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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 오시는 예수님(3) :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21-23 / 신명기 31:7-8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제자들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승이 답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은 혀에서 나오지 않는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그렇죠.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은 말과 혀가 아닌 그림과 노래와 시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제 막내 아들이 말을 잘 하지 못할 때 항상 누나랑 티격태격 싸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야, 동생이 말을 잘 못하니까, 누나가 잘 이해해서 타이르면서 같이 놀아라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막내 아들이 말을 좀 하고 말귀를 잘 알아듣게 되었는데, 누나랑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좌중 웃음).
말이 통하면, 커뮤니케이션이 되면 잘 안 싸울 줄 알았는데, 서로 말을 잘 알아듣고 통하게 되어도 더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이 통한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가? 어떻게 표현하는가? 얼마나 선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말한 그 스승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음악가와 시인의 공통점은 입과 혀에서 나오는 것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아름다운 것을 표현할 수 있다.
2019년이 이제 2주, 15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다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여러분 이번엔 말보다는 마음으로 또 입술의 표현보다는 편지나 문자로 마음을 전달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한해 여러분 사람의 관계 정리할 때가 되었지요. 관계도 여러분 사랑의 마음으로 잘 마무리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나누기 원합니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말보다는 엽서 한 장 편지 하나가 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시는 예수님 세 번째,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 이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신학적인 주제, 신학적인 베이스가 되는 것은 성육신, 잉카네이션 Incarnation 이라고 하는 주제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그 탄생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그 성육신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저는 먼저 이 설교 자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에서 유치부에서 할 설교를 한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말씀에서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 유치부에서 할 설교를 지금 하고 계시는가? 비난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거꾸로 제가 유치부 유년부에 가서 어른 설교를 한다면, 아마 아이들은 몸을 비비 꼬고, 떠들고, 힘들어하면서 전혀 그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역지 가서, 저는 이제 막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신학 수업을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맡았던 아동부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있는 그 아이들에게 헬라어, 히브리어로 분석해서 설교했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 플라톤을 얘기하고, 수많은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했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돌아서 생각하면, 제가 쫒겨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때 아이들 애들이 하나같이 제 설교에서 졸고, 딴 짓하고, 떠들고,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제가 보면서, 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떠들고 집중 안하고, 다른 짓 하는 그 모습이 괘씸하구나 라는 생각을 제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동부 총무 선생님께서 제게 계속 이런 제안을 하십니다. 전도사님 설교할 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세요. 혹시 마이크 대신에, 그 전통적으로 쓰는 마이크 대신, 귀에 꽂는 핀 마이크 사 드릴까요? 그때 그 아동부는 30년 동안 본당에서 쓰던 아주 크고 묵직하고 시커먼 강단을 썼는데, 그 설교단 대신에 크리스탈로 된 아주 예쁜 설교 사 드릴까요? 이런저런 제안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계속 그런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그때마다 답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설교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하루는 제가 총무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그런 제안을 하실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왜 총무 선생님이 그렇게 제게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요? 제가 보통 다른데 소그룹모임 우리 권사 월례회나 지역 전체 모임, 구역장 모임 때 설교하면서 이렇게 질문하고 성도님들 하고 대화하면서 설교합니다. 1부 때도 이 질문 했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시더라구요 (좌중 웃음).
