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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7권
15. 교수품[2]
[견도(見道)의 일어남]
그의 순서대로 난(煖) 등의 여러 지위를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견도(見道)의 일어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의 집착을 멀리 여의어서
세간을 뛰어남이 더 위가 없다.
분별이 없고 때를 여읜
이 지혜를 이때에 얻는다.
[釋] ‘두 가지의 집착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두 가지의 집착은 소집과 능집이니 서로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간을 뛰어나서 더 위가 없다’고 함은 위없는 승을 얻었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다’고 함은 곧 두 가지 집착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때를 여의었다’고 함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멸하여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그때에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서 법안정(法眼淨)을 얻었다고 이르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는 곧 전의(轉依)로서
초지(初地)를 얻었기 때문이다.
뒤에 한량없는 겁(劫)을 지나야
의(依)가 청정하여 바야흐로 원만하다.
[釋] ‘이는 곧 전의로서 초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함은 곧 이구지(離垢地)이니, 이는 곧 보살의 전의의 지위이다. 왜냐하면 초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 의(依)가 매우 청정합니까?
[답] 뒤에 한량없는 겁을 지나야 의가 청정하여 바야흐로 원만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처음이 매우 청정함을 얻은 것은 아니다.
뒤에 한량없는 아승지겁을 지나야 이 의가 바야흐로 청정 원만함을 얻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그때에 법계를 통달하여
남[他]과 자기의 마음이 평등해진다.
평등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다섯 가지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釋] ‘그때에 법계를 통달하여 남과 자기의 마음이 평등해진다’고 함은
보살이 곧 초지에서 평등한 법계를 통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통달로 말미암아 능히 남의 몸이 곧 자기의 몸임을 관하였으니, 또한 마음이 평등함을 얻었다.
[문] 이때에 몇 가지의 마음이 평등함을 얻습니까?
[답] 평등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다섯 가지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무아(無我) 평등이니, 이른바 자기와 남이 서로 이어짐에서 내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고(苦)가 있는 평등이니, 이른바 자기와 남이 서로 이어짐에서 고가 있는 것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짓는 것의 평등이니, 이른바 자기와 남이 서로 이어짐에서 고를 끊고자 함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구하지 아니함의 평등이니, 이른바 자기와 남의 짓는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報)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한가지로 얻는 평등이니, 다른 보살들이 얻는 것과 같이 내가 얻는 것도 또한 그러해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행은 헛되이 분별하지만
청정한 지혜는 둘이 없음을 요달하여
해탈하여 멸한 것을 보는 것,
이와 같음을 견도(見道)라고 말한다.
[釋] ‘모든 행은 헛되이 분별하지만 청정한 지혜는 둘이 없음을 요달한다’고 함은
이 가운데서 보살이 삼계(三界)에서의 모든 행은 오직 참이 아님을 분별하여 보지만 극히 청정한 지혜로써 그것이 둘이 없음을 요달하는 것이다.
‘청정한 지혜’라 함은 세간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이 없다’고 함은 두 가지의 집착이 없기 때문이니, 둘이 없는 체는 곧 법계이다.
‘해탈하여 멸한 것을 보는 것, 이와 같음을 견도라고 말한다’고 함은
이른바 견도에서 소멸되는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고, 법계는 곧 해탈이다.
견도에서 번뇌를 해탈하였을 때 보살이 처음으로 견도를 얻었다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무의 체와 같은 체와
자기 성품을 합하여 세 가지가 공이라 하니
이 세 가지의 공을 알면
이를 말하여 공을 안다고 이른다.
[釋] ‘세 가지의 공’이라고 함에서
첫째는 무체의 공이니, 이른바 분별의 성품은 그 모양이 체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같은 체의 공이니, 이른바 의타의 성품은 이 모양이 분별의 성품과 같아서 체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기 성품이 공한 것이니, 이른바 진실의 성품 자체의 공이 자기의 체이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보살이 공한 해탈의 문을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연(緣)은 모양이 없어서
모든 분별을 다 없앤다.
이 가운데 무원(無願)의 인연은
참이 아닌 분별이 다한다.
[釋] 이 게송 중 위의 두 구절은 무상(無相) 해탈의 문을 나타낸 것이고,
아래의 두 구절은 무원(無願) 해탈의 문을 나타낸 것이니,
마땅히 이 가운데의 보살이 세 가지 해탈의 문을 갖추어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때에 얻은 것의 법은
일체 보리의 분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보살은
한가지로 얻은 것이 견도와 같다.
