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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2월 29일(수) 오후 4시
참석: 고춘식(전 한성여중교장)
이종재(서울대명예교수)
박재순(씨알사상 연구소장)
홍성환(전 종로학원강사)
박재순: 요즘에 한국교육문제가 아주 심각하게 제기되고 계속해서 언론에서도 보도되고 있습니다. 귀한 선생님들을 모시고 ‘한국교육의 근본문제와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이며 재단법인 씨알의 이사이신 이종재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다음은 한성여중 교장을 지내셨고 교육계의 실천적 활동가로 전교조 활동을 하시는 고춘식 교장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고 교장선생님은 생활시조를 쓰는 분으로도 유명하십니다. 끝으로 홍성환 씨알님은 씨알재단 운영위원이며 심도학사 이사이시고, 정치적인 문제로 교사생활을 못하게 되어서 20여 년 동안 입시학원인 종로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오신 분입니다. 홍 씨알님은 씨알정신에 사무쳐 아이들에게 씨알교육을 시키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면 1 교육의 근본문제 2 문제의 원인 3 학교교육의 상황과 현실 4 해결 방안 5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한국교육의 근본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교육현장에서의 경험과 함께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종재: 주제는 거창하지만 편하게 생각하고 논의의 말문을 열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있어야할 바른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의 근본문제도 교육이 가져야 할 이상적 모습에서 벗어난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이 있어야 할 바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정리된다면 문제가 무엇인지도 저절로 드러나리라 여겨집니다.
교육의 근본문제를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인 학교교육의 문제로 본다면, 현재의 학교교육은 지나치게 경쟁원리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인 학교가 서로 경쟁하는 전쟁터가 되어 있다면 이러한 경쟁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교육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 학교본연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고춘식: 존경하는 이 교수님의 말씀에서 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거의 나온 듯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이 너무 과잉되어 있으면서 진정한 교육은 소멸되고 있는 역설이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교직에 39년 정도 몸담았고, 지금도 교육과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교육을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말만 생각납니다. 우리 아이들이 교육 현장에서 받는 것보다 오히려 빼앗기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우리 교육이 착취하는 구조라는 생각까지 들지요. 그리고 교육의 본질에서 너무 떨어진 비겁이 판치는 구조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 학교도 많이 있습니다만, ‘교육다운 교육’을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교육’으로 돌아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과잉 경쟁 논리에 매몰된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는 학생들뿐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되어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지요. 경쟁은 필요하겠지만 경쟁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점령해 버리는 비참한 상황에 우리 교육을 더 내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홍성환: 우리가 교육을 말하면서 근본문제를 말해야 할 정도로 교육계의 현실에서 병적인 요소가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자살과 폭력 등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육은 ‘사람답게 잘 살자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게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1등을 해야 살아남는 것으로 여겨지도록 경쟁원리가 과열되어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최고의 덕이고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과학정보 등의 지적인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정신과 도덕, 양심의 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가르칠 구조도, 선생도, 열정도, 방법도 없는 것이 문제겠지요.
이번 대담을 위해 함석헌 선생님께서 교육과 관련하여 쓰신 글을 몇 편 읽었습니다. 함 선생님께서는 사제정신이 죽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영혼이 죽은 교육은 근본방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대두되는 학교폭력문제도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도덕적 인간을 길러낸다면 해결되리라고 생각됩니다. 학교교육의 목적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없기에 근본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요.
박재순: 교육을 통해 사회적 경쟁력을 고양시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근본과제일 것입니다. 사람됨의 근본은 정신과 혼이 바로 서는 것이고 정신과 혼이 물건이나 몸보다 위에 있음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과 혼이 빠진 능력과 힘은 흉기가 되기에 폭력과 자살로 내몰리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교육의 근본문제는 어디서, 왜 발생했는지 그 원인에 관해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홍성환: 사회가 물질만능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물질적 풍요를 잘 추구해야만 능력 있다는 가치관이 만연하고, 교육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명문대 입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족한 삶을 사는 수단이기에 학교교육도 명문대에 많은 학생을 보내려 입시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왜 공부하느냐?”고 물어보면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인간답게 살고 봉사하는’ 가치관이 아닙니다. 제가 씨알모임을 통해 만난 학생들 중 어떤 학생은 ‘사람 됨’이란 말을 20살이 되도록 처음 들었다고 했습니다. 학원뿐만 아니라 학교도 물질지향적인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기에 ‘사람 됨’을 가르칠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가치관에 막혀 ‘사람 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지요.
