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世 백당(栢堂)공 휘 준식(準植) 유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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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수몰 직전의 자양면 용산리를 백암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계천(溪川)<옛이름 호계(虎溪)>의 오른쪽이 인구마을이다.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신 마을이며,
모재공(21世)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살았다.
그 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고,
백당공(29世)께서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일생을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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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건설로 수몰되었던 조부 경암공(휘 진우 27世)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 사셨던 집터가 나타났다.
이 터에서 부공 용헌공 남매분이 태어나셨고,
백당공 3남 3녀분 남매분께서도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 집은 고가(古家)로 백형 송당공께서 마을 입구의 밭에 새로 집을 지어
옮기고 그 자리는 체소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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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이듬해 1946년 백당공께서는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하셨다.
처음 사서 거주한 집이 자양경찰지서 옆의 ‘ㄱ’ 자형 6곡 기와집이었다.
사진의 왼편의 창고 같은 흰 건물 오른쪽에 몇 집 건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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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집을 사서 사시던 집을 자양경찰지서 사택으로 양도하고
큰집 앞밭에다 초가 4간 겹집과 아래채 3간을 지어 사셨다.
위는 수몰 후 나타난 집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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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모습이다. 백당공께서 농사짓던 논이 들판의 끝자락
자호정사 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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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오고가던 부관연락선의
한 종류의 모습
백당공께서 20여세에 이와같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건업을 창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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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공의 어머니이신 하양할매의 60대 중반 때 아들 딸 5남매와 친외손들이
모여 생신잔치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당공은 그때 일본에서 귀국하여 참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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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가토구미(加藤組)토건회사를 경영하셨던 시절 일본에서 어린 장남 병집, 차남 병업, 장녀 병옥과 유학 중인 큰집 장질 병호와 같이 찍은 가족사진이다.
병옥의 돌 기념사진으로 추측된다.
그 후 삼남 병섭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사남 병협은 귀국하여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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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지기갱협화회중견간부양성강습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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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5월 13일 일본서 친목회 참석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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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청부업, 고물상업, 금은동철업을 취급하는 회사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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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자당(慈堂)께서 돌아가시자 아들 3형제분은
3년상 내 상주의 의복을 입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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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계안(三棣稧案)과 삼체계재경록(三棣稧財經錄)이다.
삼형제(송당공, 백당공, 죽당공)분을 위한 후손들의 계모임을 아우 죽당공과 협의하여 삼체계를 창계(創稧)하는 큰 역할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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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공의 처가인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의 오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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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공의 중귀미 대양골 배위와 합폄한 묘소.
공의 휘는 준식(準植 29世), 자 이도(而道). 호 : 백당(栢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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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공의 60대의 존영 배위의 32세때의 존영
1.가계(家系) : 시조공의 28세손이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13세손 이고,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의 11세손이고, 모재공 휘 중교(重喬 21世)의 8세손 이며, 자언공 휘 일필(一鉍 22世)은 7대조되시고. 휘 하주(夏澍 23世) 농와공은 6대조이며. 5대조는 휘 성휴(性休 24世)이시다, 고조부는 휘 유명 (裕明 25世)이시며, 증조부는 휘 치선(致璇 26世)이시고. 조부는 휘 진우 (鎭禹 27世)이시며, 아버지 휘 연석(淵錫 28世) 용헌공과 어머니 하양 허씨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2.생몰(生沒) : 정미1907년 1월 4일 생 - 임자1972년 11월 24일 졸 (향년 66세)
o배위 월성 손씨 : 무신1908년 12월 12일 생 - 정해1947년 12월22일 졸 (향년 40세)
3.배위(配位) : 월성 손긴이(孫緊伊) 父 병화(秉和) 祖 만영(晩永). 曾祖 상직(相直).
귀국하여 4년 되던 해 출산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작고하셨다.
4.성품(性稟) : 개척정신과, 결단성, 추진력이 강하고, 대인관계가 원만 하셨다.
그러기에 독신으로 일본 땅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창업의 위업을 달성하셨다.