[釋] ‘일체 보리의 분’이라 함은 이른바 네 가지의 염처(念處)이다.
보살이 견도를 얻을 때에 또한 이 법을 얻는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상을 깨달으면 오직 제행뿐이요,
무아(無我)요, 오직 고(苦)의 집착뿐이다.
뜻이 없어 자아(自我)가 멸하고
큰 뜻은 큰 나를 의지한다.
[釋] ‘세상을 깨달으면 오직 제행뿐이요, 무아요, 오직 고의 집착뿐’이라 함은
보살이 모든 세간은 다만 제행뿐으로서 실제로는 내가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생이 계착(計着)하는 것은 오직 고에 집착할 뿐이다.
‘뜻이 없어 자아가 멸한다’고 함은 이른바 염오의 신견(身見)이 멸하여 없어졌기 때문이다.
‘큰 뜻’이라 함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큰 나’라고 함은 모든 중생으로써 자기를 삼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보살은 자아의 견을 없애고 큰 나의 견을 의지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일을 짓는 것이니, 이를 큰 뜻으로 큰 나를 의지한다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내가 없는데 다시 나를 보고
괴로움이 없는데 또한 극히 괴롭다.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갚음을 구하지 않아
이로써 자아를 이롭게 한다.
[釋] 이 가운데 여러 보살이 ‘내가 없다’고 함은 이른바 자기의 몸이 없는 것이니, 아(我)를 보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나를 본다’고 함은 이른바 남의 몸이 있는 것이니, 큰 뜻의 나를 보는 것이다.
‘괴로움이 없다’고 함은 이른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극히 괴롭다’고 함은 이른바 남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갚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함은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곧 자아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 보살들이 중생을 이롭게 할 때에 곧 자아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따로 바라는 것이 없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가 해탈하는 마음이 최상이고
남의 결박됨도 또한 굳고 넓어서
괴로운 것이 가히 다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마땅히 부지런히 지어야 한다.
[釋] ‘자기를 해탈하는 마음’이라고 함은 이른바 자기가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번뇌를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다.
‘최상’이라고 함은 이 해탈이 위없는 승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남의 결박됨이 곧 굳세고 넓다’고 함은 일체 중생들이 서로 이어져서 일으키는 것의 번뇌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괴로운 것이 가히 다할 수 없다’고 함은 중생 세계가 끝없어서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부지런히 지어야 한다’고 함은
중생들이 이와 같이 괴로우니 보살이 마땅히 중생들을 위하여 괴로운 편에서 짓는 것을 끊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지어진 것은 다시 지어서 마땅히 쉬어서는 안 된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괴로움을 스스로 참지 못하는데
어찌 남의 갖가지 괴로움을 참겠는가?
이 생과 생이 다하도록
자신을 뒤집는 것을 보살이라 이른다.
[釋] 중생들은 일정 기간에 있어서 괴로움을 내고 생사가 다하도록 가히 사의(思議)할 수 없는 괴로움을 내기에 이를 참고 받을 자가 없는데,
이 보살은 그들의 능히 참고 받을 수 없는 것을 뒤집어서 다 능히 그들을 위하여 참고 받는다.
그러기에 자신을 뒤집는 것을 보살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게송으로 말한다.
남에게 평등한 사랑을 행하여
그들을 이롭게 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으니
희유(希有)한 것이 희유가 아니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기를 이롭게 함이다.
[釋] ‘남에게 평등한 사랑을 행하여 그들을 이롭게 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함은
보살이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한 사랑을 행하여서 마음에 차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즐거운 이익을 구하거나 만일 즐거운 이익을 행하거나 만일 행함을 구할 때에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에 뒤로 물러남이 있지 않은 것이다.
‘희유한 것이 희유가 아니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 함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 일이어서 모든 세간에서 희유한 것이 최상이다.
그런데 이 희유는 또한 희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이 이익을 얻을 때에 곧 보살이 스스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나머지의 지위를 수도(修道)라고 말하며
두 가지 지혜로써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하니
분별이 없는 것과 건립이며,
청정한 법과 중생이다.
[釋] ‘나머지의 지위’라 함은 이른바 뒤의 아홉 가지 지위이다.
[문] 나머지의 지위에서 무엇을 닦습니까?
[답] 두 가지의 지혜로써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것이다.
두 가지의 지혜라 함은 하나는 분별이 없는 지혜이고,
또 하나는 건립하는 지혜이다.
분별이 없는 지혜라 함은 이른바 출세간의 지혜이고,
건립하는 지혜라 함은 이른바 후득(後得)의 세간의 지혜이다.
