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은 70년 3월 26일, 최도주께서 들려주신 61년전의
회고담을 토대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일본 명치말에서 대정초엽에 걸쳐 비롯된
다. 당시 일본의 무사들의 지위는 옛날 우리나라 화랑들 만
치나 쟁쟁했다. 더욱이 귀족출신이 아니고는 입문을 허락하
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외불출이라하여 극비리에 전승하여
오던 당시의 유술계, 게다가 전일본에 군림했던 대동류 합기
술의 중시조인 다께다 소오가꾸 선생의 문하생으로어떻게하
여 한국인인 최선생이 입문을 하게 되었으며 다른 일본인들
을 물리치고 끝까지 수도를 허락받게 되었던가. 여기에는 기
구한 운명이 있다. 선생은 유년시대의 그 기구했던 사연을
차마 후세에 알리기를 꺼려하신다. 그러나 선생이 어린시절
겪었던 그 불행, 그것이 바로 오늘의 선생을 만들게 된 고귀
한 거름이고 보매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는 없다. 선생이
입문이후 심산유곡에서 인가와의 인연을 단절하고 수도에만
열중하던 9년간의 피나는 경험담과 도를 통하고 난 뒤 일본
전국을 주름잡던 화려한 시절들을 여기에 소설의 형식으로서
서술하기로 한다.』
1. 개구장이 범룡이(범룡은 최용술옹의 아명)
북쪽에 험상ㄱ게 솟은 삼각산, 그 줄기를 타고 한참을 내려오면 거
기에는 커다랗게 펼쳐지는 한 마을이 있다.
일백 오십호는 넉넉히 됨직한 이 마을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
였으나 사람들은 보통 「황간 광평」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부선 철로가 처음 부설(1904년)되자 황간에는 역
이 생겼고 거기에 가면 연기를 푹푹 뿜으면서 긴 쇠몸뚱이를 끌고
가는 소위 기차라는 괴물이 정거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기차를 보지못한 산골두메의 사람들은 서로들 기차를 구경
한 것이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사람아, 자네 기차구경했나」,
「 기차가 길다며?」
「허 길다뿐이라구 말도 말게」,
「아니 그놈의 몸뚱이가 온통 쇠뭉치라던데?」
「그놈이 연기도 뿜는다며」
「또 그놈의 소리가 어떻게나 크던지 귀를 막고 들었지」
……
이럴 무렵이었다. 범룡이도 황간역이 좋았다.
사실은 황간역 보다 기차구경이 더 좋았고 그것보다 더 좋고 신기
한 것은 얼마전에 가게를 차린 일본 사람집 아메다마(눈깔사탕)의
맛이었다.
오늘도 범룡이는 아침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골목을 빠져 나왔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뒤산에서 뛰어놀거나 마을 앞 「함골냇가」에서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보냈지만 범룡이에게는 그런 것은 마냥 따분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논틀길을 오리쯤 걸어가면 황간역이고 거기에 가면
아메다마 장사를 하는 우메다란 일본사람 내외가 반색을 한다.
「오오! 욘짱(용이) 어서와요」
일본 아줌마는 언제나 상냥하다. 그는 이 「욘짱」을 보면 자기집
마루에 올라 앉게하여 그 보기만 하여도 군침이 저절로 도는 「아메
다마」를 한알 씩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범룡이의 어린 마음에는 이것이 한없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그러다가 기차가 올시간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역으로 달려나갔
다. 「하오리(일본 두루마기의 일종)」를 업고 쪼개진 버선에 「조오
리」를 신은 일본 사람도 내리고, 금테 안경에 지팡이를 짚은 신사
도 내리고 떡보따리를 얌전하게 싸든 새색씨도 내리고……
이런 모습을 구경하는 범룡이는 심심치가 않았다.
그래서 범룡이는 노상 밥상만 치우면 역으로 왔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일본인 「우메다」아저씨집에서 자기도 했다.
이 우메다 아저씨는 오십쯤 되었는데 아직 얘기가 없어 중로의 부부
가 호젓하게 살던 처지였는데 범룡이가 나타나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는 딱달막하지만 다부지게 생긴 몸매며 시골아이답지 않게 또랑또
랑한 눈매로 곧잘 따르던 범룡이가 하루만 안보여도 섭섭할 정도로
서로들 정이 들었다.
그러나 범룡이가 이렇듯 집을 까맣게 잊고 일본 아저씨 집에서 자는
날에는 범룡이의 형 용덕이는 큰 일이었다.
