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성경 구절의 한자 성어를 공부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서 묵상하면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깊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일학교 수요예배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교회와 성경의 뿌리를 둔 삶의 자취를 뒤돌아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몸에 밴 신앙의 흔적은 매일 새벽기도를 다녔고
금요일마다 교회 뒷산에서 성도들과 함께 소나무 뿌리를 뽑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 지났지만
해마다 성탄절 추리를 만들며 추억을 쌓았고 새벽송을 돌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교회 종소리와 차임벨 소리는
한국 교회의 발자취, 그 산증인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유명한 부흥사들의 부흥 집회를 다녔고
기도원의 커다란 바위에서 남다른 기도를 하였던 삶은 오늘날까지 기도산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산행을 하면 끝없이 말씀이 묵상되고 기도가 솟아나는 인생은
어릴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니며 성경을 애독하였던 말씀 묵상과 기도의 샘터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교회를 떠나 학교 근처의 낯선 교회에 출석하면서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새벽 기도는 어린 시절 몸에 밴 신앙의 흔적이 되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거의 매일 하루 아홉번 성경을 펼쳐 읽을 정도로
성경의 말씀을 애독하면서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였고
사역자의 길에서 또 다른 풀무의 연단을 받았습니다.
오늘 새벽 자고 일어나서 고요히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창세기의 구원은 무엇인가?
출애굽의 구원은 무엇인가?
사사기의 구원은 무엇인가?
사무엘의 구원은 무엇인가?
다윗의 구원은 무엇인가?
시편의 구원은 무엇인가?
이사야의 구원은 무엇인가?
예레미야의 구원은 무엇인가?
에스겔의 구원은 무엇인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 구원의 개념이 있었는가?
스가랴의 구원은 무엇인가?
하박국의 구원은 무엇인가?
말라기의 구원은 무엇인가?
복음서의 구원은 무엇인가?
바울의 구원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구원은 무엇인가?
계시록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이비 이단의 구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통일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신천지의 구원은 무엇인가?
안식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교회의 구원은 무엇인가?
여호와 증인의 구원은 무엇인가?
몰몬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러다가 한국 교회의 구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장로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감리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침례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성결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순복음 교회의 구원은 무엇인가?
결국 기독교를 넘어서
불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구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모든 종교의 길에서 구원을 얻는다면 그 구원은 위에서 내려온 생명의 줄이 아니라
각자 자기 망상과 허상이 만든 썩은 동아줄, 그 구원의 길일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 그 인본주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결단코 맛 볼 수 없을 것서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생각, 그 대장정의 길에 올라서
구원의 서밋, 그 최정상에서 구원의 실제, 그 허상과 망상이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카페의 모든 글은
자고 일어나서 묵상할 때의 그 흔적으로 묵상의 향기입니다.
저의 글이 독특하고 표절의 흔적이 없는 것은
묵상의 힘, 그 향기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르지 않는 기도의 샘터와 말씀 묵상의 우물을 생명 나무로 가진 삶의 동산은
하늘이 공의를 뿌리고 땅이 열려서 구원을 내는 하나님의 동산,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 그 인생은
구원의 편린이 아니라 다윗의 열쇠를 가진 삶입니다.
☞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45:8)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관, 그 서정으로 넘치는 구원을
창조와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통치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서를 깊이 묵상하면......
창조와 구원을 통한 역동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메시야의 나라로 완성하는
묵시적 구원의 기쁨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은
이사야서에서 발견되는 메시야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소망의 기쁨을
구원으로 선포하지 못하고 상실하였습니다.
이사야의 구원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구원과
역동적인 구원의 감격으로 넘치는 바울의 복음마저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단과 사이비화 된 한국 교회는
구원의 실제, 그 허상과 망상이라는 인본주의 무속 신앙에 함몰되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화 된 한국 교회의 타락한 실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되어 자유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현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적 구원을 외쳤던 민중신학은
좌파 신앙의 숙주로 통일선교의 주체 신앙을 진지전으로 구축하여 기독교 신앙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는 거물급 목사들이
갸의 대부분 좌파 신앙의 기둥이 되어 적화 통일의 전위대가 되었습니다.
