이 여인과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뇌리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꿈도 없이깊은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는사이에
정휴는 난생 처음 여인의 몸을 취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함이 보낸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지함은 무얼 기대하는 것일까?
화두에 맞서서 도를구하듯
여체에 맞서보라는 뜻인가.
도대체 무얼얻으라는 것인가.
그는 그렇게 해서 무얼 얻었단말인가?
여인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하얀 어깨와 팔에소름이 돋았다.
정휴는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인이 가녀린 손으로
정휴의손을 감쌌다. 따뜻한 손이었다.
여인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윽한 눈길로정휴를 올려다보며
정휴의 손을 이불 속으로끌어당겼다.
부드럽고 따뜻한 여인의 살이 거기에있었다.
여인은 정휴의 손을 잡고 제 몸을 어루만지게 했다.
불룩한 젖무덤이 한손에 들어왔다.
오똑 선 유두가느껴졌다.
매끄러운 허리를 지나 푸근한 배 위에 손이닿자,
여인은 거기에서 정휴의 손을 놓았다.
이번엔 정휴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두툼한 불두덩, 그리고 까실까실한 거웃.
정휴의 숨결은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졌다
. 그리고아랫도리가 힘차게 일어났다.
폭풍처럼, 번개처럼.
정휴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알 수없었다.
진리를 깨쳐보겠다는 분발심(奮發心),
아마그것도 지금 정휴의 몸에 솟구치는 욕망보다
더강렬하지는 못하리라.
여인이 정휴의 가사 고름을 한 손으로 풀었다.
그리고 이불을 쳐들고 정휴의 몸을 잡아끌었다.
정휴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법열(法悅),
그런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느낌이리라
. 생사를 뛰어넘는 희열, 바로 이런것이리라.
정휴는 그대로 여인의 몸 속으로 함몰해 들어갔다.
자신의 온몸이 여인의 몸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여인의 몸 위에서 몸부림을 치며,
생과 사를 넘나들며 모든 기력을 쏟아부은 정휴는
몸을 축늘어뜨린 채 여인의 젖무덤에 머리를 묻었다.
여인은 어린 아기를 보듬듯
한참 동안 정휴의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팔을 떨어뜨린 채
어느새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정휴는 잠든 여인을 보며 조용히 가사를 챙겨입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바깥은 온통 은색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여자를접한 밤 사이
눈은 끊임없이 내렸던 것이다.
겨울 새벽의 짙은 어둠과 그 어둠을 감싸 안은
하얀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세상은
더없이고즈넉했다.
정휴는 아직 어느 누구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을밟으며 마당을 거닐었다.
가지 많은 매화나무로둘러싸인 작은 연못이
눈을 뒤집어쓴 채 정휴를맞이하였다.
그런데 웬일일까.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이 허탈감은.
그리고 패배감은.
여인의 몸을 취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이 세상 모든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여인과 떨어져 있는 지금은허무하기만 했다
. 스산한 바람이 가슴속을 훑고지나갔다.
정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어느새 일어나 자리를 치우고
한쪽 구석에앉아 있었다.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동작으로
여인은 정휴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정휴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여인을 뚫어지게쳐다보았다.
선화처럼 강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자그마하면서도 선이 고운 여자였다.
미처 단장하지못한 맨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 지함은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정휴가 반드시 무슨 일을 벌이기를 기대한 것은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괴로움으로 정휴까지 적시고싶은
짓궂은 생각으로 그리 했을 뿐.
만취한 정휴에게 기생을 넣어준 지함은
옆방에서잠을 청했다.
그러나 종일 술을 마셨는데도
공부를하다 밤을 꼬박 새운 새벽처럼
정신은 외려 맑았다.
요즘 들어 좀체 없던 일이었다.
허허. 내 괴로움으로 정휴를 적신 게 아니라
정휴가산사의 정기로 나를 일깨운 겐가?