5.효성(孝誠)과 우애(友愛) : 1919년에 부공(父公)께서 45세로 별세하셨을 때. 송당공은 20세
백당공은 13세. 죽당공 10세였다. 백당공은 그 후 성장하여 유가의 후예로 예의범절의 실천
에 힘썼고,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형제자매 간의 우애가 깊으셨다.
1)홀로되신 어머니를 극진이 모셨고, 일본에 있을 때 몇 차래 귀국하여 어머니와 형제자매
와의 상봉의 정을 나누셨고, 어느 해는 온가족 동반 귀국한 일도 있다. 자당(慈堂의 기념사
진도 촬영해 드렸다.
어머니 생신 때는 아침은 큰댁에서 점심, 저녁은 기차(其次)집에서 하였다.
2)1951년 2월 5일 어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6.25전쟁으로 큰집이 불에 타 없어 차남 백당공
의 집에서 여막을 차렸을 때 영위를 극진히 모셨고, 다음해 큰집에서 불탄 집터에 아래채
를 복원하여 여막을 옮겼으며, 초상부터 대상 까지 삼형제분이 3년 상을 전통상례법에 맞
게 내셨다.
6.공적(功績) : 명석한 판단력, 피나는 노력, 원만한 인간관계로 세파(世波)를 헤쳐 나가셨다.
1)일제강점기인 20대에 과감히 맨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토건회사에 취업하여 신용을 얻
어 가토구미(加藤組)토건회사를 창립하여 성업(盛業)으로 성공하셨다.
그리고 친척들을 데려다 많이 취업도 시켰다.
2)큰집 장질 병호(炳浩)를 일본으로 데려다 소학교 5,6학년 2년 과정과 고등소학교 2년간의
공부를 시켰다.
3)1945년 조국해방으로 겨울에 온가족이 귀국하여 처음 신용산의 경찰지서 옆에 ‘ㄱ’ 자형
6곡 기와 집을 구입하여 정착하셨다.
4)해방 후의 정부 수립전이라 국가질서가 바르지 않아 환전(換錢)에 애로가 많았다. 그 후
소일 삼아 면내의 소규모의 토건공사도 맡아 하셨다.
5)해방의 혼란기의 우리나라는 귀국동포 등으로 일터가 없어 실업자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실업자구제방침(失業者救濟方針)’을 주창하셨다.
6)1948년 경 신용산의 주택을 경찰지서에 양도하고 인구마을 큰집 앞에다 초가 4간 겹집형
의 몸채와 아래 채 3간을 지어 사셨다.
7)대한청년단 자양면 단장으로 좌우(左右) 충돌기에 면민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큰 공을 새워
많은 주민들의 생명의 은인이 되셨다.
8)1972년 1월 2일 삼형제(송당공, 백당공, 죽당공)분을 위한 후손들의 계모임을 아우 죽당공
과 협의하여 삼체계를 창계(創稧)하셨다.
7.영농(營農) : 아우에게 일본서 번 돈을 보내어 논밭을 사두었다가 환국 후 농사를 지으셨다.
8.묘소(墓所) : 삼귀리 대양골, 형 송당공 묘소 아래쪽에 있다.
배위 묘소는 처음 용산리 광연산에서 그 후 부공(夫公) 묘소에 화장 합폄하였다.
9.자손(子孫) 4남 1녀.
o장남 병집(炳集). 配 경주 김주(金周), 父 석윤(錫允) 祖 인상(仁祥).
*손자 창기(昌基), 配 순천 박정희(朴貞姬). 부 영규(榮圭). 조 노학(魯鶴).
*손자 보문(普文), 配 고성 이영미(李英美). 부 진기(鎭琪) 조 동흠(東欽).
*손자 성문(盛文). 配 전의 이선럐(李善禮). 부 수광(秀光), 조 학출(鶴出).
o차남 병업(炳鄴). 配 영양 남휘혜(南輝惠). 父상세(相世), 조 찬수(瓚洙).
*손녀 미라(美羅), 夫 평산 신상대(申相大). 부 동철(東澈).
*손녀 순기(順基), 夫 여강 이해원(李海源) 부 석명(錫溟).