[문] 이 두 가지의 지혜는 어떠한 공능이 있습니까?
[답] 청정한 법과 중생이다.
이 가운데 분별이 없는 지혜는 부처님의 법을 성숙시키는 것이 그의 공능이요,
건립하는 지혜는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 그의 공능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수도의 지위에서 두 아승기겁을 지나고서야
최후에 직위(職位)를 받게 된다.
저 금강의 정(定)에 들어가서
온갖 분별을 깨뜨려서 다 없앤다.
[釋] ‘수도의 지위에서 두 아승기겁을 지나고서야 최후에 직위를 받게 된다’고 함에서
두 아승기의 겁이라 함은, 이른바 제2와 제3의 큰 겁의 아승기겁이다.
‘최후’라고 함은 이른바 구경의 닦음이다. 이 수도의 지위에서 바야흐로 직위를 받게 된다.
[문] 직위를 받고서는 다시 무엇을 짓습니까?
[답] 금강의 정에 들어가서 온갖 분별을 깨뜨려서 다 없앤다.
[문] 무슨 뜻으로 인하여서 금강의 정이라고 이릅니까?
[답] 분별의 혹과 수면(隨眠)의 혹을 이 정에서 능히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정을 금강에 비유하여 이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전의(轉依)가 구경에 청정하여
일체종지를 성취한다.
여기에 머물러 짓는 일은
다만 여러 중생들을 이익하게 함이다.
[釋] ‘전의가 구경에 청정하다’고 함은 이른바 일체의 번뇌장과 소지장을 길이 여읜 것이다.
‘일체종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이른바 일체종지를 얻는 것이니, 위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기에 머물러서 짓는 것의 일’이라고 함은 이른바 이 지위에 머문 것이요,
중생들의 생사의 즈음을 궁구(窮究)하여 성도(成道)를 나타내 보이고 열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문] 이 일은 무엇을 위하는 것입니까?
[답] 다만 여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일은 한결같이 다만 일체의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승의 교수로 큰 뜻과 이익을 얻음]
이하부터는 대승의 교수로 인하여 큰 뜻과 이익을 얻음을 밝힌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니(牟尼)의 높으신 분은 보기 어려운데
항상 보아 큰 뜻을 얻었다.
무등(無等)의 법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청정히 하여 마음을 자양(資養)한다.
[釋] 이 게송은 보살이 대승의 교수로 인하여 항상 현전(現前)에서 부처님을 보게 되고,
무등의 바른 법을 들어서 항상 극히 깊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에 변만(遍滿)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처음의 때에 큰 뜻과 이익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교수하는 가운데 있다면
법문에 머물고자 함과 같이
사람을 험하고 어려움에서 건져냄과 같이
부처님의 권고함도 또한 이와 같다.
[釋] ‘만일 교수하는 가운데 있다면 법문에 머물고자 함과 같다’고 함은
어떤 보살이 교수하는 가운데 있어서 혹은 여래의 법문에 마음으로 좋아해서 머물고자 함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을 험하고 어려움에서 건져냄과 같이 부처님의 권고함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함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있을 때에 어떤 이가 능히 머리털을 잡아당겨 높은 언덕으로 멀리 던지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권고도 또한 그러하여서 만일 보살이 적멸의 깊은 구덩이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모든 부처님 여래가 강제로 능히 부처님의 과위인 높은 언덕에 두는 것을 여기서 밝혔다.
다음에는 큰 뜻과 이익 얻음을 밝히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간에서 극히 청정한 눈으로
뛰어나게 깨달아서 분별이 없으니
비유하면 큰 해가 솟음에
어둠을 없애고 세간을 밝게 함과 같다.
[釋] 만일 모든 보살이 부처님을 이룰 때에는 일체 세간의 법을 길이 물리친다. 그러기에 눈이 가장 청정해짐을 얻는다.
그때는 분별이 없는 뛰어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비유하면 해 바퀴가 크게 솟아서 능히 어둠을 덜어 없애고 세간을 비추어서 밝힘과 같다.
이는 마침내 큰 뜻과 이익 얻음을 밝힌 것이다.
[한 게송으로써 앞의 뜻을 종합함]
이와 같이 널리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한 게송으로써 앞의 뜻을 종합하여 맺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불자(佛子)가 착함을 가득 모아
극히 넓은 정을 성취하여서
항상 높은 이의 교수를 받으면
능히 공덕의 바다를 궁구한다.
[釋] 이 게송은 글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교수품」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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