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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PD협회의 성명서에 의하면 현재 KBS PD들이 '노무현 추모 방송'편성을 위해 결사항전 하고 있답니다.
내가 설계한 사저가 아방궁이라니…
[한겨레신문] 2009년 05월 25일(월) 오후 07:54 |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정기용/건축가
“기자회견 하겠다” 간청하자 “참아라” 지붕 낮은 집을 원한 대통령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렸다. 가슴이 에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부엉이바위는 계속 내 눈 앞에 나타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나는 두 가지를 밝힌다. 한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서 바라보는 봉하마을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노 전 대통령의 자택은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하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귀향 이유로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을 권유했다.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하셨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 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뒤 일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마을 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쌀도 팔 계획이었다. 특히 마을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 시절 당신이 가까이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 젊은이들의 양식이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봉화산자락 부엉이바위 밑에 작은 동물농장을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그가 목숨을 던져 우리들에게 남긴 질문들을. 한국 현대사 속에 심연처럼 가로놓인 질곡, 멍에, 허위의식, 인간의 탈을 쓴 야수성들. 이 모든 것을 안고 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나는 순교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나는 부엉이바위 밑에 만들 동물농장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킨 채, 지금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대통령은 지금도 바로 거기에 계시므로. 정기용/건축가
기사입력 2009년 05월 27일(수) 16:27 |
너무나 무서운 대 반전
여러분들의 뇌는 정치인이나 다름없는 언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 김병준 "盧서거 하루 전 '우공이산' 액자 떼고, 뒤뜰 풀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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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류에 대한 추억하나
과거 화이트칼라 노조가 현대건설에서 처음 생긴 것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회사내에 서로의 활동을 모르는 독립된 노조를 결성하려는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1. 국내공사관리부 기술직그룹과 2. 관리직 그룹과, 제가 인사관리를 담당하던 3. 별정직과 임시직 그룹이 있었는데 1. 3.그룹은 2. 관리직 그룹에 비해 비교적 차별을 받는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내공사관리부를 중심으로한 서정의가 먼저 서울시청에 노조등록을 하는 바람에 2. 3. 그룹은 같은 날 간발의 차이로 닭쫒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었는데요.
당시 2mb회장은 부서장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강구합니다. 대충 그 대책이라는 것이 1.그룹의 노조원과 간부들을 각각 경포대로 해운대로 .... 각 지역으로 찢어 건설용역(깡패)들을 동원하여 납치해서 회유를 하다 안 되면 (돌을 매달아 .... 등의 )협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조조직원들을 모두 분리하여 격리한 것이지요.
그런데 각 층 화장실에서 건설회장(정주영 그룹회장이 아니고)의 대책회의 내용을 담은 P가 뿌려지고 당시 바로 창간된 한겨레 신문에 노조설립방해 시나리오가 기사화 되고 P를 본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원서공원에 모여 '우리의 소원은 노조... 등의 노래를 부릅니다.
결국 노조설립방해와 납치로 건설회장과 사장이 아닌 총무부장이 구속되는 장면이 각 신문의 일면 톱기사가 되고 서정의등은 무사귀환하고 세개의 그룹이 대의원대회를 무사히 치르는데, 세 노조 설립 모임이 왜 모두 같은 날 시청에 갔을까요? 그리고 왜 대책회의를 직원들이 모두 알게 되었을까요?
그 달이 한겨레 창간된 달이었으며 3. 그룹인 통신별정직 직원이 회의실 통신과 마이크 작업을 담당하며 모든 상황을 녹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건설회장 직속으로 의전과 관제를 담당하며 2. 관리직 그룹과 3. 별정임시직그룹과 4. 현대상선관리직그룹을 별도로 운영했는데, 치밀한 준비없이 불리한 처지의 국내공사관리부 기술직들이 울컥하여 설립하게 된 현대건설노조가 기폭제가 되어 현대상선에서도 직원노조가 생기고 국내 각 기업들에 화이트칼라 노조가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합니다. 물론 삼성은 꿈도 꾸기 어려웠지만....
여기서 서로 모르는 두 그룹이 없었다면 서정의등은 건설회장의 대책에 따른 협박이 무서워 회유당하거나 노조는 와해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총무부장의 부친이 고위판사직이어서 유야무야 풀려났는데.....당시 건설회장은 정주영그룹회장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시궁쥐가 되고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낮으면 머슴이하의 취급을 하는 설치류였습니다.
2MB는 국회의원직이 박탈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당선 특사로 풀려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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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무리한 표적수사이고 명백하고 전면적인 정치보복"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 / 천호선 / 2009-05-11)
재임시 동영상
첫댓글 또 눈물이 나네......
당신은 그들이 주장하는 자랑스런 5천년 역사중에 유일하게 역성혁명에 성공한 우리에 영웅입니다 존경합니다 역사는 당신을 기억할겁니다 영면하소서
▶◀ 표시는 일본인들의 謹弔 표시이고, 우리의 謹弔표시는 삼배무늬라 하여 ▒ 와 ▦ 무늬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