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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 여호와의 싹이며 땅의 소산이신 그리스도
(이사야4:2-4)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錄名)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이사야 4장 2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라고 하였다. 그 날에, 회복의 날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는 한 사회, 한 나라, 한 무리의 백성을 얻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계획 속에서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와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이사야서도 이 계획 속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다.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그리스도다.
성경은 여러 항목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였다. 모든 만물을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은 그리스도 한 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인격은 만유를 포함한다. 그 인격은 꽃으로도 나무로도, 씨로도 열매로도 표현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인격이 그리스도다. 만유가 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골3:11). 그리스도는 꽃도 되고 나무도 되며 가지도 되고 열매도 되며 뿌리도 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중심성이 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을 지으려면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설계가 있고 기술자가 있어도 소용없다. 그리스도는 그 집의 재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건축의 요소인 그리스도가 없으면 교회는 건축되지 않는다. 사람을 모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집단을 만들 수는 있어도 교회는 되지 않는다. 그 재료라야만 그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벽돌집을 지으려면 벽돌이 있어야 하고 목조주택을 지으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며 황토방을 지으려면 황토벽돌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경륜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한 사회를 건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스스로 그 사회를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통해서 당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사회를 건설하시는 것이므로 그 인간은 그 사회의 기본, 기초인 것이다.
요즘에는 100층 건물을 짓기도 하는데 앞으로는 200층짜리 건물도 짓게 될 것이다. 그런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철근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나 벽돌로 쌓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철근이 있어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주에는 조선대학교가 있는데 어렸을 때 그 건물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 건물은 벽돌을 쌓아 지은 7층 건물인데 벽돌로만 7층 건물을 짓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벽의 두께도 그렇지만 벽돌을 들이 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예 마당에 벽돌 공장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찍은 벽돌을 질빵에 지고 날라서 7층 건물을 지어 놓았다. 대단한 역사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짓기 어렵다. 그 때도 지어 놓고 건물이 기울어졌다고 말이 많았는데 지금도 그 건물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쇠로 연결해서 지으니까 100층도 짓고 더 높은 것도 지을 수 있다.
공학은 재료에 의해 발전하기도 하고 발전하지 못하기도 한다. 기술은 계속 발전할 수 있는데 문제는 재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하지만 그 계획을 이루려면 재료가 있어야 한다. 그 재료가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인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도는 중요하다.
1.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
이사야 4장 2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싹’과 ‘그 땅의 소산’에서 여호와에 대해서는 땅이고 싹에 대해서는 소산이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에게서는 싹이 나고 땅에서는 소산물이 나온다. 여호와와 땅이 모체이지만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는 싹과 소산물인 것이다.
싹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소산은 땅인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인데 이 말은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에서 나온 말이다. 하늘에서 온 것과 땅에서 나온 것이 합해진 것이 임마누엘이다. 하늘에서 씨가 떨어지면 땅에서 열매를 맺는다. 씨와 열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이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 창조자와 피조물, 하나님과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수행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이렇게 타락하고 못쓰게 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수행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바꾸셔야 하는 것이다.
잘못된 재료는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바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한 대책이 나왔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 아들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가. 여호와의 싹
‘여호와의 싹’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한 것이다. 싹은 하나님의 경륜의 발전, 하나님의 표현의 발전을 상징한다.
나무에서 싹이 났다는 것은 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싹이 나야 가지가 뻗고 가지가 뻗어야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활의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발전이며 하나님 자신의 발전이기도 하다. 하나님 자신의 표현을 어떤 상태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분의 경륜의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왜 싹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는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인격을 통해서 증가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싹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시려면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분이 인성 안에서 확장되려면 싹이 돼야 하는 것이다. 싹이 나야 가지가 나와서 나무가 뻗을 수 있다. 요즘 시골에 가 보면 칡덩굴이 엄청나게 뻗어서 사방을 다 뒤덮어 놓았다. 그것도 처음에는 솜털이 붙은 조그마한 싹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온 천지를 뒤덮고 있다.
