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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경종실록 14권, 경종 4년 4월 5일 무신 1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우의정 이광좌 등이 경외의 관리를 신중히 선발하고 고 명현 이몽규에게 청직을 추증할 것 등을 청하다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이 입대(入對)하였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이조에 신칙하여 경외(京外)의 관원을 신중히 선발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에게 신칙하여 낭리(郞吏)를 엄히 단속하여 사사로운 정을 따라 농간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관찰사는 수령(守令)을 잘 통솔하여 상세히 백성 돌보기를 자기 일 보듯이 하도록 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고(故) 명현(名賢) 이몽규(李夢奎)는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신 뒤로 시(詩)를 지어 스스로 폐처(廢處)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행장(行狀)을 지어 그 의리를 칭송하였고,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명신록(名臣錄)》을 지었는데, 유생으로서 거기에 입전(立傳)된 이는 이몽규 한 사람 뿐입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재신(宰臣) 반열(班列)의 청직(淸職)을 추증하도록 하소서."
하고, 호조 판서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단종(端宗)계유년088) 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조극관(趙克寬)이 모두 죽은 것은 그 충렬(忠烈)이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조극관의 아들 조정서(趙廷瑞)는 귀양가서 죽고 아우 조수량(趙遂良)도 사사(賜死)되었으니, 삼신(三臣) 중에서도 조극관의 집이 가장 참혹한 화를 입었습니다. 조극관 부자는 후사가 없고 유독 조수량만 후손이 있으니, 황보인·김종서의 자손과 일체로 녹용(錄用)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일경(金一鏡)은 말하기를,
"청(淸)나라 사람 상명(常明)은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으로서 황제(皇帝)의 총신(寵臣)이 되어 모든 일에 우리 나라를 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칙사는 구렁텅이같은 욕심꾸러기인데, 호조(戶曹)에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데도 감히 함부로 독기를 부리지 못한 것은 역시 상명이 신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명의 족속이 의주(義州)에 있다 하니, 마땅히 수록(收錄)을 더하여 상명의 조상 분묘(墳墓)를 수치(修治)케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홍우전(洪禹傳)은 정주(定州)로 귀양갔는데, 80이 넘은 어미가 시방 전주(全州)에 있어서 서로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됩니다.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더하여 조금 가까운 남쪽 지방으로 옮겨 주어서 모자가 서로 의지하도록 하소서."
하고,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귀양가 있는 윤홍(尹泓)은 그의 선조 윤섬(尹暹)이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윤집(尹集)은 곧 삼학사(三學士)089) 중의 한 사람이며, 양할아버지 윤조(尹肇)는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였기에, 효종(孝宗)께서는 전교하시기를, ‘한 집안에 삼절(三節)이 났다. 이는 참으로 십세(十世)를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윤홍의 나이 또한 70세이니, 석방을 윤허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진유가 또 청하기를,
"윤증(尹拯)의 홍양(洪陽) 용계 서원(龍溪書院)에 은액(恩額)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7책 1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1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 외교(外交) / 사법(司法) / 사상-유학(儒學)
[註 088]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089]삼학사(三學士) : 병자 호란 때에 청국(淸國)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곧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로서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서 끝끝내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참혹하게 죽었음
192.영조실록 3권, 영조 1년 2월 20일 무자 5번째기사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원(閔鎭遠)이 진달하기를,
"연산(連山) 땅에 옛날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사전(私田)이 있었는데 훈부(勳府)에 적입(籍入)되었고, 그후 훈부에서 노은동 서원(魯隱洞書院)에다 내어주고 인하여 면세(免稅)하였습니다. 이진유(李眞儒)가 진달해 면세(免稅)를 혁파한 후 근래에는 다시 세를 낸다고 하니, 선조(先朝)의 정식(定式)에 의해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전지는 3결(結)에 한해 면세하되 반드시 본원(本院)에서 스스로 마련한 위전(位田)만 면세를 허락하고 민결(民結) 가운데 든 것은 면세를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궁성(宮城) 안에 입직(入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논어》의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다[以德報怨]’ 장(章)을 강하였다. 시독관 신방(申昉)이 말하기를,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잘못이며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 역시 사의(私意)이니, 곧은 자는 의리(義理)의 경중을 헤아려 마땅하게 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의현(李宜顯)은 말하기를,
"범순인(范純仁)286) 이 채확(蔡確)287) 의 죄를 논하면서 채확이 자기와 다른 당이기 때문에 그 죄를 가볍게 하고자 했으나, 주자(朱子)는 그르게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혐(避嫌)하는 것은 마침내 사의(私意)가 되니, ‘직(直)’이란 한 글자가 매우 간결하고도 지당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7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思想) / 농업(農業) / 재정(財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286]범순인(范純仁) : 송나라 철종 때 학자.