적화 통일이라는 주체 신앙의 구원은 한국 교회의 쓰나미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토끼몰이의 종교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작한 종교인 과세는
종교 단체를 통해 북한으로 지원되는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좌파 정부의 종교인 과세는 기독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종교 정책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고 포로가 되었어도 깨닫지 못하였던 이스라엘은
포로귀환과 성전재건의 흔적만 남겼을 뿐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와 이슬람의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그루터기마저 잃어버린 성서지대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 율법의 복을 영원히 잃어버린 본질적인 구원의 상실로
기독교의 종말론적 거울이 되었습니다.
유대교적 성서의 관점은
무속 신앙의 서낭당보다 못한 허망한 구원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절벽의 낭뜨러지에 떨어져 죽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구원의 실제는
흰놈의 골짜기요, 몰렉의 광장이며, 바알의 푸른 나무 산당이요,
종말론적인 바벨론 교회의 적그리스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와 괴벨스의 대중선동 전략은
자유 대한민국을 적화로 물들였고 기독교의 보수 신앙을 주체횃불의 불나방이 되게 하였습니다.
창비신공의 적성비격은 좌파의 대중문화를 이루었고
태극신공의 고수는 추풍낙엽이 되어 각자도생의 길을 떠났습니다.
베트남의 공산화 과정과 남미의 사회주의 길을 걷는 한반도는
좌파정부의 부역자가 된 한국 교회에 대한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대현 교회를 비롯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의 붕괴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서울의 대형교회 붕괴의 참상에 대한 역사적 거울입니다.
공산주의의 유물론과 기독교의 맘몬 신앙은 종교다원주의의 일체화를 이루어
좌파신앙은 적화통일을 위한 통일선교의 전략전술,그 부역자가 되었습니다.
침묵하는 교회는 무너지는 자유 대한민국의 방관자요,
적화 통일의 부역자가 되었으나 적화의 살생부, 그 첫 페이지가 될 것입니다.
적화통일을 위한 주체신앙의 구원관은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요, 안토니오 그람시와 괴벨스의 전략전술입니다.
한국 교회에 침투한 좌파 신앙은
말기암의 회생불능상태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칼빈주의 신앙의 구원관을 가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예레미야의 눈에 투영된 무너지는 예루살렘과 불타는 성전은 한국 교회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사태가 이지경인데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새해를 맞아 특새로 사이비 이단의 푸닥거리 종교 놀음에 미쳐있습니다.
적화통일만이 답이다는 한국 교회는
광화문 촛불 광란의 무속춤에 놀아나는 적화 통일의 구원관을 가진 사이비 이단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아닌데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미 우리로 엮은 적화통일전략전술의 올가미에 씌웠습니다.
우리 은행, 우리당,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우리 열차, 우리 식구, 우리 마을, 우리 이웃 ...등등
대중문화의 주체가 된 따뜻한 "우리"의 공동체는
적화의 진지적 구축을 위한 창비신공의 전략전술이요, 그 비격술입니다.
언젠가부터 교회에 깊숙히 들어온 공동체의 문화는
성경의 옷을 입은 좌파신앙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이단의 정체성은
때가 되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낼 것입니다.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께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1:3-4)
유다서는 천사의 타락과 가나안 땅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고라의 패역과 발람의 어그러진 길과 에녹 시대의 불의한 자를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로 다루고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된 우리의 실체는 언약의 옷을 입었지만
사람 중심의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구축하는 살가운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손에 손잡고 마음을 여는 따뜻한 찬양의 문화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외식의 옷을 입은 적화의 좌파적 신앙의 열린 통로가 되었습니다.
누가 알리요마는
진리의 말씀에 깨어 있는 통찰은 묵시적 안목을 가졌습니다.
태극기 물결의 바람에 투영되어 일렁이는 좌파적 한국 교회의 그늘은
구원의 실제, 그 허상과 망상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결국 구원의 실제, 그 진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그 협착한 길 끝에 있는 천국의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