하나님이 증가되고 확장되기 위한 수단은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확장될 수 없다. 확장 될 수 있다고 해도 스스로 확장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 안에서 확장되어야 나라가 될 수 있지 하나님은 아무리 확장되어도 나라가 될 수 없다. 이 방 안에는 공기가 많은데 이 공기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피와 살을 깨끗하게 하지만 공기가 혼자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것이 생물에게 들어올 때 필요한 것이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그분 자신이 아무리 완전하고 거룩하며 영원하시다고 해도 사람 안에서 영원하지 못하면, 사람 안에서 증가되고 확장되지 못하면 공허하게 된다. 그러므로 싹은 하나님이 인성 안에서 발전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하신 신성이 어떻게 뻗어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현실이 되고 현상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나무에서 가지가 뻗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칡 순이 나올 때 보면 조그마한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칡에서 나온 것이다. 싹이 나와야 칡이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싹을 계속 잘라 버리면 칡은 죽고 만다. 새싹이 나오는 것을 계속 잘라버리면 나무는 죽고 만다. 싹으로 뻗지 못하면 죽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신성이 신성 그대로 있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인성 안으로 뻗어서 확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뻗어간다는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 싹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막의 옮기심과 확장이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계4:2). 그렇지만 하늘에 보좌가 있으면 누가 올라가겠으며 어떻게 땅을 통치하겠는가? 그래서 이 보좌는 모세 시대에 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땅으로 내려올 때는 장막이 되었다. 그것이 성막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시내산에 내려와서 모세를 통해서 장막이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정의 중심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장막, 그분의 거처가 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땅에 장막이 세워진 이후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분은 이미 본부를 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가야 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면 성전에 가야 했다. 하나님의 거처가 옮겨왔으니까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거처는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는 성육신 안에서 말씀이 육체로 옮겨왔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한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땅으로, 사람 안으로, 인성 안으로 오셨다.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만일 하늘에 영원히 계신다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고 경배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막으로 옮겨오셨고 오늘 교회에게는 육체 안으로, 인성 안으로 옮겨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인성 안으로 옮겨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하늘’이 없어져야 교회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교회가 안된다. 그것은 옛 언약으로, 종교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신성이 인성 안으로 옮겨서 확장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 하나님이 사시려는 것이다. 하늘에 살려고 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살려고 장막을, 교회를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현주소다. 지금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신다. 과거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하늘에 계셨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계셨다.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믿는 백성 안에 거하신다. 교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한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 집을 지으신 것이다.
성육신 이전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순수하게 신성만 있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은 인성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유대교와 크게 다른 점이다. 예수님 이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니까 인성이 전혀 개입될 수 없다. 순수하게 신성만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그 하나님이 인성 안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성을 포함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도 인성이 있느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 안에 신성이 있다면 신성 안에도 인성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영원하신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하나가 된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한 것이고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 것이다. ‘독생자의 영광’은 독생하신 자의 영광이다. 오로지 거기서 나온 그분의 영광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영광은 하늘에 있는 영광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영광인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불이 번쩍하거나 구름이 덮인 것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도 번개와 뇌성이 있었고 빽빽한 구름이 있었다. 성막이 건축되었을 때도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하였다(출40:34). 그것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모르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 구름이 덮였고 그것이 그들에게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화가들이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 빛이 환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인성 안에 계신 영광이다.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어진 영광인 것이다. 독생자의 영광은 모세가 산에서 보았던 것이나 성막 위에 덮였던 것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합해진 영광이다. 이것은 인격의 영광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후광(後光) 같은 것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신성만 있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구별되지 않아서 모르니까 하나님은 신성만 있는 분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까지도 신성을 가진 분으로 올려 놓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주소를 옮기셨다는 것이고 그 주소를 우리의 육신까지 옮겨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성 안으로 오셨다. 그래서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신성만 있는 하나님과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 중에 누가 더 나은가? 많은 사람들이 신성만 있는 하나님이 더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성만 있는 하나님은 땅을 지배할 수 없다.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이라야만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은 실제적인 하나님인 것이다. 신성만 있는 하나님은 완전하고 흠이 없을 수 있지만 땅을 정복하는 데는 무력하다.
이것을 공군과 육군의 차이로 비유할 수 있다. 공군이 공중에서 폭격을 하면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아무리 공군에서 폭격을 해도 지상군이 없으면 그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 폭격만 해 놓고 점령은 할 수 없다. 비록 육군은 공군에 비해 어려움도 많고 희생을 많이 당하기도 하지만 전쟁을 하려면 지상군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로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성만 가지고는 안된다. 인성을 포함하신 분이라야 이 땅을 탈환할 수 있다.
