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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불안, 불행
민슈쿠의 불빛 외에는 만물이 잠든 밤.
상현인지 달도 사라지고 총총한 별들만 깜빡거리는 괴괴한 심야에 일거리가 하나 생겼다.
너른 마당 도로변의 자그마한 '츠에타테상'(杖立さん)이 궁금해서 잠이 이뤄지지 않으니.
손전등에 확인된 것은 이름대로 다양한 지팡이들.
호남정맥의 안전지팡이, 39번~40번레이조 사이 우와오도 마을의 죽장 처럼 해발670m에
오르는 힘든 길에 짚고 편히 다녀오라는 뜻을 담아 예비해 놓은 지팡이?
그렇다면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하는데 자물쇠는 왜?
밤잠만 날려보냈을 뿐 모두 헛된 상상이었다.
예전에는 다리가 불편하여 제대로 걷지 못하는 헨로상이 이 츠에타테 지조에게 빌고 회복
됨으로서 필요 없게 된 지팡이를 봉납했단다.
지금은 건각을 기원하거나 무사히 헨로를 마친 사람들이 봉납한 지팡이로 만원사례하게
되었고 지팡이를 현금으로 환산 봉납하는 날이 매년 11월 상순에 있단다.
난 코스인 45번 이와야지를 참배하는 헨로상들을 지원하려고 개설, 운영한다는 민슈쿠와
온천이 빈곤층 헨로상들에게는 화중지병이다.
심지어 안전츠에의 공급은 못할망정 지방이값을 내라는 겁박에 다름아닌 츠에타테상까지
내세우면서도 까미노처럼 UNESCO 등재를 노린다니 새벽부터 기가 막히려는 듯 했다.
'우치모도리'(打ち戻り)는 이곳 민슈쿠의 오모테나시도 된다.
투숙객이라는 단서가 있지만 짐을 놓고 편히 다녀오라는 것.
나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지이상(할아버지) 특혜를 베풀겠다지만 그것은 내가 사양했다.
과중하지 않은, 적정한 중량의 백팩을 메지 않으면 정상적인 걸음이 되지 않고 안정감을
잃는 체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민슈쿠 이전, ,카와이(河合)의 헨로 숙소들이 성황을 이루던 때에 그 곳에서 이미 우치
모도리가 시작되었음을 언급했다(前回 글에서)
9월의 마지막 날 이른 아침(06:50)에 길을 나섰다.
'이와야지3km'라는 시코쿠 이정목을 지나 몇분 걸었는데도 도로 이정표는 4km로 늘었다.
내가 역코스로 가고 있다는 것인가.
워낙 자주 겪는 일이라 무감각이 되었지만 신뢰하지 못함으로서 갖는 불안은 불행이다.
어제 땅거미질 때 느꼈으며 이 이른 아침에 다시 느끼는 후루이와야 일대는 절경이다.
국가명승으로 지정됨으로서 명실공히 관광객이 집중하는 경승지란다.
동급으로 봐야 할 청류(淸流) 계곡도 빼놓을 수 없겠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푸른 산과 청류의 마을을 자랑할 만도 하겠다.
무엇보다 온갖 오염의 가능성을 차단한 고원의 천연 청정요새라는 점인데 언제까지 일까.
고상한 것 같으나 오염의 종합세트인 골프장이 지근까지 와 있지 않은가.
후루이와야(古岩屋)터널을 통과했다
12번현도 이전의 옛 헨로미치는 지금도 터널을 거치지 않고 초쿠세 강(直瀨川)과 나란히
하여 강을 건넌 현도와 만난 후 이와야지 한하고 옛 숲길을 고수하고 있다.
핫초사카(八丁坂)까지 합하면 3개의 길이다.
먼발치인 도로에서 이미 압도된 상태로 접근할 수 밖에 없는 이와야지.
12번현도에서 3시방향으로 강(直瀨川)을 건넌 후 마을의 골목을 거쳐 오르기를 계속한다.
해발500m대 고원에서 700m산문까지 차량의 통행이 불가능한 된비알 골목길이기 때문에
인파의 정체가 불가피한 보도에 아무도 없는 아침 7시대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일석2조를 넘어 3~4조, 일거다득 무실(一擧多得無失)의 아침이었다.
