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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도성 교무가 작사한 찼다면 다북 차고는 성품의 진경을 표현한 글로 텅 비었으되
지혜덕상을 나타냈다. |
| 109장) 찼다면 다북 차고(眞境) 송도성
작사 / 이홍렬 작곡
1. 찼다면 다북 차고 비었다면 텅 비어서 두렷한 거울 속에 파도 없는 잔물결이 고요히
움직이나니 진경인가 하노라
2. 닦자니 본래 맑고 기르자니 근본커서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새김 병통이라 아마도
수양심 놓음이 참수양인가 하노라
3. 소리로 못 전하고 동작으로 형용 못할 참 극락 가는 길을 누구에게 물었기에 남
먼저 찾아온 이들 홀로 즐겨하더라.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성가 109장 '진경'은
원기21년(1936년) 〈회보〉 24호에 실린 주산(主山) 송도성 교무의 작시로, 선미(禪味)를 느낄 수 있는 시조풍의 선시(禪詩)이다. 주산
종사는 이 '진경' 이외에도 '좌선을 마치고(성가 183장)' '방자연(성가 163장)' 등의 선시를 지었는데 이 시들은 '진경'과 의미적으로
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제목인 '진경'은 참다운 경지의 뜻으로 성품의 참된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주산 종사의 가족은 대종사의
명에 의해 원기4년(1919) 주산 종사 13세에 영광으로 이사한다. 이후 자연스럽게 대종사님의 법하(法下)에 귀의하게 되었고(입교는 원기5년
6월15일) 대종사를 친견하여 법문을 받들게 되어 제자 되기를 청하게 된다.
이를 기특히 여긴 대종사는 소년 주산 종사에게 "너는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 물으니 "무릇 마음이란 지극히 넓고 큰 물건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그 큰마음을 확충할
뿐입니다.(夫心者至廣至大物修鍊精神擴充其大之心而耳)"라는 마음을 올리게 된다.
이에 대종사는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고 말했다. 이 문답이 '성품을 말한다' '성품을 알았다'는 뜻의 도성(道性)이라 법명을 받게 된
기연이다.
이런 법명의 기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산 종사는 성품(性稟)과 깊은 인연이 있으며, 성가 109장의 '진경'은 바로
이런 도성(道性)이란 법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진경인가 하노라
'진경'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일원상 서원문)인 성품의 풍경으로, 이원성과 상대가 끊어진 절대 자리인 것이다. 이 진경은 '알고 모르고'에 속하는 자리가
아닌 모르는 마음 당체이며 또는 아는 마음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마음뿐이면 안다 모른다는 분별이 없으며 아는 마음뿐일 때도 안다
모른다는 상대가 없는 것이다. 즉 '오직 알 뿐'이요 '오직 모를 뿐'으로 일체가 텅 비었으되 신령한 영지(空寂靈知)가 구족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성품의 진경은 텅 비었으되 지혜와 덕상(德相)이 원만구족한 자리로, 성가 109장 '진경'에서는 '찼다면 다북 차고
비었다면 텅 비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알면 분명히 알고 모르면 분명히 모르는 영지가 꽉 차 있으면서도 '안다 모른다'라는 일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자리인 것이다.
또한 주산 종사는 다북 차고 텅 빈 자리를 "두렷한 거울 속에 파도 없는 잔물결이 고요히
움직이는" 진경이라 달리 표현하고 있다. '파도 없는 진공(眞空)의 잔물결'이면서 또한 '고요히 움직이는' 묘유(妙有)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경의 두렷한 거울은 파도 없는 잔물결이면서 고요히 움직이는 자리로, 진공으로 은(隱)하고 묘유로 현(顯)하여 조화가 자재(自在)하는 진공묘유의
조화요 은현자재인 것이다.
이처럼 주산 종사는 '진경'에서 현실계에서 때를 하나하나 닦아가는 오염수(汚染修)의 수행을 하기보다는,
성품의 진경에 바로 들어가 청정무애한 그 성품의 풍경대로 살자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더러운 물에 씻고 또 씻는 부질없음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성품의 진경은 '닦자니 본래 맑고 기르자니 근본 커서' 원래 맑아 맑힐 것이 없고 원래 커서 더 클 것이 없는 자리로,
순간순간 '깨어있는' 마음자리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수행의 사다리와 계단이 끊어져 계제(階梯)가 원래 없는 것이다. 원래 닦을 것도 기를
것도 없으며, 원래 갖추어져 있어 충분한 자리이므로 수행을 한다는 것이 자칫 상처에 덧내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주산 종사는
'진경'에서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 새김 병통이라'이라 하시고 '아마도 수양심 놓음이 참 수양인가 하노라'하신 것이다.
또 이
성품의 진경은 언어도단의 자리이기에 '소리로 못 전하고 동작으로 형용 못할 것'이나, 그런데도 누군가 그 소식을 물어 알았던지 먼저 찾아온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 먼저 찾아온 이들'이 참 극락인 도의 낙(道樂)과 맛(道味)를 '홀로 즐겨하더라' 자긍하고 있다. 아마도 주산 종사
당신을 위시한 동지들이 그렇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진경은 상대가 없는 성품의 절대자리를 체득하여 상대가 있는 현실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으로, 성품의 집(本家)에 거주하면서 현실에 출근하여 복락을 장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경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를 상대가 있는
현실의 상황으로 확충해 가는 최상승의 지름길(徑截門) 공부로, 소년 주산의 '입지송'에서처럼 그 큰마음을 확충해 가자는
것이다.
원음산책
성가 109장 '진경'의 반주(伴奏)를 듣노라면 잔잔하고 밝고 경쾌한
가운데 똑똑 튀어 어디론지 육박해 들어가는 씩씩한 느낌이 든다. 앞 박에서 울러주는 웅장함이 마치 지금이 진경이라는 울림 같다. 조금
여리게(mp) 시작해서 크게 세게(f) 다시 조금 여리게(mp)로 진행되는 흐림이 무척 침착하고 안정스럽다.
공부에 슬럼프가 있을
때 이 '진경'은 마음을 새롭게 차원이동 시켜준다. 좋다 나쁘다는 분별의 나락에서 이를 싹 지워버리는, 초연한 맛을 흥겨운 리듬과 함께 육박해
준다. 똑똑 뛰는 포르테(f)의 울림은 성품의 진경으로 점프시키는 기분을 들게 한다.
성가 109장 '진경'은 이흥렬 작곡으로
원기52년(1967년) 정화사에 의해 성가로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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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