이것이 회복이다. 인성을 가진 하나님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날과 그때, 마지막 때는 이것이 회복되는 때를 의미한다. 인성을 포함한 하나님으로서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는 때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람을 지으실 때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인성을 포함한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라 신성을 포함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신성을 포함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이 하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어 놓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을 친히 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1. 35).” 하였다. ‘예수’라는 칭호는 신성한 칭호다. 우리말 성경에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라고 번역된 이 말은 ‘구원자 여호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자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분명히 사람의 이름인데 그 내용은 구원자 여호와, 구원이신 여호와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고 ‘하나님 -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호와 - 구원자’는 ‘하나님 - 사람’이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한 말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신, 인성과 신성이 결합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임마누엘이라 불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의 이름이 구원자 - 여호와라는 것이다. 여호와 - 여호수아 - 예수로 이어지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성을 포함하신 것은 그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하나님의 위치와 경륜과 성질이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영역에서 땅의 영역으로, 신성의 영역에서 인성의 영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신성만 있는 하나님이었는데 이제 우리의 하나님은 인성을 포함하신 하나님이다. 영역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새는 공중에서 산다. 물에도 살고 공중에도 사는 것은 없다. 그런데 개구리는 물에서도 살고 뭍에서도 산다. 물과 뭍의 두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고기의 영역에서만 살고 새는 새의 영역에서만 산다. 옛날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역에만 계셨고 사람은 사람의 영역에만 있었다. 서로 건너갈 수 없었다. 그런데 성육신 안에서는 물의 영역에도 살 수 있고 공중의 영역에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온 우주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사야 4장에서는 가지를 냈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다른 영역으로 가지를 내셨다는 것이다. 나무는 햇빛을 따라 가지를 뻗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가지를 내신 것이다. 한 가지가 나오면 그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다.
“하나님도 변화하느냐?”고 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표현될 때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아브라함이 본 것과 이삭이나 야곱이 본 것이 다르다. 요셉의 때와 모세의 때에 본 것이 다르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원한 존재는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가지를 동쪽으로도 뻗으실 수 있고 서쪽으로도 뻗으실 수 있다. 필요하면 동쪽으로도 뻗을 수 있고 남쪽으로도 뻗을 수 있다. 남쪽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뻗어야 하고 북쪽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뻗어야 한다. 사탄에게 탈취당한 우주를 탈환해서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려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실 수 있어야 한다.
변화가 없으면 안된다. 적이 어떤 전략을 쓰느냐에 따라 우리도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적은 계속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서 침략해 오는데 거기 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꼼짝 못하고 당한다. 그래서 6․25때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탱크가 없었는데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탱크를 만들었고 더구나 소련제 탱크까지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육군이 아무리 소총으로 대항해도 탱크를 앞세워 밀고 들어오니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탱크 때문에 삽시간에 서울이 점령당했고 남한 전역이 점령당했다. 늦게나마 로켓포가 배치되어서 상황이 나아졌겠지만 육탄으로 탱크에 대항해야 했다. 로켓포가 없으니까 폭탄을 짊어지고 탱크 밑에 깔려 죽었던 것이다. 탱크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탱크 소리만 들어도 겁을 내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로켓포가 와서 그때부터 반격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로켓포가 없었으면 탱크를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략도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도 변신하셔야 하고 전략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만 계시면 안되니까 산으로 내려오셨고 장막으로 오셨다. 장막에만 있으면 안되니까 육신 안으로 오셨다. 사탄의 전략이 바뀌니까 하나님의 전략도 바뀐 것이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전 세계가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데 우리만 변하지 않으면 뒤쳐져 버린다.