울창한 숲을 거치고 계단들을 올라 겨우 산문(海岸山)에 들어섰을 뿐인 때, 예사 절이라면
탐방을 마친 후의 하산 타임이 되었을 것이다.
차량 헨로상들에게는 최악의 헨로코로가시..
"코닌(弘仁) 6년(815년/嵯峨천왕때), 이곳(上浮穴郡 久万高原町 七鳥)에 들른 코보대사가
이 마을 산(海岸山)에 사는 한 여인(法華仙人)을 만난다.
코보대사의 설법에 감동한 선인은 이 산을 대사에게 헌상(獻上)한다.
공중을 자유자재로 부유하는 선인의 신통력도 코보대사의 설법에는 필적 불가의 하수?
대사는 목조와 석조의 부동명왕상을 조각하여 목상은 본당의 본존으로 안치하고 석상은
오쿠노인(奥の院)의 비불로 하여 암굴에 모신다.
이로서 온산이 전화위복을 이루는 호마단이 되고 이와야지의 개창이 완성된다"
우리나라 진안(全北)의 마이산(馬耳山)을 연상하게 하는 기봉의 복부에 세운 전형적 산악
레이조의 창건에 얽힌 비사라는데 밀교의 고마슈호(護摩修法)는 이런 단애라야 하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파른 기백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조밀하게 들어서 있는 여러 이름의
당과 불상들을 심방하며 봉납해야 비로소 부처님이 눈을 뜨고 내려다 보시는가.
신도가 실족하는 순간에 가동중인 만유인력(gravitation)의 자동 중단장치라도 있는가.
내 관심을 끌어간 것은 대사당 한쪽의 코보대사 참회 십훈 비석이었는데 자잘한 글씨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으니 오호 통재로다.
영인본이라도 만들어놓을 것이지 납경이라는 이름으로 거금을 징수하면서도, 오셋타이와
오모테나시를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진짜 대 고객서비스는 꽝이다.
마을 초입에도 배낭을 맡기고 올라가라는 안내가 있으나 문이 잠긴 채인 이른 아침이다.
더구나 배낭을 메지 않으면 된비알이 평지보다 더 불안한 걸음이 되기 때문에 메고 올랐을
뿐인데 하산 중에 교행이 시작된 차량 헨로상들의 괴이쩍은 인사를 받아야 했다.
맨몸도 힘겨운데 늙은이가 무거워보이는 짐을 지고 어느새 올랐다 내려오고 있으니 그리
보일 수 밖에 없겠지.
경내의 다리가 빨간 난간으로 되어 있기는 44번과 45번이 형제지간이다.
다른 점은 전자가 '칙사교'라 하여 저승사자에게 호의적인 이름이라면 극락교라는 후자의
이름은 중생의 제도에 역점을 두었다 할까.
우치모도리의 해결사 타카오카코메이
바야흐로 반추의 길, 우치모도리(打ち戻り)가 시작되었다.
버스도 좋고 히치하이킹이 되면 더 좋고.
1시간 남짓 전에 통과한 터널(후루이와야)을 역으로 벗어난 시각이 아침 8시 30분이므로
일과가 시작되는 때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일도 수월하게 풀리는가.
한 소형트럭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를 태우고 떠났으니.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어떤 통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통화가 끝나는 때에 맞춰 내가 등장
했으며 행선 방향이 같은 인연으로 해피 엔딩이 이뤄진 것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트럭에 실려있는 물건들로 미루어 소규모 설비업 종사자인 듯 한데
67세라는 타카오카코메이(高岡公明).
교활한 이미지가 풍겨지는 보통 일본인과 달리 수더분한 아저씨 타입이다.
목마를 때 마시라며 아사히 맥주 1켄을 내 배낭 옆주머니에 넣어준 그.
차를 태워주고 맥주를 주는 일련의 서비스가 헨로상에 대한 오셋타이의 일환이리라.
타카오카가 내려준 지점은 12번현도의 시.종점인 33번국도 위, 쿠마코겐 초의 미치노에키
텐쿠노사토 산산(天空の鄕 さんさん) 앞.
어제, 다이호지로 진입하기 위해서 3시방향으로 틀었던 지점(이면도로의)과 방금 타고 온
12번현도 사이는 100m안팎에 불과하나 헨로에서는 건널 수 없는 강에 다름 아니다.