고춘식: 요즈음을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교육에 열정을 가진 분들마저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픕니다. 교육의 본질을 걱정하는 분들일수록 더욱 절망감을 느끼고 있지요. 사실 교육만이 아니라 종교·정치·경제도 하나같이 불가능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종교·정치·경제와 마찬가지로 교육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가 혼자만으로 쇄신될 수 없듯이 교육도 혼자만으로는 교육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의 교육 현실에선 아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우리 교육에서 어떤 희망을 읽기가 어려우니 안타깝습니다. 가르침이 사무침으로, 그리고 깨우침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는 눈앞에 경쟁에만 급급하게 되니 희망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홍성환: 학교폭력문제를 경찰에 의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들은 자신들에게 권한이 없다고 변명하고 기소 당함을 억울해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된 참회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박재순: 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정치·종교·교육이 불능이라는 말씀은 정곡을 찌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나라 전체 교사가 40만 명 정도라고 하면 그중에서 기독교인 교사가 약 10만 명은 될 터이고 그들이 기독교 정신에 사무쳐 있다면 뭔가 달라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종교도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종재: 홍 씨알님 말씀 중에 왜 공부 하냐는 질문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너무 솔직하고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진 답변입니다. 교육을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물질·권력·명예 등을 확실히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길러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교육의 논리를 규정하는 세상의 논리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사는’것은 상대적 관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상대적으로 잘 먹고 잘 살려면 서열경쟁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일부 앞서는 몇몇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경쟁에 뒤쳐진 대부분은 잘 먹고 잘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뒤처지고 낙오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는 교육의 기능이 왜곡되고 교육이 해야 할 영역이 한쪽으로 편중되고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 말이 바로 교육의 근본문제를 진단하는 키워드가 되면서 동시에 교육의 좌표를 찾아내는 키워드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을 상대적으로 ‘잘 먹고 잘살기’위한 것으로 본 것이 교육의 가치와 기능을 축소, 왜곡시킨 것이라면, 참된 교육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면 상대적 관점과 대칭되는 관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적 관점의 대칭점은 절대적 관점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잘 먹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이와 대칭되는 것은 절대적이고 정신적인 ‘잘 사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여기에서 교육의 구체적인 틀이 나올 것입니다.
함 선생님 말씀 중에 교육을 인간과 사회의 연관 속에서 규정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의 맥락이 중요합니다. 교육이전의 인간은 가능성만 있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교육은 ‘상대적 가능성’의 존재를 절대적 ‘실존적 존재’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을 기능위주로 보고 모든 것을 상대적 존재에서 만 파악하고 한쪽만 강조하다보니, 정신과 혼이 빠져 교육이 왜곡되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가능성의 존재란 마치 알과 비슷하고 알은 병아리로 깨어나야 합니다.
유영모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몸나에서 제나로 그리고 얼나로 존재모양이 바뀌는 맥락에서 본다면 교육의 활로가 생길 것 같습니다.
홍성환: 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육은 사람을 길러 하느님께 바치자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거룩한 생명인 씨알이고, 이 씨알을 싹틔워 하느님께 바치자는 것이 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함 선생님 말씀처럼 교사는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직업인이 아니라 혼을 바쳐 아이들의 혼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박재순: 정신을 깨우고, 혼을 일으키는 교육을 해야 마땅한데 왜 그걸 못하는 걸까요? 잘 못된 것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교육의 이념과 철학이 잘 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사회가 잘못된 목적과 가치관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다석 선생님은 20대에 동경에 유학을 가셔서 물리학과를 마치고 대학입학자격을 얻었으나, 대학교육이 ‘참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되돌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식들에게 대학교육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부국강병과 입신양명’을 근간으로 하는 1910년대 일본의 교육이념이 힘든 일은 남을 시키고 나는 편하자는 것이기에 옳지 않다고 보신 것이지요. 교육의 가치를 물질적 힘을 기르는 데 둔다면 참교육이 불가하다고 여겨 포기하신 것입니다.