회복의 때에 여호와의 싹은 택하신 백성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될 것이다. 여호와는 싹을 내셨고 그 싹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것은 인성의 미덕으로 아름답게 되신 것이다. ‘아름답다.’는 말은 인성을 가리켜,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영광스럽다고 해야지 하나님을 아름답다고 하면 불경스럽다.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해야지 남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이상한 것과 같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보고 영광스럽다고 해야 격에 맞는다. 아름답다는 말은 인성의 미덕을 보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인성의 미덕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에게는 인성의 미덕만이 아니라 신성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그분을 영광스럽다고 하였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런데 오늘 회복의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여호와는 싹이 되시고 그 싹은 어디로 가는가? 예수에게로 뻗었던 싹은 오늘은 교회로 뻗는다. 여호와 - 싹 - 예수 - 교회로 가지가 뻗는다. 그러므로 교회도 마찬가지로 인성으로 아름다워야 하고 신성으로 영광스러워야 한다. 인성의 아름다움과 신성의 영광스러움이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다.
교회는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답고 사람들이 볼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험상궂어서 지저분하고 더럽게 보이거나 꼴불견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성의 미덕은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미덕은 아름다움이듯이 교회의 미덕은 아름다움이다. 또한 신성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영광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사람들인데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일 때 영광이 나타난다. 인성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신성의 영광은 표현된다. 그래서 인격의 아름다움이 필요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인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표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아름답지 않은 인격에서 하나님이 표현된다면 뇌성이나 벽력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럴 때만 쓰일 수 있다. 하나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성을 내시면 벽력을 치거나 시꺼먼 구름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교회 안에는 시커먼 구름을 표현할 사람도 있고 뇌성벽력을 표현할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만 나타낸다. 어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는 저렇겠구나.’라고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할 때는 저런 모습이겠구나.’라고 알 수도 있다.
우리에게서 인성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인성이 험상궂으면 하나님도 험상궂게 표현될 것이다. 뱀을 보면 사탄을 표현하는데 왜 뱀으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뱀의 생김새가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성질이나 모양을 표현할 때 뱀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뱀같이 생겼으면 그렇게 표현된다. 만약 우리 인성의 미덕이 뱀 같다면 쓸 데가 어디 있겠는가? 사탄에게밖에는 쓸 데가 없다. 만약 우리 인성의 미덕이 독수리 같다면 독수리로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성의 미덕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워야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여자는 아름다워지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래서 화장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엄청난 시간을 아름다워지기 위해 투자한다. 그 시간은 낭비 같지만 여자로서 당연한 것이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30년 동안 계속 씻고 닦는 이유는 아름다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야만 영광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서로 깎이고 다듬어져야 하는가? 아름다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왜 아름다워져야 하는가? 우리에게서 영광이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30년 동안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다듬기도 하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퍼머를 하기도 하며 우리는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복의 때에 교회는 우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신부로 표현하였다.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로 신부라고 한 것이다. 여자는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때가 신부일 때다. 그래서 몇 백, 몇 천 만원씩 하는 드레스를 한 시간을 입으려고 빌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해가 안가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고 생각하니까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일생에서 한 번 아름답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지 않겠는가! 험상궂은 얼굴을 보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요구하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부가 수천 만원짜리 드레스를 입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이를 갈고 미워하다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성은 아름다움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지만 아름다움이 없고 사람은 영광스럽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는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날이 오면 교회는 우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이것을 새 피조물이라 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것을 계시록 마지막에서는 신부로 표현하였다.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이 신부를 묘사하기 위해서 금과 진주, 그리고 온갖 보석을 다 동원하였다. 그 보석들은 나로서는 아무리 책을 찾아보아도 어떤 보석인지 알 수 없다. 백과사전을 다 더듬어 보아도 그것이 그것 같고 그것 같았다. 열두 가지 보석들을 나열해 놓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지방에서 나오는 가장 좋은 보석일 것이다. 신부 하나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온갖 보석들을 다 동원해서 나열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새 피조물이며 교회다. 바로 우리들 자신, 우리들의 미래인 것이다. 신부는 드레스를 입기 전부터 어떤 이는 한 달 전부터, 어떤 이는 일 년 전부터 미용실에도 가고 뷰티살롱에도 가며 준비한다. 그날 하루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루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 교회는 그날 하루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다듬고 있는 예비신부다.
우리의 미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가장 영광스러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예비신부다.