헨로가 다이호지를 거쳐서 이와야지를 우치모도리 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43번레이조에서
46번레이조로 직행한다면 직결되는 100m 안팎의 짧은 헨로미치가 되지만.
(43번 ~ 46번의 헨로미치를 펼치면 44번 진입점과 45번의 우치모도리 끝점 사이가 100m
까지 접근했다가 멀어지는 묘한 길이기 때문이다).
우치모도리가 끝나고 46번레이조를 향한 출발이 시작되기는 아침 9시 35분.
잠시 후, 도심을 벗어난 지점에서 33번국도는 헨로미치인 이면도로를 흡수한다.
이따금 나타나는 작은 자투리길은 그것 자체로서는 쓸모 없으나 헨로미치 여부가 궁금할
때마다 소화제(해결사) 역할을 한다.
미니 테라(寺)와 다이시도(大師堂), 진자(神社)가 지근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도로다.
상호간에 습합 상태라 구분이 애매하나 진자에 대한 감정은 두 전자(테라와 다이시도)에
비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 늙은이의 공통된 정서 아닌지.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를 강요당했으니까.
일본의 진자와 테라, 다이시도 등의 신설에 어떤 규정이 있는가.
이름에 전치한 시코쿠가 많기 때문인지 신(新)자를 더 붙이기도 하는데(新四國) 신설법이
엄중하지 않으면 전설 하나 만들어서 신설하려 할 듯 한데.
바람잡이 몇 동원하면 대박 수입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본전 뽑고도 많이 남는 장사
완만하게 오르며 묘진(明神)마을, 쿠마컨트리 클럽 입구를 지난 국도33번이 긴 터널길과
2길로 나뉜 후 레스트 파크(Rest Park. 明神/檜垣櫻公園)를 지난다.
아루키 헨로상들에게는 아주 좋은 고원(해발620m) 휴게소일 것이다.
그 직전에는(해발615m) 헨로상 우대 숙소(桃李庵)도 있다.
미사카고개(三坂峠)를 넘기 때문인지 일명 '미사카도로'로 불리는 국도33번이 해발720m
미사카고개를 향해 완만하게 오른다.
곧 쿠마 스키랜드(久万Ski Land) 입구를 지나, 미사카고개 직전이며 조루리지 전방8.2km
(石柱)지점에서 조루리지로 가는 아루키 헨로미치가 시작된다.
"보행자는 통행가능합니다"(步行者は通行可能です) 안내판이 가리키는 오솔길이다.
코 앞이 미사카고개 광장이며 국도는 고개마루(해발720m) 너머로 전진하고 미사카고개
(도로와 보도)는 지나온 카미우케나 군 쿠마코겐 초와 마츠야마 시(松山市)를 가른다.
1번료젠지에서 755km라는 아루키 미사카고개 벤치에서 잠시 쉬며 본 이정목도 가관이다.
이미 200m를 왔건만 도로를 떠날 때 8.2km였던 조루리지가 8.3km로 늘어났으니.
온전하지 못한 지도와 미덥지 않은 이정목만이 길라잡이인 이국 늙은이의 초행 헨로미치.
용케도 5분의 3을 넘어 63% 달성지점에 와있으며, 미리 말하지만 오늘(9월 30일)까지 중
에서는 내 헨로미치 최고의 날이다.
고도가 여기에 버금가는(해발700m) 12번쇼산지도 있지만 최악과 최고(최선)의 관계다.
(60번橫峰寺, 66번雲邊寺 등 더 높은 위치도 있으나 산길 걷는 맛의 차이가 컸으니까)
한국의 산길과 까미노의 산길, 시코쿠헨로의 산길을 비교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산의 토양과 암석은 시각적 상이일 뿐이며, 산을 이루는 나무와 풀 등 숲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한 기후조건이라 해도 수종(樹種)이 다르며 각기 다른 감각과 정서를 갖게 하는 산의
길을 비교하고 우열 등 차이점을 찾으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시코쿠헨로 88레이조의 루트 중에서 찾으라 한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헨로코로가시와 난코스 여부도 그러하다.
동일한 산길도 기본적 적응과 단련(신체의) 외에도 나이와 그날의 컨디션 날씨 등 상이한
조건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하는데 이 하루의 나의 조건들은 올(all)) A+인 듯.
