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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한번뿐인 죽음 닳도록 써먹자>의 줄거리:
몸이 주어져서 사람은 이 세상을 삽니다. 머리와 손과 발이 주어지고 오장육부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 몸을 써서 인생을 살지요. 그런데 그 몸에는 손과 발이나 오장육부처럼 보이진 않지만 예외 없이 죽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드러나는 이 죽음을 사람들은 불행한 운명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죽음이 엄청난 밑천임을 모릅니다. 사지백체와 오장육부를 쓰듯이 그렇게 죽음을 써야 합니다. 죽음을 써야만 삶이 진정으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한번뿐인 죽음 닳도록 써먹자
(아모스 8:1~14, 히브리서 2:14~18)
(아모스 8장 1~14절)
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히브리서 2장 14~18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한번뿐인 죽음 닳도록 써먹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한번뿐인 죽음 닳도록 써먹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IT계의 큰 별이자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는 56세를 일기로 2011년 10월 5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잡스가 췌장암을 고치기 위해 수술을 받았던 것이 2004년입니다. 그리고 2005년에 스탠포드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축사를 한 번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온갖 자존심, 당황하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죽음 앞에서 떨어져나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무엇인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미 죽음을 생각할 때에 마음은 발가벗겨집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전제한 상태에서도 마음이 내키는 일들은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당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우선적인 현실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생각할 때에 내 앞에 놓인 과제에 대해서 마음이 내키는 방향이 있다면 결국 그것이 가장 훌륭한 결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췌장암 수술을 마친 직후의 잡스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죽음에 대해서 강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적용하자 마음이 발가벗겨지더라는 것입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자존심에 대한 걱정, 세상의 평판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주어진 일들의 본질에 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문제나 과제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기 좋은 조건이 준비된다고 했습니다. 이 점이 잡스의 탁월한 면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한 번은 맞이해야 할 육체의 죽음을 잘 활용한 후에 죽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진짜 죽음이 드러나기 전에 죽음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잡스는 이제 사회로 나가는 졸업생들에게 나름의 비법을 전수한 셈입니다. 사람이라면 어차피 죽을 때가 올 텐데 그 죽음을 미뤄두기보다는 오히려 앞당겨서 닳도록 써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많이 쓸수록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도가 담긴 잡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또 평생 호스피스 환자를 돌보았던 카렌 와이어트(Karen M. Wyatt) 의사가 “일주일이 남았다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쓴 동기를 한 번 인용해보겠습니다.
“테드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였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날, 저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죽음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다니,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꼭 전해줘요. 바로 지금에 충실하고 더 늦기 전에 인생의 교훈들을 제대로 깨닫기 바란다고 말이에요. 이렇게 죽어가는 남자 옆에서 이 책의 씨앗은 심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7가지 일을 꼽습니다. 죽을 만큼 마음껏 사랑해보지 못했던 것, 더 일찍 용서하지 못했던 것, 이런 저런 걱정하느라 행복을 만끽하지 못했던 것 등이 그러합니다. 마음에서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는 동안 죽음을 쓸 수 있었다면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인생을 채워나갈 수 있었으리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실제로 죽음을 앞두고서야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후회하는 이유는 할 수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보다 중요한 일들을 실천할 수 있었는데,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중요한 일들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습니다. 다만 죽음을 쓰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적인 관점에서 스티브 잡스의 연설이나 카렌 와이어트의 저서에서 보았던 말기암환자 테드의 호소조차도 초보적이고 소박한 깨달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쓰는 단계에는 도달했으나 여전히 죽음의 참 의미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선민들이라면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을 씀에 있어서 박사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죽음에 대한 박사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는커녕 아직 잡스나 말기암환자의 영역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성경전체는 십자가 생활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동일시함으로써 죽음을 쓸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상번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안식일과 월삭(월초)에 드리는 제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상번제의 번제단에 드려지는 어린 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으로 죽음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민은 스티브 잡스나 테드 같은 말기암환자들이 죽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보다 훨씬 신비롭고 놀라운 삶을 항상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선민들과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죽음 쓰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사람은 주어진 몸을 통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손과 발과 오장육부로 이루어진 육체를 평생 쓰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죽음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내 몸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장육부와 사지백체가 존재하듯이 죽음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는 동안 손과 발을 계속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장육부는 내 의지를 통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써진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이 주어져있다면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본래 인간의 삶이란 죽음을 쓸 때에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쓰지 않는 삶은 인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고 살게 하셨을 때에는 죽음도 함께 담아두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끝을 정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놀라며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활용해야 하는 일입니다. 몇 번 활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능하다면 마르고 닳도록 활용해야만 합니다.
죽음을 활용하는 대표적 모습은 첫 사람인 아담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살아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체가 죽은 것이므로 죽음을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인 마음에 하나님을 가질 수 있었고,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 또한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에게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돈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돈 문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며 마음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죽음을 써야 합니다. 죽음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밑천이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에 대해 나는 죽은 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어렵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문제에 대해서 죽음을 사용하면 마음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세상 문제에 대해 죽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지게 된 마음에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시고 몫이 되십니다. 또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육체를 통해 접하고 있는 문제들이 하나님과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삶의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해 죽음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죽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사용할 때에 더는 배우자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배우자는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을 사용하면 자녀는 하나님께 연결이 됩니다. 사업에 대해서도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을 사용하는 동안 사업은 하나님께 연결이 됩니다.
