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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24
주간조선 2013년 3월 4[2246]김용규 철학자·‘철학카페’ 시리즈 저자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기독교는 물질생활의 풍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에 저항한다.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사진>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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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65DF24550E119E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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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세상에 공개했다. 김용철 변호사 이름으로 개설된 비자금 계좌에 김 변호사가 모르는 현금이 50억원 이상 보관되어 있었다. 김 변호사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임원들의 계좌에도 10조원대의 비자금이 나뉘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를 지낸 김 변호사는 삼성그룹에 입사한 뒤 기업구조조정본부 법무팀 등에서 약 7년간 일했다. 2004년 8월 법무팀장을 끝으로 삼성에서 나온 그는 3년 뒤 사제단과 함께 삼성 비자금 폭로 기자회견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삼성 비리에 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0일에 특별검사 수사도 시작됐다. 사제단이 삼성 눈 안의 가시가 되었던 이른바 ‘삼성 비자금 사건’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유신체제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온 가톨릭단체다. 이 단체는 1974년 7월 민청학련사건으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어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9월 26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성되었다. 이날 발표된 ‘제1 시국선언’에는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의 전면 무효화,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 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 등의 요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사제단은 1975년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공개,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 발표, 1981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성명 발표,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사건 폭로를 주도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의 불을 지폈다. 1970~1980년대에 주로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에 주력하던 사제단은 1980년대 말부터는 통일운동으로, 1990년대 들어서는 교회쇄신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새만금 갯벌과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65일간의 삼보일배에서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에 이르는 환경운동을 벌이며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이번 질문에서 ‘천주교의 어떤 단체’라고만 언급했을 뿐, 사제단을 콕 집어 지목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제단이 시국선언과 함께 요란하게 출범한 것이 1974년이고 이 회장이 타계한 시점이 1987년이다. 그렇다면 이 회장이 질문을 던질 당시 사제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지목한 단체가 사제단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제단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는 데다, 가톨릭 역시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주교 어떤 단체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는가’라고 요약되는 이 회장의 질문을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는가’로 바꿔서, 이 문제를 보편적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관건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과 미덕이 무엇이고, 그것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간략하게나마 조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은 무엇인가 당신도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16세기 이후(특히 1776년 3월 11일자 ‘버밍엄 가제트(Birmingham Gazette)’가 보도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가동으로 발발된 산업혁명 이후) 중세의 봉건영주제도를 밀어내고 정착한 근대사회 특유의 사회경제체제를 일컫는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중엽에서야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경제학자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초기에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당시의 경제체제를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867년에 출간된 책 ‘자본’과 그의 속편 격인 ‘잉여가치학설사’에서 그것이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사회질서’라는 점을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용어를 두 차례 사용했다. 그리고 그 특징으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상품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을 정확히 지적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무엇이라는 정의를 내리진 않았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나름대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예컨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를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모든 정의가 그렇듯이,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한마디로 만족할 만하게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대로 “자본주의는 머리가 백 개쯤 달린 변화무쌍한 히드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이후 쏟아진 학자들의 다양한 정의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들이 존재한다. 사유재산제도의 인정,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경쟁주의,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주의, 모든 재화가 상품으로 생산되어 시장에서 교환되는 시장경제, 노동력의 상품화 등이다. 따라서 모든 자본주의 체제 안에는 이 같은 특성들이 낳은 장단점이 각각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강점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한 자유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회에 양질(良質)의 저렴한 재화(財貨)가 풍부하게 공급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런 일이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의해 이뤄진다고 했는데, 이와 연관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959년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을 방문해 맨해튼의 슈퍼마켓에 들렀을 때 일이다. 그는 모스크바 상점의 텅 빈 매대와는 달리 온갖 신선한 음식들로 가득 찬 진열장들을 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물었다. “뉴욕시의 빵 공급을 누가 책임지고 있습니까? 그 관리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닉슨이 한 대답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답은 질문보다 정확히 183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이미 해 놓았다.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의 박애정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처럼 잘만 작동하면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직(self-organization)처럼 작동해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 낸다. 이 회장이 생각한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인데, 세상에는 대가 없는 점심이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모든 여성들은 쾌락에 초대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가진 단점으로 우선 ‘분배의 불평등에서 기인한 빈부의 격차’를 든다.(이 회장이 지적한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하는 일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또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무계획적 생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공황이나 실업’도 든다. 그렇지만 윤리적 또는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체제의 치명적 약점은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한 자유경쟁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성에 있다. 영리주의와 자유경쟁의 바탕에는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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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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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사람들이 “사슴이 신선한 물을 갈망하듯이 부르주아의 영혼은 유일한 부(富)인 화폐를 갈망한다”면서,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인 타이몬’에 나오는 시구(詩句)를 인용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 비도덕성을 풍자적으로 비난했다. “금, 황색의 휘황찬란한, 귀중한 황금이여!