해방 후 군사정부의 교육이념도 국가주의와 전투적 반공교육을 내세우며 강자중심의 호전적인 교육·부국강병과 출세위주의 전투적 경쟁교육이 주도하고, 인성교육·평화교육의 이념이 없었습니다. 다석 선생님은 지금의 학교교육이 이념과 정신이 잘못된 ‘주리틀린 교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교육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망가진다고 하여 대학문을 닫아야 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학교교육의 이념과 정신철학을 근본적으로 반성할 기회가 없었고, 사회의 가치관이 일제 강점기의 가치관과 같으니 교육도 다를 수 없는 것이겠지요.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요즘의 교육이 잘 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홍성환: 30대 때 풀무원에 갔었습니다. 풀무원의 원경선 선생님은 기성학교에서 욕심 충만한 사람을 부추겨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시며, 학교에 보내지 않고 ‘욕심 뽑기 운동’을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욕망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물질위주의 욕망이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박재순: 다석 선생님 말씀대로 예전에 학교 문을 다 닫고 다시 시작했으면 인간교육이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3번째 주제로 넘어가 ‘학교교육의 상황과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종재: 그 이전에 먼저 교육이란 말을 포괄적인 교육과 제도교육인 학교교육을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전 국민을 제도 안에서 교육하는 공교육의 역사는 3~4백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논의하는 교육이 공교육을 의미한다면, “공교육은 문제가 있다. 안 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공교육이 “교육의 이상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공교육인 학교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교육을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지식교육중심이기에 가치교육과 정신교육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종교적 중립’도 지켜야합니다. 학교교육의 한계를 넘는 부분은 가정과 종교에서 보충해야함에도 방심하기에 이런 상태로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종교가 가치 있는 삶을 깨우치고 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능기도 등을 통해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도 우리의 자녀교육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잘 먹는 것’과 ‘잘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도 따져봐야겠구요.
박재순: 이 교수님 말씀에 동의하지만, 제 생각에는 공교육도 정화시키고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샌들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치와 교육에서 종교와 도덕을 분리시킨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치 등의 교육외적요소는 배제하더라도 종교와 도덕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종교와 도덕을 가르칠 수 없게 된 것이 교육의 근본문제가 생긴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종재: 특히 공립학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립학교도 공립화 시켜서 운영하다보니, 사립학교 대부분이 종교교육을 위해 세웠음에도 종교교육을 못하게 된 것도 문제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우리교회 목사님의 설교하신 포도원주인의 비유(마태복음 20장)에 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포도원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약속하고 9시와 12시 5시에 각각 사람들을 데려왔고 똑같이 1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9시·12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의 불만과 포도원주인의 답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목사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경우 그 다음 날 누가 일하러 올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9시에는 누가 올 것이며 12시에는 누가 올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5시에 올 것인지, 그럼에도 9시에 와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우리의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칩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9시에 가야해”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적당히 눈치 보다가 12시 가라고, 아니면 5시에 가라고” 할 겁니까? 대부분의 부모는 실력이 있든 없든 5시에 가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일을 할까요? 분명한 것은 돈 받는 액수에 좌우되어 일하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헌신과 봉사·섬김·희생임에도, 이러한 기본적 품성대신 어떻게 해야 하나 더 가질 수 있는지 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기본적 품성을 길러주고, 품성을 통해 바른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고, 그러고 나서 실력을 발휘하게 해야 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는 다 잃어버리고 세 번째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비전이나 소명의식·사명감이 없는 것입니다.
홍성환: 고3이나 재수생의 경우에는 일체의 집안일을 면제해주고, 아침에 깨워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등 명문대 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어떻게 하면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지름길인 명문대로 갈 것인가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명문대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고 그 외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자기 일은 자기가 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든지 또는 부모를 도와야 한다든지 하는 가치는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종교까지 명문대를 위해 돕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종재: 사실 대학입학을 위해 전전긍긍하며 아이들에게 매달리는 이런 태도는 교육학이라는 학문체계에서는 논의할 자리도 없습니다만, 교육학을 하는 저 자신도 자녀교육에서는 어느 정도 세상논리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OECD에서는 교육의 중점을 역량을 기르는데 두고, 역량을 크게 3종류로 나눈 후, 각 종류별로 3개씩 나누어 9가지로 보고 있는데 지적능력은 3번째에 속합니다. 첫째는 내가 누군가를 깨닫는 건전한 자기의식이고 둘째는 건전한 자기의식을 토대로 하여 조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성적·지식·스펙 쌓기 등 한부분에만 매달려 있는 형편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생각하기에 생각의 폭이 너무 좁아 정말 해야 할 많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듯합니다.
