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 성전 건축
전술한 바와 같이 성마태성당은 1921년 원자재에 의해 신축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건물을 해체하면서 거기서 나온 자재를 재활용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따라서 대들보, 석가래 등 건물의 주요 부분들은 보통 200백년 이상 된 것으로서, 빠르게 훼손되었으며 심지어는 지붕 한쪽이 내려앉고,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장마 때는 새는 빗물을 받기 위해 성당 안에 빈 대야를 일렬로 쭉 놓았으며 그 양 옆으로 교인들이 앉아 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수리를 하며 견뎌왔으나 더 이상의 수리가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재건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목조건물의 목재들이 뒤틀리면서 창호가 맞지 않아 겨울에는 난방이 잘 안되어 바깥이나 별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내부가 워낙 비좁아서 평상시 미사 때에는 물론이고 무슨 행사라도 있는 특별한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진을 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였으면 좋았으련만, 너무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수리 자체가 불가능했고, 또 다른 건물에서 떼어온 자재를 사용하여 지은 건물이었기에 문화재로 지정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재건축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1991년 7월 8일 성당신축 추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관할사제는 황정기 신부님이었는데, 이 시기의 교회 분위기는 한 동안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으로 쇄신되는 기운이 돌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성당 신축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졌으며, 따라서 금세 교인들의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한쪽에서는 설계에 들어갔고, 또 한쪽에서는 신축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신축헌금을 내고 또 부녀회에서는 바자회를 여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처음 설계는 모든 신자들의 의견을 골고루 수렴하여 작지만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채택하였다. 여기서 가장 고려된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으며, 그래서 당장 교회에서 감당할 수 있는 예산 규모 안에서의 건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정면에서는 2층으로, 후면에서는 1층으로 보이게끔 언덕으로 이루어진 교회부지 지형을 최대한 살린 설계가 완성되었는데, 그 지하공간은 교육관과 식당 등으로 활용되고, 그 위층은 작지만 아름다운 예배공간을 만들기로 결정하여 설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황정기 신부님 후임으로 조용환 신부님이 오시고 새 성당 건축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기존의 설계는 당시 교구장인 윤한 주교님이 직접 하신 설계로 교체된다. 윤주교님의 전공 분야가 교회 건축이었던 만큼 그 전문성을 살려 외국의 유명 성당 건물을 모델로 한 모던한 분위기의 건물 양식으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드디어 1995년 6월 착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사는 잦은 설계 변경으로 진척이 늦었으며, 공사비는 계속 추가로 들어갔다. 이러던 중 결국 공사는 자금난으로 인하여 중단되기에 이른다. 본래 공사 기간을 최단 기간으로 하여야지만 공사비도 절감되고, 또 성당 건물이 없는 기간이 짧아야 신자관리도 그만 쉬운 법인데, 공사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물론 언제 재개될는지 기약 없이 중단되기에 이르다보니 신자관리가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계획은 성당을 지을 동안만 한시적으로 교회 부지 안에 있던 병천2구 마을회관을 성당으로 같이 쓰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평일에는 마을회관으로 쓰이고, 주일에는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하였던 것인데, 공사가 기약 없이 중단되다보니 미사 장소로서 미흡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의 미사 진행 등으로 신자들의 의기는 많이 침체되었다. 또한 공사기간의 장기화는 건축 헌금에 대한 부담 등으로 신자들이 뜸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많은 사람들의 새 성당 건축에 대한 기도와 애정어린 헌신적 참여 덕분으로 공사는 재개된다. 설계도 확정되고, 시공자도 교체되어 공사는 막바지로 접어들게 되는데, 특히 조베드로(전성) 가족, 최아브라함(창복) 가족, 고 조바우로(종남) 가족의 헌신적 노력은 건축에 큰 힘이 되었다.
또 영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는데 성공하여 마무리공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98년 6월에 완공되어 그 달 16일에 축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완공은 되었지만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으며, 그 건축 부채는 조용환 신부님 후임으로 권희연 신부님이 오시고 난 후에 많은 교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단기간에 갚아버린다.
우리는 새 성당 건축으로 하느님이 주신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 첫 번째가 교회 건축은 일반 주택 건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건물 짓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유는 일반 건물의 건축은 그 주체가 확실하다. 하지만 교회 건축에 있어서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다시 말해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공사가 변경되고, 지연되고, 시공자가 교체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두 번째는 계획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반 건축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계획은 건축 자금계획이다. 일반적으로 공사 규모와 기간에 맞추어 예산이 나오고, 또 거기에 따라서 자금계획도 세워진다. 그것이 안 세워지면 한낱 계획일 뿐 시공은 엄두도 못낸다. 그런데 교회 건축은 항상 마지막 자금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공사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공사비의 과대지출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고, 계획보다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 높게 잡아놓은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든가 아니면 교회에 대해 냉소주의자로 남게 된다.
세 번째는 경험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이다. 한 교회에 있어 건축은 한 세기에 그저 한두번 있는 일이다. 그러니 신자 중에 교회 건축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모두 처음 하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저 일반 건축 경험을 가지고 교회 건축을 하려드니 위에서 말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일은 꼬이게 되기 십상이다. 건축이라는 일은 가장 세속(세상에 속한)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또 전문적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진행은 전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비전문가들이 많은 부분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우리 교회 건물의 건축에 있어서 아쉬운 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낡고 작은 교회 건물 대신 새로 지은 큰 교회 건물로 바뀌었지만 그 공간 활용이 안 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 사무 공간이 없다는 것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둘째, 천장이 너무 높고 불필요한 공간이 너무 많아 열관리 등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냉난방비가 과다하게 지출되며 그 지출되는 것에 비하여 열효율은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여름에는 땀을 흘리며 미사를 봐야 하고, 겨울에는 떨면서 미사를 봐야 하는 불편한 공간이 되었다.
셋째, 멋진 외관에 비하여 가장 중요한 음향시설, 조명시설 등이 빈약하다. 높은 천장의 조명은 그 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따라서 항상 어둡고, 설계에서 고려되지 않은 음향시설은 건축 후 편의상 설비함으로서 그 효능이 떨어져 울림현상이 몹시 심하다.
넷째, 잦은 설계변경과 시공자의 교체 등으로 인하여 공사의 부실함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특히 누수현상과 결로현상은 구조적 문제에서 오는 현상이기에 보수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큰 재력가 신자 하나 없는 농촌 지역에서 이만한 규모의 새 교회 건물을 성공적으로 건축하였으며, 그 건축 부채를 단 한 푼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