/ 이것만 있으면 검은 것도 희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악한 것도 착하게 천한 것도 귀하게, 늙은 것도 젊게,/ 겁쟁이도 용감하게 만들 수 있구나./…/ 이 물건들은 당신의 제관이든 하인이든 모두 다 끌어갈 수 있으며,/ 아직 살아있는 병자의 머리맡에 베개를 빼가기도 하나니”가 그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자신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에는 ‘탐욕의 철학’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면·신용·시간 엄수·절제와 같은 가치가 들어 있고, 그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근거했다는 것을 주장했다. 옳은 말이다. 자본주의 정신에는 분명 그런 윤리적 요소가 들어 있었고, 그것이 프로테스탄티즘에 바탕을 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초기 자본주의에 한해서 그렇다. ‘산업자본주의’로도 불리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때문에 사회는 에너지와 관련된 중공업을 육성하고 도로, 철도, 항만, 각종 통신 시설, 교육 등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하부구조를 확립해야 했으며, 상품 제조를 위한 기계와 공장 등의 생산체계를 구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노동자들에게는 산업 노동에 필요한 규범으로 성실·근면·절제·시간 엄수 같은 윤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소명의식’과 ‘금욕주의’로 무장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 의해 고무되고 진척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테스탄트에서 금욕주의가 사라졌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미덕들이 사라졌다. 또 생산 시스템이 완전히 가동되고 과학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자 생산성이 부단히 증가해 공급이 점차 수요를 넘어섰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부터는 소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독일의 경제학자 어네스트 만델이 이름 붙인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자 자본주의는 자체 생존을 위해 생산보다 소비, 절제의 윤리보다 욕망의 충족을 강조하는 소비 이데올로기를 창출해냈다. “모든 여성들은 공식적으로 쾌락에 초대되었다”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와 같은 ‘68혁명’의 구호들이 그대로 후기 자본주의의 강령이 되었다. 성(性)에서 소비로 대상만 바꿨을 뿐이다. 그 결과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고발한 ‘소비사회’가 열렸는데, 신용카드를 발급하고 유행과 광고를 통해 탐욕을 부추기는 소비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다. 차츰 모두가 ‘빚을 진 인간’, 곧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명명한 ‘부채 인간(The Indebted Man)’으로 전락했다. 요컨대 오늘날 자본주의는 인간을 ‘탐욕의 노예’로, 사회를 ‘생산과 소비의 지옥’으로, 자연을 그에 의해 ‘강탈당하는 피해자’로 몰아가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기독교와 충돌한다. 과일을 버려라. 그러면 손을 빼게 될 거야 신약성서에는 ‘탐욕’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우리말 관주성경에 ‘탐심’으로 번역되어 있는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그 뜻이 본디 재물이나 권력 등을 ‘보다 많이 원함’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플레오넥시아를 ‘소유에 대한 저주스러운 사랑’이라고 이해했고, ‘남의 것을 갖고 싶어하는 해로운 욕망’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로마의 노예였지만 놀라운 정신력과 뛰어난 인격으로 후기 스토아철학의 거두가 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안에 좋은 용례가 있다. 그는 우리가 탐욕을 버려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스토아철학의 심오한 지혜를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예화로 표현했다. “입구가 좁은 병 속에 팔을 집어넣고 무화과와 호두를 잔뜩 움켜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생각해보라. 그 아이는 팔을 빼지 못해서 울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과일을 버려라. 그러면 손을 빼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너희의 탐욕도 이와 같다.” 플레오넥시아는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라는 예수의 교훈에 누가는 이 단어를 사용해 예수의 뜻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하는 탐욕스러운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16~21)라고 경고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골로새서 3:5)라고 가르쳤는데, 우상숭배는 신구약성서를 통해 모든 악의 어머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탐욕을 ‘콘큐피스켄치아(concupiscentia)’라는 라틴어로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콘큐피스켄치아는 신으로부터 돌아선 죄의 결과로서 인간이 그것이라도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매달리는 욕망이다. 그래서 독일 출신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에 비견했는데, 프로이트에게 있어 리비도는 죽음을 원할 만큼 강렬한 성적 욕망이다. 틸리히가 탐욕을 리비도에 비견한 것은 단순히 그것의 강렬함만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병리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탐욕을 일종의 병적 증세로 규정하고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그중 흥미로운 점은 탐욕과 변비 사이의 연관관계이다. 프로이트는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돈에 집착하는 콤플렉스와 배변 콤플렉스를 결합시키는 것은 무척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임상에서는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정신분석을 해본 의사들은 누구나 신경증 환자들의 습관성 변비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치료하기 힘들고 오래된 증상이 이 치료법으로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환자의 돈에 대한 콤플렉스를 다루어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려고 유도해야만 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요컨대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똥마저 아끼려고 하기 때문에 악성 변비에 시달리는데, 그 같은 변비는 소유욕을 버려야만 고쳐진다는 말이다. 독일 출신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도 ‘존재의 기술’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소유에 대한 탐욕이란 똥뿐만 아니라 죽음과 연결된 열정적 욕망으로 정신병적 증후군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소유지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대부분 물건뿐만 아니라 힘이나 감정, 생각, 시간 등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아끼려는 정열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심지어 성생활에서도 정액을 아끼기 위해 그 횟수를 조절하는데, 상당수 남자들의 발기불능이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탐욕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과 현대 정신분석학의 귀결이 서로 맞아떨어진다. 즉 탐욕은 도덕적·종교적 죄악일 뿐 아니라 정신병리학적 증상이다! 자, 이제 여기에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기독교는 물질생활의 풍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에 저항한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는 자본주의 윤리와 기독교 교리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아퀴나스가 어떤 물건을 그것의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는 것이 죄인지를 묻고 그에 스스로 답하는 대목이다. 시장경제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의 값이란 그것이 지닌 가치와 상관없이, 판매자가 요구하고 구매자가 지불하는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동안 우리 독서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킨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바로 이것을 문제 삼았다. 샌델은 2004년 허리케인이 플로리다를 휩쓸었을 때 평소 2달러에 팔던 물주머니를 10달러에 판 것이 정의로운 일인가를 물었다. 샌델의 대답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 아퀴나스는 같은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누구든 어떤 것을 그것이 지닌 가치 이상으로 사고 싶지는 않을 것인데, 예수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고 교훈했다. 때문에 물건을 그것의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는 것은 죄다. 내 생각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답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을 치유할 수 있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ekly.chosun.com%2Fimages%2Fendmark.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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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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