박재순: 포도원의 비유에서 드러난 것처럼, 1시간을 일하든 9시간을 일하든 같은 보수임에도 자신이 받은 액수와 상관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길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인간교육이란 자발적 헌신성을 기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서양정신사를 반성적으로 돌이켜보면 권익문제에 초점을 두고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권리·법·정의를 모두 Right로 쓰고 있고, 확보된 권리에 기초해 법을 만들고 이 법이 제대로 실행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권리의식·권리투쟁 등이 서구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비유는 권리 이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9시간 일하고 1데나리온을 받더라도 일을 더 많이 하려는 ‘자발적 헌신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것은 권리 이전의 삶에로의 초대이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삶을 고양시키고 일깨우는 것이 종교와 도덕 교육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이 설자리가 없다는 것이 바로 문제이겠지요.
제 생각에는 OECD에서 교육의 중점을 역량강화에 두고 있는 것도 권리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역량강화는 저희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적에는 부족하게 여겨집니다. 오히려 아까 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상대적인 관점을 넘어 절대와 실존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권리개념이나 상대적 관점으로는 가정이든 학교든 공동체가 성립될 수 없을 테니까요.
이제 3번째 주제로 넘어가 학교교육의 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학교현장에 오래계신 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지요.
고춘식: 작년에 1급정교사 자격 연수를 받으시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서, “선생님들에게 좋은 학교란 수업 안 하고, 학생도 개학도 교장도 없는 학교”라고 농담을 했더니 처음에는 웃다가 나중에는 숙연해졌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말썽을 부림에도 “우리 학생들은 너무 착하다”고 하며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한편으로 많은 선생님들은 아이들과의 관계를 버거워하고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작년에 서울에서 명퇴를 신청한 교사들이 너무 많아 신청자 중 50%만 받아들여졌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에게 “학교가 왜 싫으냐?”고 물으면 “학교니까!”라고 답을 한다고 합니다. 그냥 싫다는 것이니, 학교 자체가 싫다는 말이지요.
학급의 학생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점점 더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나라의 출산율의 10배가 한 학급의 적정 학생 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0~60년대에는 출산율이 5, 6명이므로 50~60명이라도 가능했지만, 요즈음 출산율이 1.2명이라고 하니 12명이 적정선이라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학급당 50~60명이라도 집중이 잘 되었는데 반해, 요즘은 30명 정도인데도 집중이 안 됩니다. 30명이 모이면, 보통 아이들마저도 폭력적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말 잘 듣고 성실하게 살면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을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도 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임을 아이들마저 다 알고 있다 보니,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 공부에 몰두하라고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박재순: 학생들은 입시경쟁 교육을 따라 가느라 지쳐 절망과 분노로 폭력적인 마음과 행태를 갖게 되어 ‘학교폭력’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교사와 교육 자체를 신뢰·존경하지 못하니, 교사와 교육을 우습게 알고 교사에게 대들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업무는 많고, 경직된 교육시스템 안에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역할과 권한이 너무 작다보니 권위도 시간도 열정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고춘식: 거기에 더해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행복해 하면 공부 안 할까봐,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성적이 떨어질까 봐 몹시 불안해합니다. 제가 학교 운영위원으로 있는 한 중학교의 경우를 말해 보겠습니다. 이 학교는 혁신학교인데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존중하고, 학생들도 자신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들이 학교운영위원회에도 참석하기도 하고, 개교식에서는 학생들이 사회를 보기도 했습니다. 개교식이라는 아주 큰 행사의 사회를 학생에게 맡긴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입니다. 선생님들의 큰 결단과 아이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교가(校歌)의 작사와 작곡까지 아이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고, 수업 시간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아이들의 표정은 밝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은 그것을 오히려 불안해하고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불신하기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경쟁 지옥 같은 사회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자유롭게 두면 3년 후 무엇이 될까 불안해하면서 대책을 요구하는 많은 학부모들의 분노 섞인 건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선생님들과 학부모가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해결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행복해 하는 것을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오히려 불안해 한다는 것, 참으로 어둡고 아픈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지요.