지함은 참으로 오랜만에 선화를 물리친 채
맑은정신으로 밤을 보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만하면
온몸이 저려오던 아픈 기억들이
마치 오래되어빛바랜 서책처럼
담담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
서울에 올라온 지함이
형 지번의 퇴궐을 기다려인사를 드리자마자
양반 체면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내달린 곳은 안명세의 집이었다.
안명세는 아직 귀가 전이었다.
다른 관리들이 모두퇴청한 후에도
혼자 대궐에 남아 늦게까지 일을 하곤한다고
하인이 전해 주었다.
지함은 호롱불을 밝힌 사랑에 홀로 앉아
명세를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토닥토닥 가볍게 땅을 딛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명세의 여동생민이가
발갛게 상기된 뺨을 문 사이로 들이밀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민이의 눈동자가
샛별처럼반짝이며
촉촉하게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을 지함은보았다.
덥썩 달려가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을
지함은 간신히 억눌렀다.
"왜 이제야 오셨지요?"
반가움보다 노여움이 더 많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따지듯 덤벼드는 민이의 당돌한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않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 홀로 어두운 바닷가를서성이며
그토록 그리워 애태웠던 그 모습그대로였다.
"그동안 저는 혼처를 정했답니다."
민이가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지함의 가슴이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해도
어머님이막무가내였답니다.
제 나이 벌써 혼기가 지났는걸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민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지함은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않았다.
그저 가슴속에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거센 파도가 밀어닥칠 뿐이었다.
어느 틈에 민이가사라졌는지,
어느새 명세가 눈앞에 와 앉았는지
모든것이 지함에겐 꿈결 같고 찰나 같았다.
자신을 보고서도
멍하게 앉아 있는 지함의 손을덥썩 움켜쥐며
명세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얼마 만인가. 진작 좀 올라오지 않구서.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어본 게 처음 아닌가.
이거나만 속 태운 모양이구만.
나는 지아비 그리는계집처럼
자네를 그리워했는데 말일세.
아니, 그런데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무슨 일이 생긴 겐가?"
명세에 대한 그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보다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민이에 대한 지함의마음을 모르는 명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알면서도
민이의 혼처를 다른 데로 정해버리다니.
"자네, 대체 왜 이러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건가?
답답허이. 말 좀 해보게."
"그렇게 시치미를 뗄 건가? "
지함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명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함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겠단 말인가? "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민이가 찻상을 받쳐들고들어섰다.
"오라버니한테 소리지르셔 보았자 아실 리가없지요."
이번에는 지함이 어리둥절했다.
민이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따랐다.
은은한 차향기가 방안에 감돌았다.
"그럼, 아까 한 말은?"
"제가 화풀이를 좀 한 거지요.
그렇게 연락도없으셔 놓고
그럼 제가 아직 정혼하지 않았기를
바라셨단 말씀이에요?"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게냐?"
"아, 아닐세."
지함은 황급히 대답했다.
"제 혼처를 이미 정했노라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저 야단이시랍니다."
"흠흠."
지함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하."
화통하게 웃어제친 명세는
웃음을 그치고정색을하고 지함을 보았다.
"아끼는 친구를 매제로 삼았다가 이거
팔불출만들겠는 걸.
여태 자네한테 떠맡기려고 민이 혼처를정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당하기만 해서야 어디불쌍해서 되겠나.
안 되겠네. 민이를 힘으로라도 당할장사를
따로 찾아봐야지."
"오라버니, 그게 좋겠는 걸요.
사내 대장부가저래서야 어디에 쓰겠어요?
혼처를 정했다니까
별수없이 그리 보내고 말 모양이던 걸요."
"자꾸들 그러면 나는 그만 가겠네."
지함이 일어설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그제야 두사람의 심술궂은 농담이 그쳤다.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매듭을 지으세.
내일이라도 내가 지번 형님을 만나서
말씀을 드리겠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민이와 지함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민이의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민이의 쏘는 듯한 시선에 빨려들며
지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함의 나이도, 민이의 나이도 이미 혼기가 지났고
두 집안이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왔던 터라
혼담은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첫댓글 지함과 민이가 결혼을 하는지 시간나면
다음편 읽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