*손녀 소희(素姬), 夫 능성 구명환(具明煥) 부 소달(小達)
*손녀 연희(連姬), 夫 경주 김영욱(金泳旭)
*손녀 형민(亨珉), 효경(孝京).
o3남 병섭(炳燮). 配 인동 장순자(張順子). 父 세계(世界). 조 병건(炳建).
*손자 관기(寬基) 配 동래 정명주(鄭明珠) 父 한옥(韓玉), 祖 임술(任述)
*손자 진욱(珍旭) 配 강릉 최서형(崔徐熒) 父 원순(元洵), 祖 종오(鍾晤).
o4남 병협(炳協) 출계(出系) 配 경주 최현숙(崔賢淑), 父 차봉(且奉).
*손녀 성혜(盛惠), 지혜(智惠).
o장녀 병옥(炳玉) 配 김해 김재명(金在明) 父 성희(晟熙).
*외손자 김대진(金大鎭).
*외손녀 김소영(金素瑛), 김소라(金素羅).
9. 택호- 미재 (현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
<자료정리> 질 병극(姪 炳極)
첫댓글 제가 어렸을 때 영천 아제집 지붕을 초가에서 기와로 고치는데 조금 거들어 드렸다고
할아버지께서 칭찬해 주시던 인자한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 납니다.
언어도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 땅에 누구의 도움도없이 혼자 뛰어드셔 토건업을 찰업하신 백당 숙부님의 유사를 정리하면서
고개가 숙여졌다. 영웅도 때를 잘 타고나야 하드시 그때 정세가 도움되지못하여 환국하셔 큰 뜻을 접으신것이 한탄스러웠다.
자주 이야기로만 전해듯던 내용을 사진과 같이 보게되고
존영사진에서 주위 친척분들의 얼굴도 느껴져 신기함도 같이 느껴지네요^.^
시골 첩첩 산중에서 어떻게 일본으로 가서 사업을 하셨는지 큰형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공부를 하신일
대단하신 용기와 지혜라 생각되어 지면이나마 존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만 본문을 읽으니 기골이 장대하신 외모에 걸맞게 기개도 대단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6.25사변후 만연필 수류탄 사고로 손가락 다쳐 긴급치료하고 지서옆 저근할아버지댁에서 동내 어른들께서 걱정하며
위로하신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낌니다,
하양할매 돌아가시고 초하루 삭망 지내때면 저근집에서 음복하고 월연 원산댁집에 갈려면 겨울 바람에 저가 어려서 이기지 못하고 늦게 집으로간 기역이 생생하고, 우리앞집에서 5,6학년때는 인동,주례아재와 같이 사랑방에서
같이 자고 놀기도했지요,
타국(일본) 생활하시면서 아버지 교육에 힘셔주신 저근 할아버지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드립니다.,
편히 영면하시고 극락왕생 하소서.
10여년전 일본연수시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에치코유자와를 방문 했을 때 아버지동급생의 아드님의 안내로 작은할아버지께서 사셨던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의 집은 개축되어 사라진지 꽤 되었고 할아버지를 기억 하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폭설속에 찍은 사진이라 깨끗하지는 아니하였지만 연수에서 돌아와서 작은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보여드린적이 있습니다. 작은할아버지 덕분에 저의 아버지가 일본에 가셔 공부하셨고, 저 또한 그 곳을 방문햇었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멀리 이국땅에서 사업을 하시고 또한 큰아버님을 초청하여 교육하셔서 집안을 위한 크고 사려깊으신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할아버지 역사를 사진과 글로 일목요연 하게 잘 정리해주신 능계아제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울러 어려운 시절에 창업과 개척정신으로 귀감이되신 할아버지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제삶의 철학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둘 째 적은 할아버지는 어릴 때 자양 우리집 바로 앞집에 사셔서 자주 뵀던 것 같은데 아른하게 기억어 납니다.
적은 할머니는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사진으로 뵙네요.
윗대 어르신 들께서 우애를 보여 주셔서 아버지 사촌 들과도 참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아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노황 아제도 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