박재순: 제가 뉴스를 통해 본 폭력의 피해를 입은 학생은 선생님·부모님 등 누구한테도 호소하거나 기대지 못하고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되어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입장에선 학교는 무법지대고 나라가 없는 백성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학생폭력을 방조한 교사를 입건해서 수사 중이라는 뉴스도 보았습니다. 교사·학부모·경찰 3자가 모여 논의하는데 서로가 각자의 입장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교사대표는 학부모에게 학부모는 교사에게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 것을 보고, 학생·학부모·교사 모두가 참으로 딱해보였습니다.
홍성환: 교육의 근본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부정적인 면만 보입니다만, 그래도 무언가 해결하려는, 새싹같이 돌파구를 여는 사람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4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고 교장선생님 그런 사례 있으면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고춘식: 학교에선 교장의 역할이 매우 큽니다. 교장이 달라지면 학교와 선생님들이 많이 달라집니다. 수업하는 교장, 구성원들을 섬기는 민주적인 교장, 아이들을 사랑하고 나아가 아이들이 사랑하는 교장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공모 교장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 보았더니, 아이들의 표정이 많이 밝았고, 선생님들도 신이 나서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학교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까지도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하면서 해결해 가니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선출된 교장 선생님이라 우선 권위적이 아니었고, 공모 과정에서 많은 구성원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정성을 다하고 치열하게 노력하니 선생님들도 신이 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런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 아이들은 착하다”는 말을 환한 얼굴로 합니다. 그런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설사 잘 못된 길로 갔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학교이지요.
박재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결의 방향과 실마리가 있고, 사례도 있네요. 교장과 교사가 바뀌면 어느 정도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고춘식: 선생님들이 바뀌고, 신이 나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학교가 달라지고 아이들이 정말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의 만남의 깊이, 관계의 질을 높여가는 것이 우리 교육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절실한 방안이라고 생각됩니다. 40만 선생님들의 가슴 속에 가라앉은 에너지를 꺼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홍성환: 교육현장에서 오래 활동하신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습니다. 교사와 교장의 중요성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요. 함 선생의 글에 의하면 교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죽는데서 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교사는 생활문제를 초월한 사람으로, 하늘에 자기를 내던진 사람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교사는 깨닫거나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박재순: 안창호·이승훈·함석헌·김교신선생 등이 교육자로써 권위가 있는 것은 자기 헌신적으로 학생을 섬겼기 때문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선생님들과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국대 총장을 지내신 정대위목사가 어린 시절 식당에서 친구들과 진로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다른 친구들이 각각 군인, 정치가, 기업가가 되겠다고 하였는데, 정대위학생은 목사가 되어 민족정신을 일깨우겠다고 하였답니다.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던 안창호 선생님이 이 말을 듣고 다가와, 민족지도자임에도 어린학생에게 90도로 큰절을 하시며 “미래의 목사님, 부디 훌륭한 목사님이 되셔서 이 민족의 정신을 일깨워주십시오”라고 하셨답니다. 정대위 목사는 안창호 선생의 이런 태도에 무척 감명을 받아, 목사가 된 후 여러 번의 정치적 유혹을 받았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의 큰 절 때문에 유혹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 선생은 감옥에 있는 3년 반 동안 변기통청소를 하셨고, 오산학교에서도 줄곧 변기통청소를 하셨다고 합니다. 학교의 설립자가 가장 낮고 더러운 일을 자처하신 겁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오산학교에 계실 때 사회주의 학생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학생들이 민족주의 교사를 때리려 달려왔을 때 함 선생님은 머리를 감싸고 엎디려 맞았답니다. 한 학생이 “왜 엎디려 맞느냐”고 질문하자, “내가 맞을 때 때린 학생 얼굴을 보면 나중에 때린 학생 얼굴이 생각나 편견 없이 대할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김교신 선생은 양정·경기고에서 가르치셨는데 이 학교에서는 커닝이 절대로 안 되므로 시험 감독을 할 때도 학생을 믿고 책을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한아이가 커닝을 하다가 시험지 위에 물이 떨어져 올려다보니 김교신 선생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답니다. 이 아이는 김교신 선생을 찾아와 앞으로는 절대 커닝을 하지 않겠다고 빌고, 이 후에는 다시는 커닝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교사들에게 이런 정신을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사표가 될 만한 교사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홍성환: 함 선생님께서 오산학교 교사시절 교사의 권위를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 10장을 인용해 교사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라고 하시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정말 사표가 될 만한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교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는 교장·교사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제도적인 면도 있을 겁니다. 교육제도의 개혁을 여기서 논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틀 안에서 학교제도를 개선적인 방향으로 고쳐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정과 사랑이 느껴지고 마을공동체처럼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작고 다양한 학교라든지 아니면 작은 학급 운동이 가능할까요?
