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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면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한 대한신민단 단장, 건국훈장 독립장 2002
[ 金圭冕 ]
출생 - 사망
1880. 03. 12. ~ 1969. 02. 02. |
목차
선생은 무장투쟁 부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을 기울인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이다.
머리말
선생은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민족 종교 단체를 결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창설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첫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참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선생의 투쟁은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도 빛을 발했다. 기독교 선교사에서 항일독립군의 지도자로, 그리고 반제국주의 혁명가로서 활약한 선생의 자취는 러시아 · 만주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선교사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
백추(白秋) 김규면(金圭冕, 1880. 3. 12.~1969. 2. 2.) 선생은 1880년 함북 경흥의 빈농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 학문을 익힌 선생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쳤다. 당초 교육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교원의 꿈이 어려워지자 진로를 바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무관이 되려던 꿈도 이룰 수 없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한 일제가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하면서, 친러시아적 성향이 짙던 함경도 출신의 무관학교 학생들을 경계하며 차별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무관이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생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개항장인 원산에는 캐나다장로회와 미국 남감리교회 등에서 파견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하던 펜윅(Malcom C. Fenwick)과의 만남은 선생의 행로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펜윅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선생은 선교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전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은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새로운 문물과 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지사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 1907년 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훈춘(琿春)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 소속의 전도사로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오가며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동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대한기독교회는 1909년부터 간도구역을 새로운 정식 선교구역으로 지정하고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선생은 대한기독교회의 순회목사 자격으로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 한인사회의 민족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동휘(李東輝), 김성무(金成茂), 장기영(張基永) 등과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니,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이 그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계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 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아 해외 한인사회를 망라한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사관학교의 설립은 그와 같은 원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예상과 달리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동휘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했고, 선생도 이에 동참해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후 노골적으로 종교적 탄압을 시도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며 직접적으로 종교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에 따르면,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했고, 일제 경찰들도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기독교회가 일제 종교탄압에 굴복하면서 포교규칙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선생은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이끌고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종교 활동을 통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생 입장에서 일제의 포교규칙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을 만든 것인데, 당시의 심경을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김규면 선생의 비망록(『老兵 金圭冕의 備忘錄에서』)
“독립교회를 선언하는데 찬성하는 300여 교회이고 인원으론 불과 3만여 명이었다. 노약을 제하고 좀 의식 있는 사람 2, 3백 데리고 독립교회 감독으로 행세하면서 전조선 예수교회 독립운동을 하려고 힘써 보았다. 얼마 안 되어 총독부 포교규칙이 발표되었다. 이 규칙은 교회일꾼 목사로부터 매서인까지 다 총독부 승인받은 자로서만 일하게 하였다. 그때 영어선교사들은 총독부 규칙을 복종하고, 총독부에 행사하였다. 영어선교사를 반대하고 교회독립운동 할 좋은 기회였다.”
선생이 대한성리교회를 조직한 것은 일제의 우회적인 탄압에 타협한 외국 선교사 교단의 한계를 깨닫고 ‘교회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데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훈춘현 초모정자(草帽頂子)에 교단 본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1917년 블라디보스톡에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결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8년 3월 연해주 한인사회는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와 항일의병의 상징인 홍범도(洪範圖), 이동휘 등 중국 ·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은 훈춘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 유동열(柳東說), 이인섭(李仁燮) 등은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때 선생은 한인사회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독교 목회자로서 창당 가입을 유보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동휘와의 오랜 동지적 관계, 그리고 한인사회당을 통한 항일투쟁 방략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이듬해 한인사회당에 참가하게 된다.
1918년부터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하자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일본군에 맞서 싸울 항일무장단체 조직에 전력을 기울였다.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 이후 선생은 훈춘 초모정자에서 대한성리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3월 12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창설되었음을 선언했다. 대한신민단의 공식적인 창설일은 1919년 3월 12일이지만, 선생은 그 이전부터 대한신민단 창설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는 1918년부터 한인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어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白軍)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백 명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기에는 그에 앞서 인적 · 물적 자원 기반을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 상당한 준비 기간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대한신민단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창설의 준비 과정이 있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곧 대한신민단 창설을 공포한 것이었다.
생은 대한신민단 강령을 통해 “조국(祖國)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며, “민족(民族)의 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하고 국부적(局部的) 당파(黨派)와 불공평적(不公平的) 야심(野心)을 박멸”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민단문답(新民團問答)’을 통해 단체의 기원과 이름을 ‘신민회(新民會)’에서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대한신민단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대첩 등에 참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연해주 해방전쟁을 통해 독립을 꿈꾸다
1919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선생은 대한신민단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한인사회당과 대한신민단,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이 참석한 이 당대회에서는 3개 단체의 통일 연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선생은 대한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에 동의하고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의 결정에 따라 선생은 만주에 위치한 대한신민단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연해주 내 독립군 부대를 지원하는 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1919년 5월 김경천(金擎天)이 연해주 수청(水淸, 현재 러시아 파르티잔스크)지역에서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창해소년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명예단장에 취임했다. 창해청년단은 수청지역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 때 명예단장으로서 부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고 볼셰비키 당국과 교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0년 7월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곧이어 연해주로 돌아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사회당은 1920년 설립된 극동공화국의 초대수상인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의 후원을 받으며 극동공화국에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고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부대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한인사회당 군사부 위원장이었던 선생도 한인 무장부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1921년 6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의해 체포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마자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사용할 의류와 약품 등의 물품을 준비하고, 아무르주 당국과 독립군 부대 수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블라고베셴스크에 머물던 차였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체포를 면했지만,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블라고베셴스크의 신문에 모함 기사를 게재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 될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오하묵(吳夏默) 등의 이르쿠츠크의 한인사회주의자들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인사들이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교섭해 만든 단체였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사할린부대, 대한의용군)와 독립군 통합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에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지를 받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던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었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의 보호를 받아 위기를 면했으나, 선생은 곧 이어 자유시참변 소식을 듣기에 이르렀다.