심지어 걸르는 일 없는 아침의 통증까지도 매너(manner)를 챙기는 듯 무사했으니.
아무튼 이 루트 8km 안팎이 내게, 속말을 빌리면 시코쿠헨로에서 본전 뽑고도 많이 남은
장사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산속은 백주에도 모기떼의 습격이 결사적이기 때문이다.
신발명품에 일가견이 있는 일본에서, 모기의 극성에 시달리면서도 모기를 박멸(퇴치)하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은 괴이쩍은 일이다.
실외의 정적인 일 종사자(교통정리 경찰까지)들이 남녀 불문 허리춤에 모기향통(원형)을
차고 일하는 것이 고작이니 말이다.
산길에서 첫 휴게소(一ノ王子社跡) 안 바닥에 설치되어 있을 뿐 아무도 없는 1인용 천막.
세상에 단 하나뿐인(나를 위해 1개만 생산했으니까) 내 집과 외모가 하도 흡사하여 주인을
만나보려 했는데 장거리 외출을 했는지 기척이 없기 때문에 일어섰다.
휴게소 이름도 기이하지만 내 일본어 실력이 설명판을 해독하기에 역부족이라 포기하고.
과감하게 내려가는 산길이 겨우 3km도 못되어 포장로로 바뀌고 전답으로 바뀐 산골이다.
사람들의 터전이 이 깊은 산골까지 잠식했기 때문이다.
33번국도 이전에는 헨로상뿐 아니라 소위 보부상들까지도 잠자고 먹기까지 도움을 주는
젠콘야도(善根宿)가 있었다는 사카모토야(坂本屋).
아무리 바람직한 전통이라 해도 한 밀레니엄(millennium)에 걸쳐서 퇴색 또는 변질 없이
유지하기가 쉬운 일인가.
소수의 마을민들이 그 전통의 복원과 지속을 위해 노력한다는데 그 것만도 가상한 일이다.
믿음은 산도 옮긴다지만
1892년(明治25년)에 개통한 국도33번 이전에는 쿠마코겐과 마츠야마 사이를 넘는 유일한
산길이었으므로 시코쿠헨로도 이 길(도로) 외에는 달리 길(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악산이 아니라는 점인데 코보대사의 길(遍路道)이므로 그를 주어로 한 많은
전설과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처럼 큰 돌을 치려 한 코보대사.
이 돌을 큰 그물에 넣은 후 그 그물을 오우쿠(オウク/멜대)에 달고 갈 때 멜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이 산으로 날아갔다.
대사는 날아간 돌이 떨어진 곳을 오쿠보(オオクポ/松山市久谷町大久保)라 이름지었다.
떨어질 때 깨진 다른 돌 한 개는 개울에 빠졌고 남은 하나가 이 돌이다.(사진)
돌 표면에 망 자국이 무수하다 해서 이 돌을 '아미카케이시'(網掛ケ石)라 부르게 되었다.
3조각난 것 중 하나가 이 돌이라면 거대한 바위다.
20번이나 걸은 에몬사부로라면 없애버리고 싶었겠지만 코보대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웠
기에 옮기려 했을까.
한데, 이 돌 담을 그물 만들고, 그 안에 넣기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어깨에 메고 옮긴다?
코보대사가 한 밀레니엄이 지나서 나올 헐크(Hulk) 또는 포클레인(Poclain)으로 둔갑하는
도술이라도 시도했는가
믿음은 산도 옮긴다고 했다.
코보보다 8C 전에 예수가 말했으며(聖書) 12c전에 열자(列子)도 한 말이지만(愚公移山)
신앙과 의지를 강조하는 말인데 코보대사가 시도했다니.
당나라에서 밀교를 수입할 때 옥황상제를 감동먹인 우공(愚公)의 비법이라도 익혀왔는가.
황당하거나 포장이 과대해도 그 일들이 헨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회자
되는데 이방 늙은이가 왈가왈부 토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보다, '사카모토야'와 '아미카케이시' 사이, 골목길의 어귀에 서있는 낮은 키의 나무기둥
(遍路墓) 하나가 내 코끝을 찡하게 했다.
어느 헨로상이 사망한 위치임을 알리는 표지일 것이다.