고춘식: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너무 거대학교가 많고, 1년마다 담임이 바뀌기 때문에 선생님과 학생의 만남은 1년 단위로 단절되고 있습니다. 1년은 서로를 충분히 알기에는 너무 짧고 허술합니다. 예산 관계로 ‘작은 학교’를 만들어 가기는 어렵지만, ‘작은 학년제’는 예산이 없이도 할 수 있는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지금 한 학년이 8개 반이면 4개 반씩 둘로 나누고, 비담임까지 5-6명의 교사가 4개 학급의 담임을 3년간 계속하여 맡음으로써 ‘3년짜리 만남’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학부모와의 관계까지 끈끈하게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학교 폭력’ 문제까지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들에겐 부담을 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실행해본 학교의 많은 선생님들이 보람과 필요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 방법은 예산이 더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제도를 크게 개선하는 것도 아니어서 많은 학교에서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종재: 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공동체적 교육이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대학원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학과정에서는 어려우나 대학원의 전공과정에 들어오면 석사과정 4년 박사과정 6년 해서 거의 10년간 관계를 맺고 교육을 하게 되니, 사제동행이 이루어져 연구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홍성환: 제가 사범대에 들어갔을 때 저희 선생님들(사범대 교육과 에서는 교수라는 말 대신 꼭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라 했습니다)은 식사뿐 아니라 축구시합도 같이하는 등 모든 것을 학생들과 함께하시면서 사제동행하셨습니다. 사제동행을 교육의 기초로 보신 것이고, 이것이 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작은 학급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박재순: 그런 정신과 철학을 가지신 분이 그런 정신을 이끌어 가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또 다른 해결방안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지요.
고춘식: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지옥에서 아이들이 너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아프게 생각하면서, 생각이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치유 방법을 진지하게 협의해야 합니다. ‘국가 교육 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교육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고, 학교가 아이들의 행복 점수를 높여가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행복하라’고만 하지 말고 ‘행복하냐’고 자주 묻고, 학교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하겠지요.
기독교에서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하여 주일(主日)이라고 하는 것처럼, 주5일제가 되었으니 앞으로 토요일을 ‘씨알의 날’로 정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의 교육이 너무 ‘씨알머리 없는 교육’이 되고 있으니 ‘씨알 있는 교육’을 해 보자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제는 학교에 들어가는 ‘입학(入學)’도 학문에 뜻을 세운다는 의미로 ‘입학(立學)’으로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학생들을 무언가 한 가지는 잘하는 ‘달인(達人) 교육’이 필요하고, 범국가적으로 ‘교육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욕망으로부터, 무한 경쟁으로부터, 비겁으로부터, 절망으로부터 우리 교육을 독립시켜 가야 할 것입니다.
홍성환: 입학(入學)을 입학(立學)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누군지 알고 참사람으로 살려는’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이며, 기어이 참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發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곡의 성약집요에선 성인(聖人)이 됨을 교육의 목적으로 할 정도로 옛사람들은 도덕적 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저는 교육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도 문제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순: 다섯 번째 주제인 교육의 목적과 방향이라도 좋고 해결 방안이라도 좋으니 이 교수님께서 한 말씀해주시지요.
