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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릴 질문은 하지마라...무묘앙 에오
이야기가 옆으로 샌 느낌이 들지만, 나의 문하생들은 거의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내가 의견을 구하지 않는 한 그들로부터 사견을 듣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난 그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듣지도 기억하지도 말라. 그저 있어라. 그저 들리는 대로 내맡겨라. 말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내 말에 자신의 경험과 조합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법 그것이다. 있음 그것이다. 존재의 방법,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귀기울여 들을 필요조차 없다. 그저 순수하게 존재하며 의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존재하는 법, <있는 법>을 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답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존재하는 법, 그 안에 있다. 나는 당신에게 이해를 구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기억시키고 싶지 않다. 또 나에게 귀기울이는 것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원한다면 이야기하는 중간에 돌아가도 좋다. 내 이야기 따위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안 들어도 된다.
그저 있으며, 상황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때문에 나와 논의 따위를 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정보 교환 정도는 괜찮지만, 함께 토론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자기가 말하기 위한 기회로 타인을 이용해선 안 된다. 그것이 당신의 떠들기를 위한 준비 자세처럼 느껴지는 침묵은 좋지 않다. 가끔 내가 "그런 질문은 모아서 한 번에 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지금 생각났을 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만다"고 말한다.
나는 자꾸 얘기했다.
"그 따위 잊어버릴 것 같은 질문은 질문의 가치도 없다."
1. 우리의 지각은 범위가 정해져 있다.
그 눈이라는 것을 통해 뭐든 다 볼수 있는 건 아니야. 아주 엄청난 빛을 보면 우리의 눈은 파괴되고 말아. 그와 같이 우리의 지각은 범위가 정해져 있어. 소리도 그렇고, 뭐든 다 그래. 우리는 아주 좁은 것만 지각할 수 있을 뿐이야.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지각에 미치지 않는 것은 무 또는 '없다'라고 단정 짓고 만다. 있다 또는 없다고 하는 것은 다만 우리같은 생물의 지각에 미치느냐 안 미치느냐의 문제에 불과하단 말이다.
2. 공포 신경신호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
사회란, 자네들의 것이든, 우주 민족의 것이든 <죽고 싶지 않다>와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두가지의 공포 신경신호에 의해 운영된다. 기본적으로 자네들과 같은 사고체 생물에게 발전 같은 것은 없으며, 사전에 프로그램되었고, 지금도 작동하는 충동의 유지에 중점이 놓여져 있을 뿐이다.
3. 의인화하는 버릇.
자네들 인간에게는 무엇이든 자네들과 같은 것으로 의인화하는 나쁜 버릇 이 있는 것 같다. 무엇 때문에 그놈이 인간적인 존재여야 하는가? 자네들 이외의 모든 것, 아니 자네들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 조차 애당초 인간적인 것도 인격적인 것도 아니다.
4.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지, 진화를 위한 생존은 아니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지, 진화를 위한 생존은 아니다. 기쁨 역시 단지 자살 방지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주에는 옳음도 없을 뿐 아니라, 진화와 같은 것도 없으며 우주의 목적과 활동은 오직 하나의 기준, <존속>과 <고통 회피>에만 바쳐지고 있다. 그저 무작정 계속 있기.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존재를 위해.
5. 우리들은 자신의 원래 상태로의 해방을 원한다.
당신은 연중 공복, 미세한 고통, 또는 미세한 온도 변화, 상처나 병으로 인한 통증을 느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당신은 고립된 당신 한 사람의 육체를 느낀다. 그러므로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고 강하게 느끼는 자일수록 불행하다. 그러나 그 고립감은 지나치게 민감한 우리들의 육체 감각에 원인이 있다.
지구 인류는 육체가 지나치게 빈약하고 과민하다. 환경 변화에 대한 과민함이 주는 이점이 있다면 참으로 사소한 것뿐이다. 즉, 시시하고 사소한 일에 쾌락을 느끼고 별 볼일 없는 자극에 금방 고통을 느끼거나 불행해진다. 자아라는 것은 완전하게 <육체 감각의 민감함>에 비례한다.