[註 287]채확(蔡確) : 송나라 철종 때 간신.
193.영조실록 4권, 영조 1년 3월 4일 임인 3번째기사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홍양 유학 김두린 등이 사육신을 제향하는 노은 서원의 면세를 청하다
홍양(洪陽)의 유학(幼學) 김두린(金斗麟) 등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고을에 노은 서원(魯恩書院)이 있어 육신(六臣)404) 을 제향(祭享)하며, 성삼문(成三問)의 옛날 집도 그대로 있고, 성삼문의 아비 성승(成勝) 및 성삼문 처(妻)의 무덤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삼문 집안의 대대로 전해오던 장토(庄土)405) 12결(結)이 연산(連山)에 있었는데, 충훈부(忠勳府)에서 몰수하였던 것을 선조(先朝)에서 내어주도록 명하고 세금을 면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昨年)부터 이미 면제하도록 한 세금을 내도록 독촉하니, 바라건대, 징수하지 말게 명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82면
【분류】
사상(思想) / 교육(敎育) / 재정(財政) / 농업(農業)
[註 404]육신(六臣) : 사육신(死六臣)을 가리킴.
[註 405]장토(庄土) : 논과 밭.
194.영조실록 11권, 영조 3년 4월 21일 정미 3번째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전조에 명하여 성삼문·박팽년의 후손을 수습하여 임용하게 하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을 수습하여 임용(任用)하게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만일 후손이 없으면 비록 방손(傍孫)이나 외손이라도 일체로 탐문(探問)하여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이때 승지 경성회(慶聖會)가 아뢰기를,
"박팽년은 후손 박경여(朴慶餘)가 있고 성삼문은 단지 외손 박중귀(朴重龜)만 있으므로 숙종(肅宗)께서 임용하여 수령(守令)을 삼았었는데, 이 두 사람이 벼슬에 있을 적에는 육신(六臣)들의 제사를 일체로 차렸었으나, 지금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죽고 그 가문이 매우 빈한하므로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런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32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195.영조실록 12권, 영조 3년 7월 19일 계유 3번째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임징하의 처리·윤지술의 배향·윤봉조에 대한 사간 유정의 상소
사간(司諫) 유정(柳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징하(任徵夏)는 감히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글에 실어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는데, 이는 바로 김춘택(金春澤)의 매제[妹婿]이고 역적 임창(任敞)의 지친(至親)입니다. 부도(不道)한 마음은 그 무리가 서로 전하는 의발(衣鉢)이니, 하루도 용서하여 둘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대저 선왕을 핍박하여 욕하여 스스로 형벌을 재촉한 윤지술(尹志述)이 무슨 일컬을 만한 절의(節義)가 있어서 유현(儒賢)의 사당에 배향(配享)까지 합니까? 나라 사람이 분개하는 것이 오래 갈수록 격렬해지니, 그 배향에서 내치고 그 위판(位版)을 불사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어비(御批)를 위조한 것이 어떠한 중죄이며 사람을 모아서 옥사(獄事)를 일으킨 것이 얼마나 음흉한 도둑입니까? 홍성룡(洪聖龍)을 찾아내어 무고한 사람에게 화를 전가한 계책은 성교(聖敎)에 이미 통촉하였다 하셨으나 지레 감죄(勘罪)하여 처단하고 구명하지 않으셨으므로 옥사의 체례(體例)가 크게 무너졌으니, 홍성룡을 다시 국문(鞫問)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윤봉조(尹鳳朝)의 음흉하고 공교한 정상은 전하께서 이미 다 통촉하셨으나, 꾐을 받은 자는 방만규(方萬規)이고 시킨 자는 윤봉조이니, 방만규는 윤봉조의 한낱 사령(使令)입니다. 방만규는 죽었으나 조극량(趙克亮)은 아직 살아 있으니, 소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를 당장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대계(臺啓)를 쾌히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임징하(任徵夏)의 일과 윤봉조(尹鳳朝)의 일은 전일의 비답에 이미 일렀다. 윤지술의 일은 당초에 배향(配享)하라고 명한 것이 어찌 한때 청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겠는가? 내 생각도 그러하다. 이제 네 상소를 보고 다시 생각하니, 대신(大臣)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처분해야 하겠다. 홍성룡의 일은 결코 오늘의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을 다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정의 상소에 비답을 내릴 때에 처음에는 윤지술을 정몽주(鄭夢周) 및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에 견주었는데, 송인명(宋寅明)의 말에 따라 뒤미처 비지(批旨)를 이렇게 고쳤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8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歷史)
196.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 11월 4일 기사 2번째기사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충청도 홍양 유학 김두린 등이 상소하여 노은 서원의 위토를 면세해 줄 것을 청함