나. 땅의 소산
씨가 번식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씨라도 땅이 없으면 번식할 수 없다. 하나님은 확장되셔야 한다. 하나님으로 온 우주를 지배하고 정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탄이 정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탄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 사탄의 씨보다 더 좋은 씨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요즘은 장마철이라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얼마나 무성한지 자랄 수 있는 데까지 자랐다. 잡초가 제철을 만난 것이다. 그것을 정복하려면 잡초보다 훨씬 힘이 센 씨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집 앞에 어떤 사람이 땅을 샀는데 그곳에 흙을 엄청나게 갖다 부어서 집을 지을 수 있는 평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땅이 팔리지 않으니까 여러 사람이 와서 줄을 대 놓고 콩을 심었다. 그 넓은 땅에 콩을 심으려면 한가마니는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콩은 한 개도 안 보이고 잡초만 무성하다. 그 땅에 콩이 나도록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1) 씨는 번식을 위해 땅이 필요함
하나님이 확장되기 위해서는 좋은 땅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성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여성적인 인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성적인 인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인성이다. 왜냐하면 남성인 아담은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여성적인 인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한 후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심으로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하셨다. 여성 안으로만 씨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이미 자기 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남의 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여성만이 씨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땅의 입장이다.
땅에게는 씨가 없다. 그래서 땅은 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도 자기 씨가 없는 사람이 돼야 한다. 씨가 없는 여성형 인성이 되어야 한다.
자기 씨가 있으면 안된다.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 자기의 지식이 강하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라는 씨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자신의 씨가 있으면 하나님의 씨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씨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씨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씨를 없애는 것이다. 아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씨가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아담 속에 있는 씨를 없애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다 없애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씨만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없앨 필요가 없다. 씨만 없애면 된다. 요즘에는 의학적으로 DNA 속의 핵만 없애면 다른 것을 넣을 수 있다. 신장이나 간 이식을 할 때 면역체계를 유지하게 하려고 약을 먹어서 자기의 면역체계를 억제시킨다. 밖에서 새로 들어온 장기를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새로 이식한 장기의 인자를 받아들여야 하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과 아집, 주장이나 특색 등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신장이나 간장이 쓸모없게 되어서 떼어 버리고 새로 이식을 해 놓았으니까 평생 약을 먹어서 억제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씨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
2) 여자의 후손으로 예정됨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라는 예언에 따라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 우연히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발전해서 낳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섯 여자를 통해서 발전하였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다말이나 룻, 라합이나 우리아의 아내와 같은 여자들이 나오는데 이 여자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발전, 여자의 후손들이다. 이 여자들의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왔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
예수는 ‘구원자 -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다. 옛날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 하나님이 구원자 - 하나님이 되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한 대로 마리아에게서 구원자 -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나셨다. 여자의 후손에게서 하나님 - 구원자, 구원이신 하나님이 난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여자들은 씨가 없는 여자들이다. 그들은 씨가 없는 인성을 대표한다. 남자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자로 대표되었다. 씨 없는 남자는 고자니까 여성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가 없는 여성이어야 한다. 아담으로부터 받은 씨를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
3) 신성한 생명은 인성을 통해 인성 안에서 재생산됨
신성한 생명은 인성을 통해 재생산된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한 알의 밀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씨는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땅에 떨어져서, 신성이 인성 안에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재생산되는 것이다.
신성은 인성 안에서 재생산된다. 하늘에 있으면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인성 안에 오면 재생산이 가능하다. 여자 혼자만 있어도 안되고 남자 혼자만 있어도 안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남자에게 아무리 씨가 많아도 남자 혼자 있으면 재생산이 되지 않는다. 여자에게 씨가 떨어져야 재생산된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 오셔야 재생산된다.
4) 번식과 재생산을 위해 땅(인성)이 필요함
하나님의 생명의 번식과 재생산을 위해서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필요를 모르고 엉뚱한 데 가서 “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며 기웃거리고 다닌다. 진짜 필요한 데가 있어서 오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못 들으니까 엉뚱한 데 가서 “제발 나를 취직 좀 시켜주세요. 내가 필요한 데가 없습니까?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인생이 이런데 나를 좀 채워주십시오.”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자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데가 있다. 거기 가면 환영을 받을 텐데 어째서 환영하지 않는 데 가서 사정을 하면서 ‘인생이 비참하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하고 있는가? 정말 필요한 데 가면 “이렇게 귀중한 데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내 인생은 참으로 영광스럽구나!”고 하게 된다. 자기 인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면 당장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 자기 욕심으로 어떤 것을 해 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아주 머리가 좋거나 아니면 아주 머리가 나쁜 사람이다.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이 쓰시는데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나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바보다. 그래서 보통 인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은가! 너무 머리가 좋으면 머리가 돌아서 ‘나는 무엇인가?’라고 하게 되지만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다. 그냥 하나님이 쓰신다니까 그것이 좋아서 온 사람들이다.