민가가 들어서기 전, 허허했을 때의 위치였는데 작으나마 마을이 형성됨으로서 편치 않은
자리가 되었으리라.
헨로미치에서 작은 지장상(돌)을 본 적이 있다.
문화적 상이일 뿐, 까미노의 십자가에 상응하며 이 목주(木柱)도 그에 포함되리라.
지금은 사카모토야, 산속까지 삶의 터전이 들어와 있고 차량들이 드나들 만큼 포장이 되어
있지만 마을은 커녕 어느 움막도 없던 초기에는 위험부담이 많은 길이었을 것이다.
나도 같은 뜻을 가진 어떤 푯말을 차고 있을 뻔 했던 늙은이라 더욱 애석한 마음이었을까.
헨로미치니까 코보대사와의 연기(緣起)는 아무리 많아도 당연하지만 즉신성불(卽身成佛)
의 밀교길에 기독교 성구를 비롯해 예수 그리스토의 흔적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아미카케이시를 지나고 곧 도로변의 한 집 판자벽에도 "예수그리스토는 영원한 소망을 주
신다"(イエス キリストは永遠の望みを與える)는 글귀가 붙어있으니까.
거두절미하고 불숙 내미는, 한판에 다량을 찍어낸 듯한 글귀들이 괴상쩍은 느낌이다.
일본의 기독교도 밀교처럼 신토와의 습합을 통해서 자구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아닌지.
일본인들은 대표적인 섹테리언(Sectarian/분파주의자)이다.
신도는 증가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도 분파는 늘고 있다.
신도의 수와 교파수가 같아질 지도 모른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흘려버릴 수 없는 일본.
일본 기독교의 현실이다.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정기적으로 모이면 편을 가르고 분쟁으로 치닫게 되며 도덕적이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모이지 말아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교회주의를 만든 일본인이다.
그 주인공이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기독교사상가라는 우치무라칸조(內村鑑三)다.
탁월한 경영자 코보대사
쿠보노 마을(窪野町)을 지나 해발100m미만의 평지로 내려온 헨로미치가 사카모토소학교
(坂本)를 지나서 조루리지에 당도한 시각은 15시 30분.
마츠야마 시 조루리 마을 평지에 자리한 46번레이조다.
시코쿠의 4현 중에서 시와 군 단위로 가장 많은 수의 레이조가 집중되어 있는 마츠야마 시
안에서도 8개의 레이조 중 첫번이 되는 후다쇼다.(사카우치의 경우에는 꼴찌가 되지만)
나라시대(奈良/710~794)에 대불건립(大佛開眼)에 앞서 불교선포를 위해 이요(伊予)에 온
교키보살(行基)은 이 곳을 찬불수업(讚佛修業)의 적지(適地)로 보고 가람을 건립했다.
백단나무로 약사여래상을 친히 조각하여 본존으로 모시고 약사여래의 다른 이름(瑠璃光
如來)에서 사명(寺名)을 따서 조루리지(淨瑠璃寺)라 했다는 것.
때는 와도원년(和銅元年/708년. 元明천황2년).
1c 후(99년)인 다이도2년(大同/807), 당에서 귀국하여 이 절을 방문한 코보대사가 황폐한
가람을 수리 복원하여 시코쿠레이조의 하나로 만들었다.
88개레이조의 창건자는 코보대사(37寺)와 교키보살(28寺), 기타(23寺)로 되어 있다.
코보대사가 창건한 레이조는 시코쿠 전체의 42%인 37개소인데도 그의 밀교인 진언종은
(派는 다르지만) 90%인 80개소나 된다.
이에 반하여 교키보살은 전체의 32%인 28개소를 창건했는데도 그의 천태종 소속은 겨우
4개 레이조가 있을 뿐이다.
기타 23개 사찰도 4개 외에는 모두 진언종 소속이 되었다.
코보대사의 탁월한 관리 능력이 인정되는 수치라 하겠다.
아니면 교활한 경영자?
미리 살펴본 마츠야마 시 소재 8개레이조의 실태도 창건은 교키보살과 기타가 5대 3으로
했으며 코보대사는 훗날의 관리자였지만 100% 진언종 소속이다.
시코쿠88개레이조의 분포를 보면 더욱 괴이쩍다.