자유시참변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장기영, 이용(李鏞), 한운용(韓雲用) 등과 함께 이만(현재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만은 극동공화국과 백군 정부의 분계선 지대로 자유시에 있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힘이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홍일(金弘壹) 등이 군비단(軍備團) 군사부를 개편해 만든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선생이 이만으로 건너간 것은 자유시참변 이후 연해주 지역에 남아있는 무장부대들을 새롭게 재편하여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1921년 9월 고려혁명의용군 간부들과 자유시에서 이동해 온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은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를 재편했다. 이 때 선생은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당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사령관에 선정된 이용은 고려의용군사의회 산하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했다. 대한의용군은 1921년 12월 초 이만전투를 시작으로 연해주 해방전쟁에 투입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6연대와 연합해 인정거장 전투, 볼로차예프카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중국 혁명을 지원하며 제국주의에 맞서다
1922년 연해주에서 철수를 결심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 해 11월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빨치산부대들을 무장해제 시킨 뒤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남 · 북만주나 중국 관내로 떠나기 시작했다. 선생도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영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선생이 상하이로 향한 것은 러시아 내전 종결 이후 변화된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 관찰원 자격으로 참석한 것으로 확인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創造派)가 구성한 조각에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으나, 선생은 주로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이후 선생은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선생이 중국 혁명운동을 지원한 것은 한국의 해방은 중국 혁명운동과 분리해서 볼 수 없고,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연대하고 단결해야만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4년 4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안에서 윤자영(尹滋瑛)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했다. 상해청년동맹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데 뜻을 두었던 개조파(改組派)에 참여한 이들이 주로 참여한 단체로 국제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선생은 이동휘 등과 연락하며 중국 군벌 타도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던 북벌전쟁(北伐戰爭)을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로 온 한인들과 노동자들을 광동(廣東)으로 보내는 일에 힘썼다.
1924년 5월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 대리(代理)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주요 업무는 통신연락이지만, 이외에도 재정자금의 모집 등도 담당했다. 그 해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통총장 대리직을 맡고 있던 선생이 소련 당국과의 교섭을 맡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 정부로부터의 자금 지원 요청 교섭은 실패했다. 그 해 12월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1925년 2월 상하이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중국인 여공을 학대한 것을 발단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고조되었다. 5월 30일 상하이에서 반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향해 영국 경찰이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하자 중국 각지에서 파업과 영업중단,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는 중국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시위로 확산되어 중국 내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중국 학생계와 혁명가들과 연대활동을 펼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상회청년동맹회를 통해 중국 학생계와 긴밀히 연락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노력했다.
1925년 중국 학생계와의 연대 방안을 모의하기 위해 열린 상하이청년동맹회 연석회의 도중 선생은 피습을 당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청년이 일본 정탐을 찾는다는 구실로 연석회의장에 난입해 선생을 구타하려는 순간 이용이 이를 막았다. 이 때 연석회의 참석자들과 난입한 이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난입자들이 발사한 총탄을 맞고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후일 이 사건을 두고 선생은 보이틴스키(Voytinskiy)와 화요회(火曜會) 인사들이 협동으로 벌인 ‘파시스트’적인 행동이라고 회고했다. 이 짧은 일화는 국외의 민족운동 간의 파벌 싸움을 보여준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그 해 11월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한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로 보내고, 이용과 함께 한인들로 구성된 북벌지원 군대를 만들어 광동으로 파견하며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결렬시키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선생은 중국을 떠나 연해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러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수여받은 공훈서(1933년 12월)
노보데비치 수도원 제131구역에 위치한 묘소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선생은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는 한편, 연해주 지역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러중앙집행위원회(ВЦИК)는 1933년 12월 원동 해방 10주년을 기념해 연해주 해방전쟁에서의 선생의 공적을 포상했다. 이 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 프셰니친이 선생을 체포하려 했다. 프셰니친은 지난 1921년 고려혁명군정의회 인사들과 함께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선생은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연해주를 벗어나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공훈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라보츠나야 모스크바』에 게재된 기사에서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1934년 10월 9일)
모스크바로 이주한 1934년 이후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선생이 머물던 소련 내에서 변화된 정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Stalin)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5년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지도자들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때 선생의 셋째 아들 김인덕도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에 거주하던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흐루쇼프(Khrushchyov)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스탈린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된 많은 이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고, 이 때 연해주 해방전쟁에 참여했던 한인 지도자들도 복권되었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선생은 1967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러시아혁명 50주년을 기념해 적기훈장을 수여받고, 1969년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선생의 유해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그 공훈을 인정받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은 체홉, 흐루쇼프, 가가린 등 소련의 정치 · 문학 ·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맺음말
선생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 등과 같이 광범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일관된 노선에 의해 추구되었다. 그렇다고 선생은 독립군 대장과 같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최이붕(崔以鵬)은 선생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위에만 있던’ 인물로 평가한 바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지도적 위치에 머물기만 한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부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부대를 조직했으며, 독립군 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인적 및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누구보다 앞장 서 나간 지도자였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 했을 때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일본 제국주의와 맞설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 통합운동이 좌절된 후에도 다시 군대를 정비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 나갔고, 러시아 내전 종결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부대 조직에 앞장섰다. 선생은 무장투쟁의 부대를 만들며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을 기울인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글 오세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부
http://www.mpva.go.kr 제공처의 다른 책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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