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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6 대언자 2007. 5. 30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1)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2)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찌니라 1) 보혜사 2) 참
성도가 빛 가운데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오래 믿을수록 점점 죄를 덜 짓는 상태로 거룩하여 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를 짓든 아니 짓든 상관없이 빛 가운데 거할수록 자신의 죄가 더 드러난다고 하였습니까? 후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쁜 죄를 마구 지어서 죄인임이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린애라는 뜻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쓰면서 자녀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편지를 쓴 것입니까?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위하여 이 편지를 쓴다고 하는데 요한일서에서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어느 정도입니까?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의 주석을 보았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형제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내어줄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온전하지는 않아도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점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란,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도다), 인간의 연약한 능력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지키느냐 완전히 지키지 못하느냐의 문제이지 노력을 얼마나 했느냐고 계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행함을 강조한다고 하는 야고보서에서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계명의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왔으니 좀 더 계명의 핵심에 들어가 봅시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에 예수님께 시험하여 묻는 내용입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입니까?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입니다.
한곳을 더 봅니다. 로마서 13:8-10절입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데 어느 정도여야 합니까?
예수님이 행하신대로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4-16절입니다. “봉독”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인하는 이며 영생이 그 안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계속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성경에서 기록된 말씀을 자신들이 지킬 수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원수조차 자신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계명을 받아서 열심히 지킨다고 한 사람들이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약은 성령을 받지 못하여 그렇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을 받아서 지킬 수가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을 받았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 남편의 고향에 아들 하나 데리고 내려와서 살려고 하는데 그 아들마저 유괴당하여 죽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거리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였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이야기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 믿으라는 이야기를 우습게 여겼는데 그 고통 중에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 교회 분위기와 벽에 붙어 있는 내용을 보니 아마 지금 유행하고 있는 제자훈련 프로그램 중에 치유를 위한 집회로 보였습니다. 잔잔한 음악과 기도회 중에 주인공이 갑자가 울음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마음에 평안이 왔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열심히 교회 다니며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자기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사람을 용서하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교도소로 갑니다.
죄수의 얼굴이 너무 환하고 좋게 보입니다. 그를 용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자 그 원수가 감사하다고 하면서 자기도 교도소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살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신애의 얼굴은 완전히 변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일부러 대낮에 장로를 유혹하기도 하고 기도회 하는 집에 돌을 던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자기가 무엇인데 나의 원수를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용서해 놓는가 하는 원망인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십자가 없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부치지만 야외집회 현장에서 설교하고 나서 기도하는 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위하여 살자는 기도를 하는 주에 신애가 시디를 틀었습니다. 한참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신중현의 거짓말이야 하는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느니 하는 것이 거짓말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즉 십자가를 모르고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생한 십자가의 사건을 모른다면 오늘도 이런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으니 이 계명을 지키자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옛 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했는데 너는 왜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21절을 봅니다. 나중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만 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을 보내심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으로 온전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내신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고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절을 다시 봅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쓴다고 하면서 누가 죄를 범하면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 보았던 것처럼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내가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과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이란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길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 안에서만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은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의 구속주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속주가 되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속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만민구원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예수님의 속죄로 다 구원받는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복음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선택설이 있기에 만민 구원설을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속죄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았으니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지정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까? 결국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과 죽은 죄인이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일 오후에 보았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다귀들이 무슨 수로 살아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더 이상 지역이나 혈연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지위와 인종이 상관이 없이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를 다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 세상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조건도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아들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케 된 사람들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이런 사랑을 받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5:4). 내가 지키려면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합니다(5:4-5).
이런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대언자가 계속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4절입니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2-25절입니다. “봉독”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기에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