인간이 여러 가지 자극에 민감해지면, 우리들은 싫어도 개인이나 자신의 육체적 존재를 연중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때문에 자신에 관한 정보 축적(=자아)에 비례해 인간은 더 불행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자아가 없는 의식이 육체로 압축되었고, 그것이 생존 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항상 느끼고 또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제한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은 자신의 원래 상태와 같은 해방을 원한다. 이것이 생물 활동의 모든 것이다. 즉 과학도 종교도 어떤 탐구자도 그리고 속세의 모든 오락도 범죄도 실은 단 한 점의 목적을 향해 돌진한다.
그것은 <한계지어진 감각을 느끼지 않아도 좋은 해방>상태이다. 자아의 발달이나 아이덴티티의 발달 등등의 이상(理想)은 거짓말이며, 우리들의 충동은 모두 지나치게 집중화된 자기 감각의 경멸, 또는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라고 하는 한정된 의식을 유지시킬 수 없게 하는 수단이 성(性)이나 마약, 명상, 또는 모든 오락 충동의 원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 체험은 항구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의식은 좋든 싫든 외부와 내부를 왕복한다.
6. 이원적 의식을 발생시키는 육체
당신의 본성은 당신의 육체나 개성, 기억이라는 작은 한정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넓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육체적 존재로 태어났다. 당신의 의식은 본래 선악을 개입시키지 않고 수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환경으로 유폐된 것에서 고통이 발생된다. 따라서 고통이란 원래 광대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작은 의식이었다면 우리는 불만을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언가가> <거북>한 것이다.
당신 속에 있는 <무얼 하더라도 무언가가 다르다>는 감각의 근원은, 당신이 원래는 이원적인 의식이 아닌데도 이원적인 의식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육체로 태어난 것, 그것이 원인이다. 고뇌란, 원래는 자유로우면서도 압축되어버린 당신의 본성 분자가 원래의 상태로 귀환하려고 하기 때문에 압력이 발생한다. 마치 당신은 스프레이 통의 가스와 같다. 기체였는데 압축되어 액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통에 구멍이 뚫리면>당신은 곧 해방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7. 객관적인 고(苦)는 존재하지 않는다.
괴로움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전혀 달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인 환경도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객관적인 고(苦)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관적인 고통, 고뇌는 단 하나다. 그것은 당신 혼자만큼은 <실제로 괴로운 것>.
8. 분리되어 있는 것은, 당신의 사고 단 한 가지 뿐이다.
어이없게도 사마디에서 동떨어져 있는 자는 인간뿐임을 알게 된다. 인간의, 그 육체의 세포조차 자연의 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당신의 사고 단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이 생겨나는 스페이스는 바로 뇌다. 겨우 20센티미터의. 그 밖에 당신 몸의 세포조차, 당신의 의지나 희망, 명상 취향과는 관계없이, 줄곧 타오(TAO)의 섭리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9. 모든것은 빌려 쓰고 있다.
우리들은 살상을 하거나 재배를 하면서 먹거리를 장만하여 먹고 있다. 그러니 식사할 때 만큼은, 특별한 동작 같은 것은 필요없으니 그저 마음 속으로 합장이라도 한다면 벌을 받지는 않겠지. 우리들은 상호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식사뿐만이 아니라 의복, 건물, 땅바닥, 공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저 우리들이 빌려 쓰고 있을 뿐. 자신의 육체조차도.
10. 깨어 있음의 의미..
인간보다도 동물, 새, 곤충, 어류 등은 전면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아래의 차원은 식물이다. 이것은 이미 거의 완전히 타오(TAO)이다. 온전히 깨어 있다. 더 아래는 기체라든가 액체, 광물인데, 여기까지 오면 이미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사마디이다.
11. '그들 이하로' 되는 것.
당신이 타인에게 말도 없고 해도 안 끼치건만, 혹시라도 구박받게 되거들랑 그 또한 어떤 인연일 터이니 포기하라. 항상 세상 사람들보다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처럼 노력하는 것이 좋다. 그건<그들 이하로> 되는 것.