번식과 재생산을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우리는 땅으로서만 필요하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그 정도로만 된 인간이라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이 되어 천사 같아도 안되고 더 이하가 되어 동물 수준이 되어도 안된다. 씨를 번식시키기에 알맞은 땅 정도가 된 인간이 가장 정상적이고 좋은 인간이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인간이다.
종교 안에는 대단히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 신령한 능력을 가진 사람, 신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나는 옛날에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투시를 해서 본다는 사람도 있고 꿈만 꾸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마음을 다 안다는 사람도 있고 손에서 엄청난 능력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말 한 마디에 다른 사람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을 존경해 왔다. 그래서 다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기도를 깊이 많이 하다 보면 사람이 이상하게 달라지는데 지금은 이상하다고 말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위대하게 보였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없거나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거나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된다. 옛날에 나는 그런 것이 부러워서 쫓아다녔지만 역부족이어서 못했다. 만약 나에게 힘이 있었으면 했을 텐데 원래부터 위장이 잘못 생겨서 금식도 할 수도 없었다.
전에 할머니 한 분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신기하다. 머리는 하얗고 몸은 오그라져서 조그마했는데 얼굴에는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그 집에 가서 구역예배를 보았는데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 보고 노망해서 정신이 옳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누가 와도 이런 말을 안했는데 전도사님에게는 이 말을 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하셨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큰 성령 운동이 일어난 때가 있었다. 그때 굉장했다고 하는데 그분은 그때 분이었다. 그분은 쌀 한 되를 가지고 산으로 기도하러 갔는데 20일을 있다 왔는데도 두 끼밖에 먹지 않았다고 했다. 억지로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기도 하는 중에 취해서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있다고 내려온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평양에만 교회가 있기 때문에 평양까지 80리 길을 새벽부터 갔다가 예배를 보고 80리 길을 걸어 왔는데 오는 길에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자기 몸에는 비가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집에 들어서니까 식구들은 “이 우중에 어떻게 걸어왔느냐?”며 깜짝 놀랐지만 자기 몸에는 비가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보고 정신이 나갔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런데도 그때 나는 그 말이 믿어졌다. 하도 진실하게 말하니까 의심이 가지 않고 오히려 ‘저런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가만히 있어도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항상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을 보면 놀랍다. 썬다싱은 새들이나 짐승들과도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한 모양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믿는 이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는가! 그들에게는 아픈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고 죽을 때도 언제 어느 때에 죽는다고 하고 죽을 것 같다. 대단히 놀라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알고 보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 나라가 되겠는가? 혼자 조용히 앉아서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다면 염화시중의 미소를 띄고 있는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날에는 그것이 부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은 하나도 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벽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는 이런 인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필요하고 여러분은 내가 필요하다. 만약 내가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있다면 여러분이 여기 오겠는가? 나는 혼자 골방에 앉아서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기독교에만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모든 종교마다 그런 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꼭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놓고 보면 그런 일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행복하고 좋겠지만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다.
그분과 비슷한 분을 만나 보았는데 그분은 달덩이 같은 얼굴을 하고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고무장화 하나만 신고 다녔다. 얼마나 충만한지 불덩이 같은 분이었다. 사경회를 했는데 3일 동안 내내 기쁨에 충만해서 “설탕은 달아. 왜 달아? 다니까 달지!”라는 말만 했다. 그분도 한 번 기도를 하면 밥을 먹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견디지 못하고 나왔다. 그 목사님이 기도만 하고 밥을 먹지 않으니까 견디다 못해 나왔다. 그분 자신으로는 충만하지만 그것으로는 교회가 될 수 없고 교회가 안되면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하다.