동네 동무집을 샅샅히 뒤지기가 일쑤였으나 그때마다 범룡이는 없었
다. 그럴라치면 아버지(최사현)와 어머니(이여사)는 등잔을 켜놓고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이 일쑤 였다.
그러나 얼마뒤에는 범룡이와 일본 아저씨와의 사이를 알고 난뒤부터
는 그렇지가 않았다.
늦게오면 으레 일본집에서 놀다가 자려니 할정도로 마음을 놓는 것
이었다.
그런데 범룡이가 일본 아저씨집에서 잠을 자는 밤에는 정작 잠을 잘
수가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 부부가 밤새도록 아메다마를
만드는 일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
범룡이는 이것이 재미가 나서 꼬박 밤을 새우는데 그대신 이런 밤에
는 눈깔사탕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어 좋았다.
2. 처음타는 기차
그렇게 지나는 동안 설이지났다.
범룡이의 나이가 아홉 살이 되던 이른 봄.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고드름도 녹아내리고 할골내의 얼음도
풀렸으나 아직 북쪽의 뒷산에는 희뜩희뜩한 잔설이 남아있는 그런
무렵이었다.
오늘도 범룡이는 「우메다」아저씨의 집에서 밤을 맞았다.
그런데 그날밤은 이 집 분위기가 여느때와는 달랐다.
밤만되면 엿을 비비던 작업대신 오늘 밤에는 내외가 짐을 꾸리기에
바빴다.
옆에서 이광경을 의아스럽게 바라보는 범룡이를 놓고 우메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조녀석을 오늘밤 데려가야지」
「그래서 영 내아들로 만들어야지
이런 무시무시한 흉계가 우메다의 마음속에서 벙긋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범룡이는 그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이렇게 묻는 것
이었다.
「보따리는 왜 자꾸 싸요.」
이런 말을 들은 우메다의 계집은 오늘 따라 호들갑을 떨면서 대답했
다.
「오! 참 욘짱, 오늘 새벽에 우리 고향에 가는데 욘짱도 같이 갔다
가 와요 네. 기차도 타고 맛있는 과자도 먹고… 호호」
범룡이는 귀가 번쩍 띄었다. 다른 말보다
「 기차를 타고…」
하는 그말이 야릇한 힘으로 범룡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범룡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차가 타고 싶었다. 그것도 갈 때 타고 올때타고 두 번씩이나 탄다.
「언제 오는데요」하고 물었다.
이번에는 우메다가 대답했다.
유난스레 눈을 번들거리면서 그는 희죽이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어 또, 두밤자면 온다, 두밤, 어때 같이 가는 거지. 헤헤헤」
범룡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곧 눈앞에 닥쳐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공
포심이라곤 한오라기도 없었다. 오히려 그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작은 가슴은 마구 뛰고 있었다.
새벽의 좁은 황간역 대합실에는 이들 셋이 한곳에 모여 앉아 있고
역원이 간데라 불을 일렁이면서 들낙거릴 뿐이었다.
「욘짱, 춥지? 아이 어쩌나, 그러찌만 조금만 짭우면 기짜가 와요」
하고우메다의 계집은 범룡이의 귀를 감싸주면서 달래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말씀하시지만 그 당시는 그저 기차를 탄다는 욕심에 좋기
만 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 우메다 부부는 일본인들이 흔히 잘하는 '야간도주'를 하
고 있는 터였다.
조선에 나와서 경기도 불경기였고 이곳저곳으로 얽힌 거래등으로 하
여 도주의 길을 마지막으로 찾는 그런 판국이었는데 나이 오십줄에
아이도 없고 하니 범룡이를 꾀어서 일본의 고향까지 갈 꿍심이었다.
기차가 모퉁이를 돌며 요란하게 달려왔다.
「치익-」
기차가 멎었다.
「자 욘짱! 타요, 어서」
계집의 손에 이끌리어 차에 올랐다.
기차는 잠시후에 레일을 미끄러져 갔다. 범룡이에게는 차내 풍경이
며 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으로 신비스러웠다. 차창밖으로 흘러
가는 등불들이 참으로 신비스러웠다.
차는 속력을 더해 갔다.
추풍령을 넘어 직지사를 향한 내리막길을 질풍같이 내닫고 있었다.
창밖은 칠흙같이 캄캄하기만 하다.
범룡이와 마주보는 좌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우메다는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비벼넣고 있었다.
제목: 수도 32년기 (2회)
3. 야! 신난다.
범룡이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기차가 김천역을 지나고 철교를 건넜다. 철교를 지날때의 그 요란한
소리는 더한층 그의 마음을 뛰게 하였다.