충청도 홍양(洪陽) 유학(幼學) 김두린(金斗麟)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 등이 살고 있는 곳에 노은 서원(魯隱書院)이 있는데, 바로 육신(六臣)을 병향(並享)한 사액(賜額) 서원으로 성삼문(成三問) 부자(父子)가 살던 유지(遺址)입니다. 성삼문의 집 전토(田土) 십수여 결(結)이 도내(道內)의 연산(連山) 땅에 있는데, 당초에는 충훈부(忠勳府)에 적몰(籍沒)됐던 것을 특명으로 환급(還給)하여 면세(免稅)해 온 지가 거의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계묘년513) 에 이르러 갑자기 전세(田稅)를 내라는 영이 있었으나, 대신(大臣)의 건백(建白)으로 노은 서원의 위토(位土)는 모두 면세할 것을 특교(特敎)로 판하(判下)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전세를 내라는 영이 다시 그전과 같아서 지금 십수 결의 전세가 곧 관아의 독납(督納)하는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영고(寧考)514) 께서 획급(劃給)하신 성대한 뜻을 추념하여, 전일에 이미 반하(頒下)하신 성명(成命)대로 특별히 전세를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원전(院田)은 다른 원전과는 구별이 있으니, 특별히 전대로 면세케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34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註 513]계묘년 : 1723 경종 3년.
[註 514]영고(寧考) : 부왕(父王)인 숙종.
197.영조실록 60권, 영조 20년 9월 22일 병신 3번째기사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성삼문·김가근·최대윤의 일, 정시 정지, 판의금부사 등에 관한 윤광천의 상소문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 증 영의정 성삼문(成三問)은 마땅히 그의 같은 종중(宗中)에서 가장 가까운 자를 취하여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야 합니다. 고 참봉 김가근(金可近)에게는 특별히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교화(敎化)를 세우도록 하소서. 최대윤(崔大潤)은 마땅히 괴원(槐院)의 예에 의하여 조용(調用)하여야 하는데, 분관(分館)할 때의 해당 관원을 논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연(進宴)하는 일이 박두하는데, 큰 일이 서로 겹치니, 정시(庭試)의 초시(初試)를 우선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판의금부사 윤양래(尹陽來)는 승강이질하다가 공사(公事)를 행하지 못하여 사유령(赦宥令)을 지체하기에 이르렀으니, 즉시 변통(變通)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삼문과 김가근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정시의 초시를 가볍게 정지할 수가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52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윤리(倫理)
198.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9월 1일 갑오 1번째기사 1746년 청 건륭(乾隆) 11년
왕세자가 시좌한 환경전에 나아가 궁관 이형만 등을 불러 《자성편》을 강론하게 하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궁관(宮官) 이형만(李衡萬) 등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론케 하였는데, ‘허물 듣는 것을 부끄러워한다.[恥聞過]’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혹시 허물이 있어서 너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이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요, 오늘의 글뜻을 네가 혹시 알지 못하고서 궁관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 역시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니라. 예전에 문묘(文廟)께서 동궁으로 계실 적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자(字)를 부르며 달 밝은 밤이면 친히 직소(直所)로 가서 그와 더불어 강론을 하였으니, 이는 본받아야 할 일이다. 사석에서 글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을 경우, 어찌 중관(中官)에게 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형만이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었을 적에 임금에게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하루 동안에 어진 사대부를 접할 적이 많고 환관·궁첩을 가까이할 때가 적으면 기질이 함양되어 덕성이 훈도(薰陶)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지금 어리신 나이로 막 덕성을 함양할 시기이니, 바로 궁료(宮僚)를 친근히 할 때입니다. 무릇 물으실 만한 것이 있으면 궁료에게 물어 보시고, 궁료가 적합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물리치셔도 됩니다. 지금 성상께서 ‘어찌 중관에게 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하교를 하시니, 신은 그윽이 개연스럽습니다. 예전에 명나라 태조는 내시들에게 글을 읽거나 글자를 익히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성군(聖君)의 심원한 생각입니다."
