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소음
숲속을 걷는다. 태초(太初)와 같은 침묵(沈黙)이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는 모른다. 몸의 체중도, 호흡도, 친숙한 人間들의 言語도 잠시 잊는다. 내가 침묵 속에 있는 것까지도 의식할 수 없다. 그때 발밑에서 한 마리의 까투리, 혹은 한 마리의 멧새가 별안간 날갯짓을 하고 날아오른다. 그 울음소리와 퍼덕이는 날갯소리가 침묵을 깨뜨린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침묵을 깨닫는다. 山의 정적을 느낀다. 소음(騷音)이 있을 때 비로소 침묵(沈黙)이 생겨나는 것이다. 산속에서 울려나오는 종(鐘)소리는 침묵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침묵을 불러들인다. 소음이 없는 침묵은 다만 죽어 있는 정적(靜寂)에 지나지 않는다.
言語는 沈黙을 깨뜨리는 한 마리의 까투리처럼 그렇게 돌연히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날아야 한다. 숨어 있던 言語가 숲길을 헤집고 하늘을 향해 일제히 날아오를 때, 사람들은 침묵 속에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새롭게 숲의 오솔길을 볼 것이며, 나무 이파리에 얽히는 여름의 투명한 일광(日光)과 능선 위에 맞닿은 허공의 구름들을 볼 것이다.
言語는 침묵 속의 소음이어야 한다. 침묵을 불러일으키는 소음(騷音)이어야 한다. 인간의 生은 하나의 騷音, 인간의 죽음은 하나의 침묵─ 生과 死의 다리 위에 걸쳐진 詩人들의 言語야말로 이 두 世界를 동시(同時)에 화합(和合)시킨다. 침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까마귀와 참새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지저귄다. 시장(市場)의 言語인 것이다. 그러나 詩人은 침묵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는 침묵(沈黙)을 마련하기 위해서 날갯짓을 한다. 한 마리의 까투리처럼 숲속에 은신(隱身)하여 정적(靜寂)을 견딘다. 누가 만약 발자국 소리를 내며 고요한 숲길에 이르렀을 때, 예고 없이 그것은 튀어나와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으며 내가 어디로 향해 걷고 있었나를……명상의 말은 깨뜨려지고 거기에서 새로운 털복숭이의 生命이 그 알로부터 나온다.
詩人이여, 沈黙 속의 騷音이여. 음흉한 까투리처럼 날아올라라. 너의 소음으로 그 침묵을 헤집어 沈黙을 깨어나게 하라. 그래서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산책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잠시 멎게 하라.
지은이: 이어령
출처 :『문학사상』 1973.7
빗소리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섬돌 앞의 땅이 젖는다. 나무들이 젖고 산이 젖는다. 아파트에서 생활해 온 지가 20년쯤이나 돼 비의 음향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양철 지붕에 토닥토닥 부딪치는 소리 속엔 잊어버렸던 말들이 웅얼웅얼 소곤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비속에선 세상도 젖지만, 말들도 젖어서 촉촉이 마음속으로 배어든다.
어릴 때 나는 양철집에 살았다. 여름에 좀 무덥긴 했으나, 비가 오면 빗소릴 듣는 것이 좋았다. 콩을 볶듯 지붕에서 경쾌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좋았다. 빗소리는 점차 안으로 젖어 들어 아득해지고 먼 태고의 공간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물이 흘러가는 소리….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젖어, 공감의 물기를 느끼게 했다. 빗소리는 편지글 읽는 소리처럼, 어떤 때는 친구의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닿아 있었다. 산, 나뭇잎새, 곤충들의 더듬이, 엉겅퀴꽃의 가시, 어머니의 한숨, 언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릴지 모를 아버지의 얼굴도 닿아 있었다. 이 세상에 누구와도 먼 거리에 있는 듯한 소외감을 느꼈던 나는 비가 오면 모두가 낯선 것처럼 돌아서 있는 것이 아니라, 친근하게 있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빗소리는 위로의 말들을 속삭여주며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외톨박이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과 닿아 함께 숨 쉬고 마음을 통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빗물이 불어 오래간만에 물이 넘친 늠름한 모습이 좋아 강물을 보러 갔다. 빗소리와 물과 세상이 서로 닿아 있음을 보았다. 나도 강물처럼 흘러 미지의 세계로 떠내려가길 바라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까마득히 빗소릴 잊어버렸다. 생활 속에서 비의 음향과 비의 촉감이 사라져 갔다. 비를 맞으며 걸어본 일이 없어졌다. 비를 피하고자 나무 밑에 서서 나무와 함께 비를 맞아본 기억도 어슴푸레하다. 봄비가 나무들에 귀엣말로 하는 소릴 엿들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빗소리에 묻어오는 신록의 향기와 강물의 음성도 잊어버렸다.