범룡의 일행을 실은 기차가 부산에 도착항 것은 해가뜨기 조금전이
었다. 연락선이 닿아있는 부두에서 일행이 내리자 몰아치는 바닷바
람이 얼굴을 스쳤다.
「욘짱! 바다봐요, 호오라, 저기」
아줌마가 가르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히야 !」
범룡이의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었다.
「저게 바다로구나 !」
온통 시퍼런 물세상이었다. 그위에 집채보다 더 큰 배들이 있었다.
「욘짱! 우리 메시(밥)먹고 가요」
부둣가에서 가끼우동을 한 그릇씩 사가지고 국물과 함께 싸가지고
온 김밥을 먹었다. 아줌마에게 왼손을 꼭잡힌 범룡이는 새롭고 신비
한 또 하나의 세계에 연신 두리번 거렸다.
그러한 범룡이의 귀에다 대고 아줌마는 오늘 밤에는 일본에 도착한
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여기보다 훨씬 구경도
좋고 또 맛있는 과자도 많다고 했다.
부산서 배를 탄지 열두시간 뒤, 연락선은 예정대로 일본 땅 시모노
세끼에 도착했다. 이곳저곳에 전등불이 켜지는 초저녘이었다.
범룡이는 또 한 번 속으로 놀랐다.
지금 그의 주변에 오고가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보던 사람들이 아니
었다. '게다'가 아니면 '조오리'를 신고 있었고 옷매무새도 생소했다.
그 뿐인가 어른도 아이도 모두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말들을 지꺼려
대는 것이었다.
「?」
범룡이는 처음으로 일종의 공포심 같은 것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은 허룸한 여인숙방에서 잤다. 범룡이의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집에서 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서 같으면 용덕이 형과 사랑방에서 서로 껴안고 자거나 아니면
엄마의 품안에서 만사를 잊어버리고 푸욱 단잠을 잘수 있었지만 오
늘밤 범룡이에게는 당장 마음놓고 파고들 품속이 없었다. 그 뿐인가
늘 상 맡아오던 정다운 흙냄새도, 따듯한 아랫목도 없었다.
범룡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도는 것을 느꼈다.
「언제쯤 집에 돌아갈까,-
내일 밤에는 집에가서 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날이 새면 아줌마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
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4. 운명의 서막
「욘짱! 욘짱!」
우메다 아줌마가 흔드는 바람에 범룡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겹친 피로와 불충분한 수면 때문에 눈이 잘 뜨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 보다도 지금의 범룡이에게는 일종의 불안과 두려움이 그의
조그마한 가슴을 엄습하고 있었다.
일어난 범룡이는 집안을 두리번 거렸다.
-생소하다.
방안에 놓인 물건과 집기, 건물의 내부 또는 밖에서 들려오는 장사
꾼들의 외침, 이 모든 것들이 전연 생소한 것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모지'행 배에 오르고 거기서 다시 '야하라'까지 기차
로 오는 동안 사뭇 범룡에게는 외롭고 불안한 여행의 계속이었다.
그것은 그저께밤, 황간에서 기차를 타던 그런 심정과는 너무도 대조
적인 것이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러한 심정을 부채질하는 것은 그들의 말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묻는데 그것은 전혀 모르는 소리였
다. 그뿐인가, 그와 반대로 범룡이가 하는 말을 들은 그들은 일종의
경멸에 찬 눈초리를 보내면서 저희끼리 쑥덕거리는게 더 한층 괴로
웠다. 이렇게 되고보니 범룡이는 그야말로 벙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이곳 '야하라'시의 한 구석 초라
한 집이었다.
「자아, 이제 다왔다. 후후」
짐들을 내려놓으면서 우메다 아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범룡이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매- 으흐, 으흐, 어매-」
이소리를 들은 우메다의 여편내는 황망히 달려와 타이르는 것이었으
나, 아무리 찾을래도 찾을 수 없는 설움은 오장에서 치켜올라 폭발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온통 눈물 범벅이된 얼굴로 치켜뜨고 범룡이는 아줌마 한테 매달렸
다.
「옥상(아주머니) !」 「나 집에 갈래요, 집에 갈래요」
이러자 그녀는 나직히 타일렀다.
안울면 며칠뒤에 다시 한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가고 한달이 가도 한국
으로 다시 갈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범룡이의 마음은 탓다.
나가서 이웃 아이들과 놀자니, 벙어리 행세를 해야할 뿐 아니라 말
이 어울릴수도 없었다.