대예배 때는 질문하면 안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왜 질문을 저에게 하셨을까요? 설교좀 제대로 해주십시오 라는 우회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들에게 설교가 맞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설교해주십시오 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돌려서 얘기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눈치가 좀 없습니다. 좀 둔해서 잘 못알아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제게 무슨 얘기하실 때, 돌려서 얘기하면 저는 잘 못알아듣습니다. 직설적으로 얘기 해주셔야 됩니다. 제가 반년쯤 지나서야 그것을 깨닫고, 그 총무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30년 쓰던 그 시커먼 설교단을 치우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설교단으로 바꾸고요 그리고 핀 마이크도 달아서, 마이크 없이 무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또한 무대 조명도 바꿔서 소극장처럼 마치 연극을 보는 그런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제가 설교를 싹 바꿔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설교를 듣기 시작합니다. 설교로 은혜를 받고, 설교로 자녀들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을 저는 확인했습니다. 설교에 대한 쓸데없는 권위를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맞춰진 설교를 하게 되니 그 설교를 통해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들의 심령이 변하더라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육신 사건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기 예수로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설교자들이 청중들에 따라서 어떤 설교를 할 지를 정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치부 유년부에는 아이들에게 맞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 신학자가 와서 설교를 해도 아이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 설교는 그 예배 공간에서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어른들의 예배를 드리는 이 공간에서 또 제가 설교를 하면 또 신학대학 수업 때 하는 신학 강의를 한다면 어떻게 살아있는 설교말씀 가운데 은혜가 선포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설교가들은 끊임없이 성도들의 연령, 성별, 여러분들의 수준 정도를 살펴가면서 그에 맞는 설교를 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눈높이에 맞는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눈높이에 맞추는 노력과 수고를 하나님은 온 몸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성육신의 첫 번째 사건이 아기 예수 탄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을 아기 예수 사건으로 가장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증거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23절은 저는 이사야 7장 14절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신명기 31장 본문입니다. 우리 7절과 8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내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아기 예수로 그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냥 신이시니까, 하나님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절대자이니까 인간으로도 오시고, 환상으로도 나타나시고, 자연현상에 비와 구름과 태양으로도 나타나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성에 무한한 절대 권력과 권능과 절대성을 아무렇게나 목적 없이 무의미하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계획 가운데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준비하고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연동의 제단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은 계획과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 아기예수로 오셨다는 것은 그 안에도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지요. 실제로 유대교를 비롯해서 중동의 대부분의 종교는 절대자, 신, 하나님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서기관들이 필사하며 성경을 읽을 때 야훼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표현이 나오면 그 이름마저도 거룩하고 신청해서 야훼라고 읽지 못하고, 여호와라고 읽지 못하고, '아도나이'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는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도나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복음성가 가운데는 아도나이 라는 찬양도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 아도나이라는 표현은 진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해서 대신 쓰는 표현이 아도나이였습니다. 이 정도로 유대교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을 아주 크고 넓은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신 분, 그래서 우리가 손이 닿지 않는 분, 범접할 수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결정하셨습니다. 너무나 넓은 간격, 우리 인간이 좁힐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좁히고자 하신다는 아주 중요한 결정이 바로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육신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의 이곳에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큰 틀에서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그 하나님의 목적,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저는 구체적으로 좀더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임재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함께 읽고 있는 우리 팀 켈러 목사님의 '예수 예수' 라는 책, 그 책에 보면 이 팀켈러 목사님이 제임스 패커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의 책을 인용합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이 되셨고 신의 아들이 유대인이 되셨다. 전능자가 무력한 인간 아기로 지상에 나타나셨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누워서 말똥말똥 바라보며 꼼지락거리고 소리를 내는 것 뿐이었다. 다른 모든 아이처럼 누가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말을 가르쳐야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유아가 되셨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 어떤 픽션에도 이 성육신의 진리만큼 기상 천외한 요소는 없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곁에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슈퍼맨처럼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힘을 자랑하고 능력을 자랑하는 존재로 우리 곁에 계신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곧 성육신의 우리 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너무도 무력하게 너무도 아무것도 모른채 너무도 힘이 없이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제임스패커 목사님에게는 머리가 아찔하다 라고 하는 표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사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슈퍼맨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마구간에 갓난아이로 오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홍해를 갈라쳐서 수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고 가나안 거류민을 몰아내고 떠돌이 나그네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허락하시면서 외세의 침략에 그들의 백성을 지켜준 그 하나님께서 2000년 전에 엄마 아빠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총을 들고 무기를 들고 지식과 과학을 가지고 군사와 권력을 가지고 우리 곁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는, 어머니의 젖이 없으면 배고프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갓난 아이에게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전능성, 하나님의 권능, 하늘의 권세를 포기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모습 그 자체로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가장 나약하고 연약한 갓난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장 착하고 연약한 갓난 아기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교리적이고 신학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서 구체적으로 저와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이 그렇게 오셨습니다.