삶의 과제는 해결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죽음을 쓰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매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쓰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리한 식칼은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식칼을 두려워해서 쓰지 않는다면 절대 훌륭한 요리사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맛있게 요리되지 않는 이유는 훌륭한 도구인 죽음을 두려워하여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쓸 수 있을 때에 삶은 하나님과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요리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손대시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양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죽음을 써서 삶의 모든 과제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연결 과정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죽음을 쓴다는 것은 하늘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며, 땅에 대해서는 “모든 일들은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연결해드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셨고 그 길을 가는 자마다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허락받았으니 이제 주님의 죽으심에 내 죽음을 올려놓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나는 죽기 싫다”고 죽음을 피해 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할 수 없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지금부터 써야 할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이나 말기암환자 테드의 언급에서 죽음을 써야 한다는 언급이 나타지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온전히 죽음을 쓸 수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구원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문제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짜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결이 없다면 죽음은 제대로 쓰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보자면 죽음을 쓰는 방법은 알았지만 복음을 몰랐기에 진정한 죽음의 의미에 도달할 수 없었던 스티브 잡스의 삶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에는 췌장암으로 인한 죽음 외의 다른 선택지가 주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췌장암이 삶을 파괴하는 요소가 아니라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랑과 은혜였음을 깨달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스티브 잡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은 전해져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 아모스 1~3절까지는 여름 과일을 담은 광주리 환상이 나옵니다. 여름 과일이란 농익어서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써 북 왕국 이스라엘에 끝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이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절부터 나타나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5~6절을 보면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월삭은 매달 초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리는 절기였고 안식일은 매 7일마다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월삭과 안식일이 같은 취지를 가지고 있음을 두고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유래는 천지창조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조된 아담이 눈을 떠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이 첫 번째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우리 의식과 마음이 아담이 하나님을 처음만난 순간으로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일주일을 살다보면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이때에 안식일을 맞이하게 되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계획한 일이 많지만 오늘 죽는다면 결국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죽음을 떠올리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는 날이었습니다. 아담이 처음 눈을 떴을 때에 하나님을 의식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에도 월삭에도 매일 드려지는 상번제의 어린 양이 아침저녁으로 드려졌습니다. 그 어린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의 첫 날을 회복하면 다시 시작되는 삶은 하나님과 연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 됩니다. 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육신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가 주어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4~6절에서 보았듯이 선민들은 이러한 안식일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야 맙니다. 월삭이나 안식일을 맞이해서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그 시간에 돈을 못 버는 것을 아깝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 한가하게 하나님이나 찾을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은 결코 자유로움과 이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은 삶에 찌들고 정복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억눌리자 그 영향이 타인을 향해 나타납니다. 5절의 하반부를 보면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곡식을 담는 되를 작게 만들어 속이고 비싸게 팔고자 저울을 조작하게 됩니다. 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헐값에 노예를 부리고 짐승에게나 줄만한 밀기울 같은 것들을 식량으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쓰지 못하는 삶에 사람의 존엄성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고 죽이는 것도 스스럼없이 하게 됩니다. 이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찌든 것이고 삶에 빠진 것이며 삶에 먹혀버린 것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도 물을 한 방울도 들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물을 먹고자 물에 뛰어드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가치를 주머니에 들어올 돈 몇 푼보다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 먹혀버리고 정복당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닷물을 들이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에서 즐겁게 놀기 위해서 수영을 배우듯이 우리는 삶에서 죽음을 써야만 합니다. 죽음을 쓰는 마음에 세상은 침범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들어오지 않으면 내 앞에 놓인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루아크(바람)로 표현됩니다. 바람이 가득 차있는 공은 절대 바다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죽음을 쓰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바람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모스 11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로 집중됩니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기만 하고 전혀 쓸 줄을 모르기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의 죽음이 얼마나 좋은지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도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도 그 죽음으로 인한 은혜는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왕 죽어야 한다면 죽음에 끌려 다니고 정복당하기보다는 잘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마음이 육체로 접하는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으면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없고 마음을 채울 수 없게 되리라 여기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고등학교 졸업을 두려워하는 학생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몸을 입기 위해서 육의 몸이 죽어야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두려워하라고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쓰라고 주셨습니다. 죽음을 씀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고 죽음을 씀으로써 땅을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밑천입니다. 돈 없고 건강이 안 좋고 인맥이나 학벌이 없을지라도 삶의 기쁨과 만족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도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모든 문제 앞에서 죽음을 씀으로써 눈앞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공짜로 나의 몫으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민에게서 말씀의 기갈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성전의 번제단을 통해 죽음을 쓰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매사에 사용되어야 할 죽음은 잊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해서 내 죽음을 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죽음을 쓰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아모스 13절에서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한 것처럼 이사야서의 말씀과는 반대의 삶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모스 선지자 시대의 선민들과 같은 삶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우리의 밑천으로 삼아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씀으로써 마음에서는 세상의 어떤 재벌이나 왕들도 가질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가지고, 삶에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죽음을 피하지 말고 닳도록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스티브 잡스나 테드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죽음의 가치를 깨달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우리가 죽음을 쓰며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동일시함을 통해 죽음을 쓰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에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하나님께 연결시킴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신비하고 복되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귀한 말씀입니다 이번 무더운 여름을 잘 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든든한 죽음의 밑천으로 한몫 톡톡히 봐야겠습니다 목사님의 한달간의 쉼 속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한말씀 한말씀 아버지를 통해주시는 참진리 말씀을 돼새기고 돼새겨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 순간순간 함께 연결 된 자임을 몸이 살아 있는 동안 육신에 붙어 있는 장기와 같이 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긍휼로 입혀 주시길 기도 합니다.항상 귀한말씀 주시는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