집에 와 앉으면 고향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안절부절 어린 가슴은 타고 있건만 안타까운 범룡이의 소원을 풀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하여 밤낮으로 울고 지내는 범룡이에게는 밥도 먹히지 않고
잠도 올 리가 없었다.
또랑또랑하고 야무진, 한국의 범룡이는 간데없고 수척하고 생기 잃
은 불쌍한 어린 것으로 변한 범룡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이웃의 아낙네들은 서로들 쑥덕거리다기 시작했다.
「저애가 웬 애라누?」
이웃 아낙네들의 대화다.
「웬 애는 웬애야, 아, 그 조선의 뉘집에서 훔쳐온게지」
「오오라, 그래서 그애가 늘 울적마다 어매-, 어매-
하는군」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자 우메다 내외도 세상의 이목이 점차 두려움
을 차차 느끼기 시작했다.
여느 아이 같으면 지금쯤은 기가 푹 죽어서 시키는데로 하거나 아니
면 집에 갈 것을 단념도 하련만 범룡이는 그렇지가 않았다.
눈만 뜨면 우는 것이 잠들때까지 계속이다.
이제는 달래도 왈겨도 소용이 없다.
그러한 우메다씨집에 어느날 한국인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옷은 일본옷을 입었으나 기골이 건장하고 패기등등한 분이었다.
사립문을 으젓하게 들어서더니 대뜸
「주인장을 만나로 왔오이다」
낭랑한 목소리로 우메다를 불러 앉혀놓고는 다짜고짜로 나무라는 것
이었다.
「천하에 이런 짓이 어디있오.
이 철모르는 것을 어쩌자고 이리 학대를 하오.
만약 당신이 이 애를 제부모에게 돌려 보내지 않으면
하늘이 무심치 않으니 당장 이 길로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말 끝에 힘을 주어 다그쳤다.
우메다는 그저 늙은 잔내비 모양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그저 고개만 꺼뻑꺼뻑하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본 범룡이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것처럼 반가웠다.
그날 오후.
우메다의 여편네는 범룡이를 불러 고향에 가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뜻밖이라 반신반의 '옥상(아줌마)'을 바라보았
다. 참으로 꿈만 같았다.
어찌나 좋은지 따라나섰다.
두사람은 모지행 기차를 탔다.
그런데 차중에서 우메다 아줌마는 이런말을 했다.
「욘짱!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니 욘짱 혼자 가
야요」
범룡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놀라운 용기가 떠올랐다.
「좋다, 혼자라도 가면 될게 아닌가, 온길로만 가면 된다.
까짓거 우리집에 가는 길인데 뭐」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모지'에서 '시모노세끼'의 배를 탄 것은 밤이었다.
범룡이의 옆에는 이제 우메다 아줌마도 없다.
지금 범룡이는 고향집과 그리운 부모님의 모습으로 꽉차있었다.
당장 고향으로 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 이어쩌랴.
지금 범룡이의 앞에는 검은 바다의 바람물결보다도 더 참담한 운명
의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낯설은 타국 이 어린 범룡이를 내리덮치는 검은 운명의 손아귀에서
애처로운 우리의 범룡이는 어찌 될 것인가.
하지만 정작 어린 범룡이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선실 한 쪽 자리에서 오똑 도사리고 앉은 그의 눈은 희망으로 빛나
고 있었다.
제목: 수도 32년기 (3회)
5. 갈곳 없는 아이
바깥은 밤이었다.
지금 '시모노세끼'행 연락선 선실에는 사람과 짐이 범벅이 된채 어수
선하게 깔려있는 선실안을 비치는 희미한 전등불 밑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틈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범룡이의 눈은 사뭇 반짝 거렸다.
「어서 육지에 닿아야 하는데」
범룡이의 마음은 초초했다.
한시 바삐 육지에 닿아야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탈것이 아닌가.
「까짓거 오늘밤 새도록 가도 좋다.」
「하룻밤 안자면 어떨라구, 내일 아침이면 엄마를 만날텐데 뭐」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든 아홉 살짜리 범룡이의 가슴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고향에 가
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얼마를 갔을까-.
선실안이 웅성거렸다.
봇짐을 꾸리는 등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고치는 것을 보면 육지가 다
온 모양이었다.
범룡이도 따라 일어섰다.
짐이란 아무것도 없는 그는 어른들의 틈에 끼어 부두로 올라섰다.
「기차는 어디서 타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말을 모르는 범룡이는 입을 꼭 다
물고 어른들 틈에서 눈만을 두리번 거렸다.