12. 중도(中道)
말이나 당나귀, 소를 뒤로 타면, 당신의 시계(視界)는 과연 어떻게 변할까? 앞을 보고 타면 당신은 목적지를 본다. 미래를 본다. 다가오는 것을 본다. 그리고 당신이 조종할 수 있다. 뒤로 타면,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당신은 단순한 관찰자다. 말이 이제부터 어디로 가건 알 바가 아니다. 그런데, 붓다..석가라면 어떻게 할까? 그는 EO와 같다. 당나귀 등 위에서 중도(中道)가 되면, 그거야 <옆으로 앉아 탈>수밖에 없다. 그리하면 세계는 그냥<지금 여기>밖에 없다. 오고가는 건 알 바 아니다. 그저 통과할 뿐. 어디에서 왔는지,어디로 가는지, 알 바 아니다. 옆으로 앉으면 당신은 자신을 생각한다. 타고 있는 자신을, 대상(對象)의 세계가 아닌 자신을.....
13. 미친 듯한 탐구 없이 한계에 부딪칠 수 없다.
미친 듯한 탐구 없이, 사람은 <한계>에 부딪칠 수 없다. 그 한계에 부딪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지성이 효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이 <한계점>이다. 당신 스스로 돌진해서 한계의 벽에 부딪쳐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 당신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구적인 무심을 얻을 수 없다.
14. 야심가만이 최후에 깨닫는다.
야심가만이 최후에 깨닫는다. 지적인 자만이 최후에 깨닫는다. 끝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지성, 탐구자, 그리고 공격성과 파괴성을 발달시킨 자만이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그것들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어디선가 또다시 그것들을 주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완벽하게 <질리던가> <무관심>해질 정도로 해보지 않은 것이 추락하는 원인이다.
15. 깨달음이란, 생사 그것과의 계약 파기이다.
우주는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명백한 일-. 그러므로, 깨달음과 사회는 무관하다. 그러나 애초에 사회라는 것이 당신에게 주는 자유란, 단 하나의 자유뿐임을 기어해두라. 즉, 우주가 당신에게 주고 있는 단 하나의 자유란<어떤 부자유와 계약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자유. 한편 깨달음이란, 생사 그것과의 계약 파기이다.
16. 감사하라.
먹을 때는 음식물에게 머리를 숙이고, 잠들 때는 방안의 지붕과 벽에 감사드리고, 밖을 걸을 때는 의복에 감사드리고, 배변할 때는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정상적인 육체 상태에 감사드리고, 조용한 시간이 있으면 걱정 근심이 없고, 그리고 당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이라는 골치아픈 환상이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그 정적에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에 단지 <있는> 당신의 존재성(의식성)을 즐겨야만 한다.
17. 어리석은 짓조차 하지 않는 바보
당신을 경멸할 수 있는 인간이 없다기보다, 당신에게 경멸섞인 굴욕을 맛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된다. 설령 구루라 하더라도. 왜냐하면 당신은 그 어떤 경멸조차 할 수 없는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경멸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짓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무위(無爲)한 바보>를 당신 안에 만들 수 있다면 누구도 당신에게 상처줄 수 없다.
18. 한 사람의 붓다로 있으라.
"애초부터 틀려먹은 사고, 안정되지 못한 사고, 에고의 산물로 여기까지 온 사회에 적응할 필요는 없다. 세상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왜 당신이 일부러 원숭이 우리에 들어가 원숭이와 타협해야만 하는가? 당신은 원숭이 조련사가 될 생각인가? 그런 것보다 인간=한 사람의 붓다로 있으라"
19. 어떤 관념도 갖고 다니지 말라.
오늘 밤부터 신이건 무엇이건, 당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 이외의 꿈을 꾸지 않도록 해보라. 꿈의 세계로 갖고 가지 못할 신념이라면 죽어서도 다를 바 없다. 죽을때 잃어버릴 만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도 들고 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즉, 어떤 관념도 가치관도 갖고 다니지 말라.
20. 과학은 공포의 산물.
우리들의 육체가 건강하여 그다지 관리하지 않고 또 식사를 안 해도, 또는 수면을 취하지 않고도 생존이 유지될 수 있다면 어떠했을까? 우선 확실한 것은, 현 상태의 거의 대부분의 물질 과학은 불필요해진다. <과학성> 그 자체는 남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지구 문명도, 의학도, 경제도, 모든 창조물은 단순히 우리들의 사활 문제가 걸린 공포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구히 사는 육체 또는 육체가 아닌 존재라 한다면, 문명은 완전히 무의미해지고 만다.