제가 학교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신문을 편집할 때면 하루 종일 그 신문을 편집하는 디자인 회사에 가서 신문 편집을 합니다. 밤새서 신문을 편집해서 내놉니다. 근데 하루는 한쪽 켠에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들이 계속 작업을 하는데 누군가에게 계속 전화를 하면서 괜찮으신가요 묻습니다. 그런데 괜찮지않다고 해서 계속 퇴짜를 맞는 겁니다.
뭔가 봤더니 어떤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옆에서 쓰윽 봤더니 당시에 너무도 매우 유명한 정치인 얼굴이었습니다. 근데 그 정치인이 일러스트리 그림을 보내주면 자기랑 똑같지 않다고, 똑같이 그려 달라고 다시 계속 퇴짜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그 디자이너들이 그린 그림을 봤습니다. 근데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계속 퇴짜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힌트를 주었습니다. 주름을 빼고 점을 빼고 하얀 머리에 검은색을 좀 칠해 보라고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바로 통과되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림으로 젊어지는 거보다 마음으로 정치로 좀 젊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저는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유일한 것을 추구하는구나. 나랑 똑같은 초상화, 나만 가지고 있는 자동차, 나만 쓰는 어떤 것들, 누구도 가지지 못하는 유일한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 그래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따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닮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쓸데없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 자모실에 가면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자모실에 가면 갓난 아이들이 많습니다. 신기한 것이 지난 주에 봤던 애기가 이번 주에 보면 달라졌습니다. 지난 주에는 아빠를 닮았는데, 이번 주는 엄마를 닮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할머니를 닮았는데, 이번 주에는 할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희안하게 바뀌고 변하더라는 것이죠.
하루는 한 장로님께서 자신의 손녀를 안고 있습니다. 제가 가까이 갔어요. 야 이쁘다! 그랬더니 장로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저 닮았죠? 그런데 뒤에 며느리가 독수리 눈을 하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좌중 웃음).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목구비는 며느리를 닮고, 엄마를 닮고, 전체는 장로님을 닮았네요. 장로님도 좋아하시고, 며느리도 좋아하고요.
여러분 아기는요, 자기가 보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으면, 엄마를 닮고, 아빠가 안고 있으면, 아빠를 닮아가지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그렇게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단에서 좋은 양복입고, 거룩한 목소리로 설교하는 목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갓난 아이로 오셨습니다.
요셉이 보면 요셉을 닮고, 엄마인 마리아가 보면 마리아를 닮는, 물론 우리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의 어디를 닮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누가 보든, 누가 안아주던 누가 함께 있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닮아가는 갓난아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머리가 아찔하죠. 제임스 패커 목사님이 왜 그렇게 얘기 했는지 아시겠죠? 저도 머리가 아찔합니다. 내가 그렇게 섬기는 그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오셨다고 하니 머리가 아찔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흥분됩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것이구나.
절대 권력자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자신의 동상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어서 동전에 새기고 집집마다 사진을 걸어서 그들에게 그것을 닮게 하려고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성육신 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아기 예수를 볼 때마다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님을 경험하며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으로 진짜 임마누엘을 경험하더라 라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우리가 갓난아이를 쳐다볼 때 내 얼굴을 닮은 것처럼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갓난 아이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어른의 몸으로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권위와 힘과 능력 다 포기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그 아기 예수를 안아 줄 때마다 우리가 볼 때마다 변하고 달라지는 아기의 모습처럼 우리 예수님도 우리 얼굴을 비춰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오신다 라는 것입니다.
암투병하시는 성도님이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을 바라보면 그 주님은 치유하는 하나님, 치유하는 예수님으로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있는 분이 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친구가 되신 예수님으로 찾아가십니다. 슬프고 애통하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나가는 여러분이 여러분 앞에 우리 예수님은 위로의 하나님으로 찾아가십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있는 그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그 모습이 비쳐진 그곳에 우리 주님은 격려하시는 예수님으로 나에게 찾아 오신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 모양 여러 모습으로 우리 예수님은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찾아가시고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는 '50가지의 예수 모습' 이라는 책으로 썼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각자에게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이 50가지라는 것을 믿겠습니까? 그 이상의 모습으로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 여러분 각자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갓난아이 그 예수가 여러분 각자를 찾아오실 때 그 주님을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대강절 세번째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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