거리로는 3분의 2지점에 이르고 있으나 레이조로는 2분의 1을 넘었을 뿐인데 여기처럼 한
마을에 2곳의 레이조가 있는가 하면 90km 간격으로 레이조 불모지대도 있다.
종파는 코보대사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습합과 배척과 장려의 혼선을 빚었다
해도 밀집지역은 천황과 부처님의 축복의 땅이고 소외지역은 버림받은 저주의 땅인가.
기준도 조건도 없이 소위 엿장수 맘대로였는가.
적소(適所)가 장려하는 이유라면 부적합한 지역은 적극적 공략의 대상으로 삼고 올인하는
것이 포교의 기본 아닌가.
거름을 매마른 땅에 주지 않고 옥토에 뿌린다면 그는 유능한 농사꾼이 될 수 없다.
무수한 순교자들이 옥토처럼 편하고 안전한 땅을 거부하고 흡혈귀들이 기다리는 형극의
불모지를 찾아가 스스로 밑거름이 되었다.
그랬기에 많은 수확을 올리는 옥토가 된 것 아닌가.
우리 안에서 안전한 99마리 양을 두고 단 1마리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온 산을 헤매는 것이
종교지도자의 사명이거늘.
여유로운 시간에 경내를 거닐며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는 늙은이.
길이나 걷는 이방 늙은이가 또 타국의 일, 특히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상대로 중언부안하고 있는가.
에도(江戶)시대에 화재로 전소의 불운을 겪은 후 재건했다는 조루리지.
194번현도에서 계단을 밟고 문(門) 없는 산문으로 들어서면 넓고 긴 경내에 우뚝한 것은
마츠야마시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부키(伊吹)향나무.
높이20m로 코보대사가 가지기도(加持)한, 1.000세가 넘은 영목(靈木)이라는데 이 나무가
장수와 풍작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부처는 물론, 코보대사도 신도(神道)를 능가하는, 신도 위의 존재 아닌가.
38번 ~ 39반 사이, 아시즈리우와카이 관광해안에서 코보대사의 발바닥 자국을 많이 보고
왔는데 불수석, 불족석(佛足石)의 절 답게 설법석(說法石)까지 영험 없는 돌이 없다.
문명인이 분명한데 미개인의 신앙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일본인이라면 결례일까.
츠야도의 전용이 의미하는 것은?
야사카지(八坂寺)를 향해 떠났다.
조루리지에서 야사카지까지 에몬사부로(衛門三郞/메뉴' 시코쿠헨로(4)글 참조)와의 깊은
인연을 강조하고 있는 마을 조루리마치(町).
에몬사부로가 코보대사와 재회하려고 헨로를 돌고돌다 죽은 곳이 조신안(杖杉庵/德島県
名西郡神山町)이라면 조루리마치는 코보대사의 쪽박을 깨버린 마을이란다.
실인심(失人心)이 극에 달한 노랭이 부호와 탁발승 코보와의 악연이 시작되었으며 헨로의
원조가 되는 동기의 마을.(1km쯤 전방인 文珠院이 코보의 쪽박을 깬 곳이라고?)
20번이나 돌아서 '헨로의 원조'로 불리며, 소위 사카우치(역방양순례)의 효시라는데, 마을
마다 20번을 방문했다면 후루사토(舊里/鄕里) 아닌 마을이 있을까.
조루리마치는 조루리와 야사카 두 레이조가 함께 자리한 마을인데다 거창한 재산을 모두
적선한, 개과천선의 마을이니 인연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마을.
지호지간이라 해서 여유와 늑장을 부리다가 비를 맞았다.
전 구간에 걸쳐 맞아도 1km에, 15분 미만인데다 간지러울 만큼 내리는 비라 방비도 하지
않고 맞아주며 도착한 47번레이조 야사카지(八坂寺)
하루를 끝내기는 이른 시간대라 잠시 망설여졌다.
다음 레이조(48번)까지 4k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47번)에 츠야도가 없다면 당연히 떠났겠지만 츠야도의 인력에 끌려 주저앉았다.
츠야도가 있는 51번레이조까지도 가능한 시간이 남아 있으나 그 새에 있는 3개의 레이조
방문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데 그래야 할 만큼 절박한가.