교회를 알고 나서 보니까 모든 시각이 달라졌다. 만일 내가 이것을 몰랐다면 지금도 그런 분들처럼 되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약해서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나는 왜 그렇게 못할까?’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매일 천당에 왔다갔다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알면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알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단체적인 교회라야만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다. 개인으로는 아무리 위대해도 불가능하다. 매일 천당을 왔다갔다하는 사람이라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미 자기 혼자가 아니라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한 개인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 아무리 굉장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수백 수천 명을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불가능하다.
중공군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아무 무기도 없었다. 그들은 인해전술로 밀고 왔던 것이다. 그들과 전쟁을 했던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방망이 수류탄 한두 개씩 차고 빼갈 한잔씩 먹고 올라오는데 총구가 벌겋도록 총을 쏘아도 계속 기어 올라오니까 질려서 총을 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인해전술 때문에 우리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아무리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단체를 이길 방법은 없다.
사탄은 이미 단체화되었다. 단체적인 사회를 갖고 있다. 그러니 무슨 수로 한 사람의 신령한 힘으로 당해내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단체는 단체로 대항해야 하고 사회는 사회로 대항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은 국가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탄에게 정복된 땅을 탈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되게 하려면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능히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단체적인 사회가 필요하다.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이 등장한다. 바벨론은 사탄이 건설해 놓은 최종 작품이다. 사탄이 창세기 때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완성해 놓은 것이 바벨론이다. 그리고 그에 대항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최종 완성품이 새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큰 성 바벨론은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이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바라보고 간다. 바벨론의 멸망과 새 예루살렘의 중심성!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개인으로는 아무리 신령해도 불가능하다. 하늘을 통달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번식과 재생산을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인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비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매우 소중하다. 잘났든 못났든 전혀 관계없이 인간이라는 것, 인성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야 밭이 되고 땅이 되고 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한 인생인데 엉뚱한 데 가서 구걸하겠는가? 우리의 남편이 있는데 어디 다른 데로 시집가서 구걸하겠는가? 이미 정혼한 남편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데 가서 또 남편을 구하고 있겠는가? 조금 기다리면 신랑이 오신다. 그 사이를 못 참고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리다 보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지 못하게 된다.
5) 택한 백성의 탁월한 광휘가 되심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은 택한 백성의 탁월한 광휘가 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옛날에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을 보고 하나님 없는 백성이라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랑스러운 백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거리감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지니고 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예수다. 하나님을 자기 생명에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지니고 온 사람, 자기 자신의 성분으로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예수와 하나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지니고 온 예수, 그 사람과 하나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교회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고 그의 사심과 합하여 살아서 그와 하나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있었고 예수가 있었으며 교회가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같은 모양이지만 예수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는 백성으로, 하나는 하나님을 지닌 백성으로 구분되었다.
이것이 놀라운 변화다. 하늘의 싹이 땅을 인해서 소산물이 된 것이다. 땅이 없었으면 싹은 싹으로 있었을 것이고 영원히 소산물이 되지 못했을 것인데 땅을 인해서 소산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인성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소산물이 나오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성을 하나님을 위해서 내놓지 않으면 하나님은 땅이 없으니까 싹으로, 씨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땅을 내놓으면 거기 씨를 뿌려서 소산물이 나게 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영광은 어디 있는가? “나는 땅인데 당신에게 내주고 나면 나는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고 말하는 천재 아니면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놓고 나면 나는 무엇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흙은 백날 있어도 흙이다. 씨를 가진 이에게 바칠 때 밭이 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는 밭이 되지 못한다. 잡초 밭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인생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놓은 것은 얼마나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땅이 스스로 영광스러워지려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까 다른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라야 큰 임금, 대왕이 된다. 자기 스스로 영광스러워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 교회생활도 그렇다. 자기 스스로 영광스러워지려고 하면 남을 죽여야 한다. 남을 까뭉개고 비난해야 한다. 남을 없애야 자기가 높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을 영광스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을 알아준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생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영광스러워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우리는 영광스러워진다.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서 그 날이 올 때 택한 백성은 탁월한 광휘가 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무 쓸모도 없는 흙과 같은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을 세우시고 사탄의 왕국을 탈환하고 정복하기 위한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생을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구속하시고 다시 사용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죄의 병기로 드려질 것을 의의 병기가 되게 하시고 멸망을 위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위해서 사용될 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질 수 있는 사람으로 택함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성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