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기회이다. 요한복음 19:1-6
새동산교회 주일낮 예배(종려주일) Apr/09/2006 황종상 목사
우리는 지금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고난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저는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새벽에 깨어나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새벽기도회 하려고 깨고, 하나는 스포츠가 있을 때 보려고 깹니다. 스포츠를 참 좋아합니다. 한번은 축구를 보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가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좀 비키라고 했더니 축구가 더 좋으냐? 내가 더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하기를 이 시간만큼은 그런 질문하지 말고 좀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중에 뉴스를 통해 결과만 알면 되지 뭘 그렇게 보느냐고 그럽니다. 그것은 저를 아직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스포츠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과에 대한 느낌이 크지 않습니다. 그 아슬아슬한 장면을 보고 난 다음에 승리한 감격은 결과만 알고 좋아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있습니다. 남들은 장애아라고 놀릴는지 몰라도 부모에게 있어서 그 아이는 세상을 주고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할 때 고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한 결과물입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를 때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고난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고 나서야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얻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늘 성전에 가서 기도했지요.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가하면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줄 알고 술 먹고 기도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브닌나라는 여인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닌나는 누구입니까? 한나의 남편 엘가나의 첩이 브닌나입니다. 그러니까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두 명의 아내가 있으면 서로 친하지 않습니다. 친할 수가 없지요. 어떻게 친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한나에게 브닌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브닌나가 착해서 “기도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아이를 낳을 거예요.” “우리 사이좋게 잘 지내봅시다.”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 일은 없었겠지요. 그래도 한나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브닌나가 적당히 악해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브닌나라는 여자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한나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브닌나는 우리삶속에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 속의 브닌나를 무조건 나쁘다고 하지 말고 “저 사람이 저렇게, 저 정도로 악하고 무례하고, 저렇게 내 마음을 찌르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내가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능력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화가 아니라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말에 쓰레기차 피하려다 무슨 차 만난다고, 고난을 없애달라고 피해가면 그것이 없어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정면대결을 해야 합니다. 고난을 그냥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도망한 곳이 외삼촌 라반의 집입니다. 그곳에 가서 양을 쳤습니다. 많은 재산을 증식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라헬 준다고 해놓고 레아주고, 7년 기다리라 해놓고 14년 기다리게 하고, 양도 너 가져라 해놓고 빼앗고, 만일 라반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가나안을 떠나려 했겠습니까? 거기서 그냥 살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시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기에 어려움의 자리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를 성공시키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사울이었다면 다윗이 과연 나왔을까요?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까? 왕이 국정이나 돌보아야지 한사람을 죽이려고 그렇게 독을 품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사울이 좋은 왕이었다면 다윗이 다윗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시고 다윗을 높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오히려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만일 핍박이 없었다면 성도들은 그곳에 안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핍박이 닥치니까 흩어졌습니다. 흩어져 무엇을 했습니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이 없었다면 아마 강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이 세계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교회에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주로 이북지역에 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그 지역에 안주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6.25전쟁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흩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이북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서울 영락교회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한국이 복음화 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도시 어느 지역 어느 섬에도 다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 유라굴로라고 하는 큰 폭풍을 만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폭풍을 주십니까? 만약에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없이 로마에 도착했다면 로마에는 바울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간 적이 없습니다. 바울의 인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같은 상황을 하나님께서 아시니까 그냥 로마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276명의 사람들을 통해 바울을 돕도록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폭풍을 만났는데 머문 곳이 멜리데라고 하는 섬입니다. 그곳에 석 달을 있었습니다. 석 달 동안 바울과 함께 그들을 있게 하시고 특별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배는 손상이 좀 있겠지만 너희들의 생명은 안전하니라.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그들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다시 한 번 우러러보게 된 것이 아닙니까? 만일 바울이 태풍을 만나지 않고 그냥 로마로 갔다면 그들은 바울을 우습게보았을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행28:16을 보십시오. 로마에 도착해 보니까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어떻게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로마에 오자마자 바울을 돕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미리 붙여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에 메리케이라는 화장품 회사가 있습니다. 기초화장품부분에 있어서 판매1위입니다. 2000년 매출액이 25억 달러,우리 돈으로 2조5천억입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가장 일하고 싶은 미국의 100대기업, 여성이 일하고 싶은 미국10대 기업으로 포춘지가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세계를 감동시킨 메리케이의 성공신화”라는 책으로 우리나라말로 번역된 책이 어문각에서 나왔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고급화장품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창업자가 메리케이라고 하는 여자인데 1963년 그의 나이 45세에 화장품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녀의 철학을 보면 이렇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표정을 밝게 하라. 하나님 먼저, 두 번 째는 가족, 직업은 그 다음, 휴가 계획 세우듯 인생을 설계하라, 남성 중심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 칭찬하고 또 칭찬합시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화장품회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한 회사에서 25년 동안 일했습니다. 아주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양육하고 훈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남녀차별이 심했습니다. 자기가 양육한 남자가 어느새 자기보다 월급이 2배가 되고 자기의 상관이 되어있더라는 것입니다. 별 능력도 없는데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이 2배가 되고 자기의 상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뛰쳐나와 화장품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장품 회사를 만든 이유가 어떤 집에 놀러갔는데 그 집 식구들 피부가 너무 좋더라는 겁니다. 왜 피부가 좋은가를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준 것을 발랐다고 하더랍니다. 그 아버지는 화공약품을 취급하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부분은 주름이 지고 늙어 가는데 이상하게 손만은 팽팽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도 발라보고, 얼굴에도 발라보니까 피부가 팽팽해지고 노화된 피부가 회복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비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화장품을 만들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아 회사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대우로 인해서 뛰쳐나와 회사를 만들었는데 성공했습니다. 분명히 기회는 고난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많은 고난들이 있는데 그 고난 때문에 잘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20살밖에 안 되는 청년이 고난 때문에 견딜 수 없어요. 그러면 어른들이 웃습니다. 젊은 목사가 목회하는데 고난이 너무 많아요. 그러면 연세 드신 목사님들이 아직은 멀었어. 하면서 웃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내 평생 이런 고난은 처음당한다고 말해봤자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나름대로 고난이 커다는 것이겠지요. 자기고난은 늘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시간으로 놓고 볼 때 그리 길지 않습니다. 고난당하는 게 짧은 사람은 1년, 2년이 될 수도 있고, 긴 사람은 5년 1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그래도 견딜만했습니다. 제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인데 아이를 낳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결혼 후 7년 동안은 병원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부목사 사례비로 병원 다니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시간이 그냥 추억으로 지나갔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그래도 견딜 만 한 것입니다. 고난 뒤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보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고난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고난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평소엔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련이 오면 그제야 가치가 나타납니다. 누가 애국자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느냐 그것을 보면 압니다. 평소에는 누가 교회를 사랑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누가 그 자리에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영광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않았다면 부활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영광은 고난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은 소득은 의미가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난 다음 누리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는데도 고난이 있습니까? 영광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절망하시지 마시고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면서 승리의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