많이 지연되었던 일정도 만회를 넘어 충분히 여유롭게 되었고 후댜쇼에 갈 일은 없더라도
헨로상의 신분이라면 방문은 하는 것이 신앙 이전의 매너다.
납경소 여직원은 대부분이 보살 이미지인 것과 달리 깔끔한 맵시인 야사카지의 여지원.
그녀가 안내한 츠야도(通夜堂)는 경외(境外)의 너른 주차장 왼쪽에 지은 간이건물이다.
분리된 2개의 방에 각기 3명까지 수용할만 하다.
씽크대와 레인지가 설치되어 있으므로 끓이는 음식 외의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구조다.
지붕이 있을 뿐 노지의 창고에서 건물다운 집까지, 1인에서 2자리 수까지, 기준도 한계도
없는 츠야도의 실정에서 이만하면 훌륭하며 고마운 시설이다.
'츠야도'(通夜堂)란 본래 글자 뜻대로 밤을 새우는 집이다.
까미노 마드리드 길의 만사나레스 엘 레알(Manzanares el Real)에서 한숨을 자지 못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관계자 아닌 사람에게는 큰 고통의 집임을 잘 알고 있다.
유해를 지키며 밤샘 기원을 하던 집, 장례과정에 사용되던 곳이 아루키헨로상들이 한밤을
머물고 가는 방으로 전용되고 있다.
헨로상에게는 잘 된 일 같으나 전용에 담긴 이면사는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64개소의 대사찰들을 거쳐오는 동안에 장례식이 집행되고 있는 곳을 보지 못했다.
온 종일 몰려와서 많은 금전을 봉납하는 참배객들을 막고 장례식이나 치루고 있을 사찰이
이 시대에 있겠는가.
종교단체도 현대적 경영감각에서 뒤지면 도태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틀 전에 만난 적 있는 일본인 청년이 선착순 권리 행사를 하려 하는가.
(무료 제공 시설에서 선착순 우선권 행사는 불문률이다)
까미노의 도나띠보(donativo/donation) 알베르게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츠야도 입구 방을
점유한 그가 내게 칸막이 저쪽 방 사용을 바랐기 때문인데 사정이 있음을 곧 알았다.
동행3인의 팀인데, 후착하는 자기 일행이 있음을.
8곳의 비탈(坂)을 깎아 길을 내고 창건했다 하여 야사카지(八坂寺)라 명명했다는 절(寺).
아스카(飛鳥) 시대의 타이호(大寶) 원년(701년)에 몬무천황(文武/재위697~707)의 칙령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란다.
창건자는 쿄키도 코보도 아니고 슈겐도(修驗道)의 개조(開祖) 엔노교자(役行者/小角).
그래서 야사카지가 "산 속에서 고행하며 주술을 닦아 영험을 얻으려 하는 종파" 인 슈겐도
의 근본도량(道場)이었는데 이 사찰 역시 코보대사의 진언종 소속으로 바뀌었단다.
115년 후(815년/弘仁6년)에 황폐한 절을 개수한 코보대사가 레이조로 정하고.
시기와 과정이 직전 레이조 조루리지와 매우 닮은꼴로 코보의 밀교 산하에 편입되었지만
경내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 것 같다.
본존으로 안치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다른 것 처럼.
전자가 질병을 극복하고 부유롭게 사는 기복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하며 정토계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극락과 지옥을 묘사한 엔마도(閻魔堂)는 기독교소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John
Bunyan)의 다른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8개나 되는 비탈을 없앴으므로 평지가 된 사찰이지만 인근에 먹거리를 구할 가게가 없다.
어둑해지기 전에 저녁걸이를 구하러 나섰으나 편의점이 여간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다음 후다쇼인 사이린지(西林寺)가 더 가까운 지점까지 갔을 것이다.
비가 그쳐준 것이 천만 다행이었지만 훤할 때 나갔다가 칠야에 돌아왔다.
까미노에서는 그날 거리의 10% 이상을 마을 살피는데 투자했지만 헨로에서는 그럴만큼
인력을 발하는 대상이 없는데 단지 먹거리 찾으러 너른 들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길 잃고 어둠 속의 너른 들을 헤매지 않은 것이 다행이며 어렵사리 구한 김치와 반값 벤토
(弁当/도시락), 맥주 등 화려한 저녁식사로 하루를 마감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