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걷이 / 조영안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서둘러 식사를 챙겼다. 농장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지난번에 겪었던 벌레와 모기의 공격이 생각나 긴 옷으로 완전무장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 남편과 함께 농장으로 향했다. 물, 모기약, 장갑, 모자 등 챙길 것도 많다. 어머니의 작은 손수레는 필수다.
가을향을 머금은 공기는 싱그럽고 상쾌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들판 곳곳에서 들려오는 예초기 엔진 소리도 정겹기만 하다. 은근히 느껴지는 풀잎의 향기에도 흠흠 취해본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참깨를 베려고 준비했다. 어머니는 손수레를 밀고 지난주에 무씨를 심어둔 곳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장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남편은 차에서 기다리다 깻단을 싣고 갈 참이다. 막상 혼자서만 일하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넓다란 천을 깔아놓고 하나, 둘 깨를 베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훌쩍 자란 나뭇가지와 기세등등하게 자란 풀이 눈에 거슬렸다. 내년부터는 이렇게 깨를 베는 일은 없을 거다 생각하니, 한 알 한 알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벌써 익은 깨는 하얀 깨알을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냈다. 아까워도 주워 담을 수 없다.
일주일 전 어머니께 슬며시 부탁했다. “어머니, 배추와 무 심는 시기인데 올해는 무만 심었으면 해요.” 사실 나는 무를 어떻게 심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가져오는 것을 먹기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워 둘 계획이었다. 이제 일손을 거의 놓은 어머니는 은근히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럴게요.” 하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토란대도, 깨도 베어야 해. 깨는 베는 시기가 늦어서 썩어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며 당장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지난주, 남편이 쉬는 토요일에 맞춰 농장으로 향한 것이다. 늘 깨끗하고 반질반질했던 농장이었는데 내키보다 자란 풀과 나무 때문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야생 들깻잎이 자라 농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다행히 예초기를 준비해 간 남편이 길을 만들었다. 마치 우거진 들깨 숲을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얼렁뚱땅 옷도 대충 입고 가서 벌레와 모기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병원도 다녀오고 며칠을 고생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는 새로 준비해 간 무씨는 그대로 두고 지난해에 받아 둔 묵은 씨를 심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새 씨앗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한고집 하는 시어머니기에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아이들 우산만큼 넓은 토란대 잎으로 비를 피하면서 마무리했다.
농장을 다녀온 며칠 후 무 씨앗이 발아가 되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걱정하셨다. 혹시나 싶어 집 앞 작은 공간에도 뿌렸는데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다며 다시 심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다시는 밭에 못 가겠다.”며 반 엄포로 걱정을 대신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이제는 무리일 것 같았기에 오늘 밭에 다시 온 것이다. 부지런히 참깨를 모두 베었다. 자랄 대로 자란 튼실한 토란대도 제법 많이 모았다. 다시 무씨를 심던 어머니 ‘토란대는 속대를 남겨 두고 베어야 한다, 참깨는 열매가 있는 데서 잘라야 한다'며 끊임없이 일러 주었다. 잘라서 버린 토란대 잎을 보고는 “에구구, 저것을 버리다니. 다시 좋은 것만 골라 챙겨.”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월 대보름날 먹었던 토란대 나물이 생각났다. 다시 주워 모아 차에다 실었다. 풀숲에 숨어 있던 노란 참외 세 개와 새들의 공격에도 견뎌 낸 봉지 속의 배 두 개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남편의 도움을 받아 쪽파도 심었다. 배추를 심지 않은 건 처음이라 아쉬워하며 농장을 대충 정리했다. 오늘 심은 무는 초겨울에 뽑는다. 그때 어머니도 올 수 있을까. 함께 와서 옆에서 지켜만 봐 주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농장에는 못 올 것 같은 어머니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이곳은 어머니의 놀이터였다. 하루 종일 밭에서 지내며 자연을 벗삼아 즐겁게 농작물을 키웠다. 손끝이 야물고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였다. 이 작은 농장도 그동안 당신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기에 꾸려갈 수 있었다. 감나무, 배나무, 사과, 천도복숭아, 자두, 포도 그리고 매실 나무 100여 그루가 이 농장의 주인공이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우거진 나무 밑에는 잡풀 하나 없이 늘 깨끗했다. 손수 풀을 하나하나 정리했기에 매실 수확철에 오는 일꾼들은 깨끗한 밭을 보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는 도시락을 싸서 열 정거장의 시내버스를 타고 거의 날마다 농장으로 출근했다. 철따라 곡식을 심고 가꾸고, 거둬 들였다. 일솜씨가 일품이라 밭곡식들은 알차고 풍성했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하나하나 곡식들만의 마무리 또한 중요하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구니 속 곡식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머니는 한꺼번에 후다닥 수확하지 않았다. 작은 참깨나 들깨도 한 알 한 알 모으니 어느새 한 자루가 되었다.
지난주에 베어 온 참깨와 토란대도 벌써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최근에는 기력이 떨어져서 농장에 못 가니까 집 앞 작은 땅에다 완두콩을 선두로 녹두랑 고추, 생강, 쪽파를 심었다. 대보름도 먹는 피마자도, 요즘 올라오는 여린 잎을 모으고 있다. 밭에 못 갈 만큼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서 내 마음도 심란해진다.
올해 봄, 매실 철에는 함께 했다. 작은 의자를 옮겨 가며 나무 밑에 달린 매실도 따고 선별도 도와 주었다. 그리고 초여름날 양파, 마늘을 마지막으로 거의 일손을 놓았다. 그 이후 어머니 발길이 끊겼는데 불과 몇 달 새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밭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한 번도 와 보지 않아서 미안했다. 앞으로 이 넓은 농장을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걱정되었다. 밭곡식을 짓지는 못해도 풀은 그래도 관리해야 하는데 말이다.
벌써부터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올해 마지막 가을걷이라고 생각하니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