이종재: 최근에 EBS에서 2년 반에 걸쳐 우리나라 학교현실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PD가 프로그램 진행 후,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내었는데 “학교는 경쟁하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고 하며, 좋은 학교를 많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학교교육의 문제를 말하다보니 문제만이 있는 듯 생각되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좋은 학교가 많이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은 학교의 씨앗이 뿌려져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교육과 관련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교가 학생에게 ‘꿈을 길러주는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꿈을 갖고 입학했다가 꿈을 잃어버리고 졸업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꿈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서열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존재로 본다면 서열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경영학 학자가 이야기하기를 “경영은 회사만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경영의 대상으로 보고 스스로도 경영해야 한다”고 하면서 생각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학자가 질문하길 ”머릿속에 직각삼각형을 그린 후, 그 안에 원을 그린다면 몇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직경이 최대인 큰 동그라미를 그린다면 서너 개면 꽉 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데 SKY대학정도만이 길인 듯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동그라미만을 고집하지 않고 규모가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면 동그라미는 무한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절대관점은 동그라미의 규모가 아니라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나름의 사명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 인생의 스토리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 삶에선 스펙만 있고 스토리가 없지만,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꿈을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 가면, 이 속에서는 우리 한국의 김치를 전 세계가 놀랄만한 세계적인 김치로 만드는 스토리가 나오고, 우리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공간을 만드는 스토리, 각박하고 힘든 사회에서 꿋꿋한 삶을 살아가는 스토리, 찬란하고 화려한 일 대신 병든 부모님 똥 닦아주며 평생을 살아가는 스토리 등등, 이런 스토리들이 쌓여 채워지는 사회가 될 때 우리나라가 세계를 이끄는 사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학교가 이런 인재를 길러주는 학교, 학교에 가는 것을 통해 꿈의 스토리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어가는 그런 학교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박재순: 이 교수님 말씀을 듣다보니 씨알사상과 씨알정신이 생각납니다. 씨알사상의 요체는, 씨알은 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씨알맹이가 있으니 제가 저를 싹 틔워 실현하여 제가 저답게 되고, 저만이 아니라 상대도 씨알로서 씨알답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먼저 자신에 대한 자존감, 내가 나답게 되는 길, 즉 나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법과 자신을 실현하는 길과 방향을 알려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뿐아니라 상대를 상대답게, 너를 너답게 하는 것이 결국은 서로 주체가 되는 길이고, 내가 나답게 될수록, 네가 너답게 될수록 서로 풍성해지는 세계가 바로 생명과 영의 세계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직각삼각형 안에 원을 수없이 많이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의 세계는 무한대로 가능성이 열려있기에, 저답게 되는 길도 다양한 여러 가지 무한대의 길이 있습니다. 파이하나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종재: 다시 한 번 저희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선 함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말씀하시면서 “당신은 누구에게 그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고, “나는 누구에게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앞으로 주례를 할 때 “당신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줄 생각입니다. 우리의 교육이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많지만 ‘그대, 그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재순: 유영모 선생님 말씀의 핵심도 ‘그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이’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누구나 될 수 있고, 누구나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이’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지만, 너와 내가 함께 바라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이라면’괜찮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제3자로서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님도 자신의 평생의 목적을, 자신이 죽은 후 사람들이 “‘그이’가 이렇게 말했지.” “‘그이’는 이렇게 살았지”라고 말해 주면 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이’가 되자는 것이 인생교육·학교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다석은 ‘글’을 ‘그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글은 ‘그 사람’ ‘그이’를 줄인 말이라는 것입니다. 글을 읽고 ‘그이’를 그리워하고 글에서 ‘그이’를 만나고 ‘그이’가 되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글 교육은 글을 읽고 가르쳐서 ‘그이’를 찾고 만나게 하는 것이고 ‘그이’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학교에서 글을 읽고 가르쳐서 ‘그이’를 찾고 ‘그이’에 이르고 ‘그이’가 되게 하지 않는다면 학교의 글 교육은 ‘헛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문(人文)교육, 글 교육은 다른 것이 아니고 글에서 ‘그이’를 만나고 ‘그이’가 되는 것이므로 학교교육은 이런 목적과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홍성환: 제가 조금 보충한다면, 유영모 선생님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뚜렷이 밝히고 가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절대의 세계로 들어갔음을 뚜렷이 밝힐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순: 유영모·함석헌 선생님은 사람은 하늘의 씨를 품고 있는 존재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질과 땅에서 벗어나 땅에서 뚜렷해 져야만 하고, 땅이나 물질에 매여 땅과 같으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님은 ‘솟난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솟난다’는 것은 몸·물질의 삶에서 벗어나서 보고 느끼고 행함으로써 하늘로 올라가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이나 몸·물질의 삶에서 뚜렷해지고 ‘솟나는 것’이 사람이 되는 길이고 인격이고 정신이며 얼입니다.
이종재: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교육과 학문, 특히 ‘인문학’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유영모·함석헌선생님의 말을 종합하면 “교육은 글을 통하여 ’그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멋진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보면 저희가 교육하고 되어야 할 ’그 사람‘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 질 것 같습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