21. 오로지 홀로 존재할 때..
사회적인 비교에 의해 정의된 병(病)명은 본 서의 철학적 고찰에 있어서 결론을 말하자면, 당신이 혹성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거기에 따라서 발생하는 고통, 불편함이야말로 유일한 병이다. 그리하면 신체 장애, 정신병 등은 병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홀로 되었을 때 당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현상뿐이다.
22. 인류는 식용 생물이다.
인류는 상위 존재에게 있어서는 그저 식용 생물이다. 또는 우주라는 기계의 생물 연료이고, 누군가의 식용 가축이며,우주라는 밭에 주는 비료이고, 또 어떤 때는 우주의 의료 연구용 실험 동물이며, 또는 우주가 앞으로도 그저 목적없이 살아남기 위한 식량이다.
우리들은 다른 생물을 섭취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보다 상위의 존재는 우리들의 감정, 기억, 사고, 지각, 의식이라는 것들 자체를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먹이>로 삼는다. 한 가지 바이러스가 박멸될 때마다 왠지 새로운 기병(奇病)이 인류에게는 계속적으로 발생되어 왔다. 결국, 아무리 의술을 발전시켜도 정기적으로 새로운 병원균이 <목장주>로부터 보내져왔기 때문이다.
23. 활동이 감소하면 고통신호로 압박하는 수단.
우리는 우주에 있어서 진화나 변화, 혹은 보다 높이 발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게> 하기 위한 산업적 부품인 것은 아닐까? 의의, 의미, 가치관, 희망, 동기, 목적, 철학, 종교, 사회, 과학, 예술...그런 것은 활동의 촉진을 위해 덧붙여진 구실에 불과하며, 그 총칭은 <움직임>이다.
우주는 움직이기 위해. 즉, 만물에게 <멈추지 말라>는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 개개의 생물과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이 감소하면 고통 신호로 압박하는 수단을 쓴다. 아마도 지구 상에서 인간만큼 아픔에 민감한 생물은 없을 것이다.
24. 쾌락은 적당한 정도의 고통, 미묘하게 조정된 고통이다.
쾌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당한 정도의 고통, 미묘하게 조정된 고통이다. 또는 미묘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감이다. 잘 납득되지 않으면, 우리가 기분이 좋은 모든 일, 스포츠, 섹스, 식사, 웃음...무엇이든지 <과도>하게 해 보라. 당장 그것은 고통으로 바뀐다. 고통과 쾌락을 확연히 가를 수는 없으며, 다만 어떤 경계선에서 나뉘어질 뿐이다. 감각이나 육체의 허용 범위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어. 그것이 어떤 한도 내의 변화이면 쾌락이고, 한도를 넘으면 고통이 된다. 어떤 말이든 다 반대어를 갖는다. 예컨대 운다와 웃는다. 선과 악, 애와 증. 그런데 고통의 반대어는 없다. 일반적으로 쾌적(고통의 부재)이라고 할 뿐.
25. 우주로부터 무능력자는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타오(TAO)나 깨달음의 트릭이라 일컬어지는 이 교묘한 <숨바꼭질>에서 인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작자들이 당초 기대했던 것은, 거기에 도달하려는 충동이 인류로부터 나오게 하는 한편, 실상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끊임없이 불만과 불안, 그로 인한 갈등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에 자비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자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직 괴로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발생 원인은 삶에의 욕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에너지는 <삶에 대한 집착>과 활동이고, 그것은 <몸부림>에 의해 얻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질의 루슈 곧<생존 의지 에너지>가 얻어지고, 이 에너지를 다른 우주에 저장, 그것을 팔아서 보수를 얻는다. 만약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면 당신은 우주로부터 무능력자로 판단되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26. 지각은 한정하는 기능이다.
지각이란, 펼침이 아니라 한정하는 기능이다. 당신이 한정지은 지각의 세계 외에, 당신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단지 한정된 지각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자의 지각 기관에 따라 세계 자체가 저마다 달라진다.