어떻든 시내까지는 나와야 할 일이었다.
'시모노세끼'의 밤은 찬란했다. 사람도 많고 거리도 화려하다.
그런데 범룡이의 귀에 「꿰-ㄱ」하는 기적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
가.
「앗, 저기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유난히 불이 밝고 사람들이 들끓었다.
「옳지 저기가 역이다. 저 기차를 타면, 어머니 한테 갈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재촉한 범룡이는 역으로 향하여 줄달음을 쳤다.
때마침 개찰을 하는 중이었다.
「놓쳐서는 안된다.」
어른들이 개찰을 하는 틈에 끼어 짐꾸러미 뒤에 몸을 살짝 숨겨 표
없이 승차하는데 성공했다.
아 !
우리의 범룡이는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여기를 부산으로 착각했다.
기차는 소리를 내어 달리는데 범룡이는 지금 고향과는 정반대의 방
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차는 밤을 꿰뚫고 치닫고 있다.
범룡이는 '황간'에서 부산까지의 밤열차를 생각하고 이밤이 샐 무렵
이면 고향에 닿으리라는 짐작을 했다.
우메다 아줌마가 사준 호떡두개를 만지다가 한 개는 도루 집어넣고
한 개를 입에 문다.
「이건 용덕이 형을 갖다 줘야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차곡차곡 싸서 품속 깊이 집어넣었다.
잠이 왔다.
범룡이는 외모서리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고향과 부모님의 꿈을 꾸면서 그의 주머니속에 싸넣은 호떡 한 개를
조그만한 손으로 덮어잡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6. 이상하다 !, 황간이 없다 !
얼마를 잤을까.
범룡이가 눈을 떴을때는 날이 희부연히 샐무렵이었다.
「옳지! 이제 황간이 나타날때다.」
범룡이는 차장에 얼굴을 바싹대고는 바깥풍경에 온 신경을 모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황간'이 아니었다.
기차가 설적마다 몸을 일으켜 바깥을 확인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황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날이 다 새고 해가떠올랐어도 '황간'은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것뿐 아니었다.
유심히 보니 조선의 기차역들이 아니었다.
가도가도 손님은 일본 사람 뿐이었다.
「-?」
범룡이는 그제서야 불길한 마음이 엄습했다. 순간 실망과 충격이 한
꺼번에 솟구쳤다. 그러나 지금 범룡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낯선 사람,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 사람 뿐이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뿐이었다.
범룡이는 핑 도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고는 그냥 그 자리에 오뚝 앉
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7. 오오사까의 첫날
범룡이를 싣고 방향도 모르는 곳으로 달리던 기차가 '오오사까'에 도
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4월초 중순이었다.
차에서 남을 따라 내리기는 했으나 갈곳이 없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배도 고프지만 당장 의탁할 곳이 없는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렸다.
차츰 날은 저물고 이곳저곳에서 불이 켜졌다.
거리와 거리, 집과 집 사이를 걸었으나 그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고향으로 찾고 찾아온 줄 알았으나 피로와 시
장끼와 실망의 소용돌이 속을 걷다가 울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렇듯 아홉 살 짜리 어린 가슴을 쥐어짜는 피눈물을 누가
알아주랴.
긴긴 담을 끼고 범룡이는 자꾸자꾸 걸었지만 이제는 지쳤다.
더 걸을 힘도 없거니와 가도가도 소용없음을 깨달은 그는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았다.
살풋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결에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사람이 있다.
「오이 오이, 보오야(아가야)」
눈을 번쩍 뜨니 순경이었다.
범룡이는 그 순경의 손을 잡히어 주재소로 갔다.
거기에서 순경들의 호의를 받아 하룻밤을 잤다.
8. 눈물젖은 1원
날이 새자 범룡이는 일어섰다.
일어서야 갈 곳이 없는 그였지만 어린 마음에도 이곳에서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어서는 것을 본 순경이 범룡이에게
「너의 집이 어디냐」
하고 다정히 물었으나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
룡이의 하소연이 그들에게 통할리도 없었다.
「?」「……」
서로 마주보고 섰다가 납죽 절을 하고 돌아서는 범룡이를 보고 있던
순경은,
「오이 보오야(얘 아가야)!」
하고 불러 세웠다.
그는 측은한 눈으로 범룡이를 내려다 보다가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돈 1원 짜리 한 장을 손에 꼭 집혀주는 것이었다.
범룡이에게는 1원짜리를 손에 넣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손바닥에 펴든 돈 1원,
그리고는 돌아서서 그 순경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