빗소리를 상실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 삶과 인생에 생명의 물기가 말라버린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가슴에 토닥토닥 부딪치며 간지럽고 싱그러운 말을 해주던 물방울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려도 빗소릴 듣지 못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시멘트 공간에 살면서부터 빗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마음의 문이 닫혀서 자연과 교감하지 못하고 외톨박이가 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외톨박이가 된 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둔하기만 하다.
농촌의 잔치 집에 와서 오랜만에 빗소리를 듣는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전의 이야기를 듣는 듯 다정스럽다. 풀꽃 향기가 나고, 그리운 이의 음성이 들려온다. 산천이 사람을 낳고 기른다는 말이 있지만, 산천은 비가 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산천을 먹이고 목욕시키고 기른 것은 아무래도 비일 듯싶다. 빗소리는 그냥 어떤 소리인 게 아니고, 생명음인게 분명하다.
처마 끝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섬돌 앞의 땅이 젖는다. 나도 하나의 빗방울이다. 내 빗방울 소리를 누가 듣고 있을까. 빗방울은 어느 물체이건 다가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닫혔던 침묵의 문에 내려서 대화의 빗장을 살그머니 풀어놓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열어 비를 맞아들이고 있다. 메마른 마음에 고랑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싶다. 나도 어느 풀숲에 가서 풀꽃을 피우는 생명의 수액이 돼야 할 텐데… 빗소리가 내 가슴에 피아노 음향을 내며 튀어 오르고 있다.
나는 물기가 없어 씨앗 하나 자랄 수 없는 딱딱하고 황폐한 땅이 아니었던가. 사막을 안고 숲을 상상해온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빗소릴 들을 수 있는 집에서 살면 좋겠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좋겠다. 댓잎을 적시는 빗소릴 들으면 좋겠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의 오솔길로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빗소리가 황폐한 내 마음속에다 생명의 숨결을 듣는 씨눈을 틔워주고 있었다.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모든 게 갑자기 숨을 멈추고 마음의 소릴 귀담아듣고 있었다.
지은이 : 정목일
194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월간문학』에 수필이 당선. 1976년 『현대문학』에 수필 추천을 완료. 남신문 편집국장, 경남신문 논설실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현대문학수필추천작가회 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현재는 한국문협 수필분과 회장 및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계간 수필 전문지 『선수필』을 발행하고 있다.
작품집: [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 [만나면서], [별보며 쓰는 편지],[깨어있는 자만이 숲을 볼 수 있다], [대금산조], [마음꽃 피우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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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새>
최 승호
재를 뚫고 날아오르는 투명한 새여
네 안에 물이 있고 하늘이 있다.
네 안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
재를 뚫고 날아오르는 투명한 새여
보석의 입술과 창문의 눈으로
꽃의 깃털들로 품안에 깃들어다오
이 땅의 어두운 이마들 위에 낮게 내려와다오
재를 뚫고 날아오르는 투명한 새여
넘어지는 풀들을 너의 부드러운 숨결로 쓰다듬어 다오
장님들의 창가로 와서 속삭여다오
이 땅이 너의 둥지가 아니라 해도
(출처: 한국일보 1993.6.6.)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 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2024년 7월 첫번 째 독서모임, 7월 11일 목요일, 18 시에 커먼즈 필드에서 진행됩니다.
전 시간에 이어서 김유정의 번역작품 <잃어진 보석> 을 읽습니다.
장마철입니다.
우산은 늘 휴대하시고, 건강에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커먼즈 필드에서 뵙겠습니다.
2024. 7. 11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