27. 창조병, 활동병, 갈등병, 생존병.
나는 우주를 창조병, 활동병, 갈등병, 생존병이라 이름했다.
28. 생명에 배반하는 현상.
일종의 우주 존재 그것, 또는 적어도 인간인 한, 또는 지성이 주어진 우주 생물인 한, 깨달음이란 생명에 배반하는 현상임을 기억해 두라. 즉, 만약 깨달음을 정말로 실현한다면 당신은 <끝장>나고 만다. 이 우주에는 두 번 다시 존재할 수 없다. 석가가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고 한 말의 참뜻이 여기에 있다.
29. 생존 본능.
당신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수행하든, <죽기 위해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살기 위한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가? 당신의 목적은 모두 한낱 생존 유지로 환원된다. 어떤 의미로 치장해도 의미 그 자체의 근거를 파고들면 남는 것은 언제나 무의미한 생존 본능뿐이다. 선(禪)마저도 살기 위한 것이다. 그저 사는 것이라고 입으로 말들 하지만 사실 단순한 <그저>가 아니라, 무심히, 안심하고, 편하게 살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
30. 고(苦)와 지루함.
석가조차도 근본 고뇌의 시작은 <고(苦)>와 그리고 무엇 하나 부자유가 없는 생활의 <지루함>에서 였다.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것이다.
31. 고뇌를 발생시키지 않고 살지 못하는 생물.
우리들은 탐욕 또는 고뇌를 발생시키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생물이다. 의식주가 꾸려지고 별로 걱정할 것도 없을 터인데, 우리들의 내부에는 의의, 의미, 생명의 실감, 생명의 충족감을 구하는 충동이 있다.
32. 삶의 보람은 살아가기 위한 부속품.
흔히 <삶의 보람>을 곧잘 거론하는데, 삶의 보람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삶의 보람이란 살아가기 위한 부속품이나 자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때 그 자극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33. 꺼져 사라지는 것을 우주는 허락하지 않는다.
결코 당신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설령 부처가 100억 명 사는 세계라 해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산다는 고뇌>이다. 어떤 세계에서 사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사는 한, 모양있는 것인 한, 부처도 인간도 살기 위해서는 결코 정지할 수 없고, 영원히 우주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일한다. 또 계속 움직이려면 당신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나 행위. 또 하나는, 그것을 안 하면 당신에게 고통이 생긴다는 시스템이다. 꺼져 사라지는 것을 우주는 허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34. 전면적인 마음의 죽음
존재의 의미가 자기에게 있다는 <가치관의 힘>을 유지하면, 그것은 항상 삶에 대해 <싸우는 자세로 긴장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실이다. 내가 전면적인 마음의 죽음으로 가지 않고서는 본질적인 이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
문이다.
35. 우주의 생존 이유
우주의 생존 이유에 관하여는, 당신은 누구에게서도 그 답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의 장에서 그 답을 당신들에게 주어보련다. 그것은 <무목적적 생존성> 이라는 것이다. 의의 없음이요, 의미 없음이다. 전혀, 완벽하게, 아무 의미도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뿐이 아니다. 우주 자체가'''.
36. 확실한 미래
밝은 미래도 어두운 미래도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단지 하나, 오직 확실한 미래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확실하고, 결코 예측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움직여 공포, 어리석음, 위선, 거짓말 등등 온갖 것을 낳고 있다. 그것은 당신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미래이다.
37. 죽음보다 그 과정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죽음 그것보다 그 과정을 두려워한다. 굶주림, 추위, 공복, 서서히 괴로워지는 것을. 엄밀히 말한다면, 죽음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38. 사람이 얽매이는 두가지...
사람이 얽매이는 것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사람이 소중하고 즐겁게 여기는 것에 대한 얽매임. 즉, 좋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필요없다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얽매임. 즉, 혐오하는 것이다.
전설의 노사 무명암의 화상은 말한다. "지나가 버린 일들을 꿈과 같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내일은 꿈이라고 하질 못하는가?"미래란 사람들의 한낱 예측, 그저 추측이요 단지 억측이고, 기대와 불안의 산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