하니, 임금이 척연(惕然)히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진달한 말은 옳은 말이다. 일에 따라 진계(進戒)를 하니,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별히 숙마(熟馬) 한 필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21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왕실-사급(賜給) / 역사-고사(故事)
199.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2월 27일 무자 2번째기사 1746년 청 건륭(乾隆) 11년
유신을 불러 《제범》을 강하고 단묘조의 상신 김종서·황보인·정분의 관작을 추복하다
유신을 불러들여 《제범(帝範)》을 강하고 나서 단묘조(端廟朝)의 상신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苯)의 관작을 추복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황보씨와 김씨의 후손이 상언(上言)하여 신원을 청구하니 사안을 대신들에게 내려 보내어 의논케 하였는데, 대신들이 윤허하는 것이 좋다고 헌의하였으나, 임금이 정난(靖難)의 공훈에 광묘(光祖)224) 가 간여되었다는 이유로 난처해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옛날 태종께서는 정몽주(鄭夢周)를 죽이고 나서 곧바로 시호를 내려 포장하는 은전을 베푸셨는데, 두 상신의 일은 정몽주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김종서·황보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정난의 거사를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광묘께서 어쩔 수 없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종(睿宗)을 훈계함에 이르러서는,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예종께서 대리(代理)함에 이르러 드디어 당시 연좌되었던 모든 사람을 다 석방하셨으니, 그렇다면 당시에도 대개 이 두 상신을 역적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고, 선조(先祖)에서도 또한 신원하자는 의논이 제기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장애가 있어 신원의 일은 중지되었지만 그 자손들을 녹용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성의(聖意)를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훈적(勲籍)을 가지고 의문을 품으십니다만, 광묘께서 정극(正極)하신 이후 공훈을 어찌 논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성삼문(成三問) 등의 추복(追復)에 있어서도 또한 당시의 훈적에 대하여 혐의를 두지 않았는데, 유독 이 두 상신에게만 무슨 혐의를 둘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황보인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라고만 쓰여 있고 관작과 이름은 쓰여 있지 않다고 하니, 더더욱 슬픈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결단코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 또한 아뢰기를,
"당시에 주살한 것은 종사를 위한 큰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후세의 포장은 백세의 공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 가지가 병행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다른 여러 대신들도 다 같이 옳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삼문 등 여러 사람들의 일은 광묘의 정위(正位) 이후에 있었으니, 이는 바로 군상을 침범한 일이거니와, 두 사람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의 일은 매우 가벼운 데에 속한다 하겠다. 그러나 다시 상량하여 보겠다."
하였다.
이날 밤 《제범》을 강하면서 교리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옥당에 또한 《제범》이 있는데, 광묘의 훈사(訓辭)가 뒷 부분에 붙어 있습니다."
하니, 즉시 들여오라고 명하여 계속해서 읽도록 하더니,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세 번이나 감탄을 하면서 말하기를,
"아! 황보인·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마치 귀를 잡고 직접 명령하시는 것 같다."
하고, 이에 당장 전교를 써서 황보인·김종서 등의 관작을 추복시켰다. 그러자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또 아뢰기를,
"정분은 후사가 없어서 청원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은명(恩命)이 그에게만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같이 죽은 세 사람은 일체로 신원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이에 정분의 관작도 함께 추복시키게 하고, 하교하기를,
"김종서·황보인 등의 복관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헌의를 하였고 연신이 또한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헌의를 회상해서였다. 이제 어제(御製)의 훈사 서문 가운데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교명을 받들어 읽고 나니, 마치 귀를 잡고 직접 하명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픈 감회가 인다. 그리고 훈사의 말미는 곧 지난날 육신(六臣)의 복관에 대한 일을 잘 계술하라는 뜻인데, 또한 어찌 잘 계술하지 않겠는가? 지난날의 교명을 본받는 것은 곧 자식된 자의 도리이고, 또 육신을 복관시키더라도 위사(衛社)의 훈명(勳名)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볼 때 지금 세 사람을 복관시키더라도 그 훈적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지금 훈사를 받들어 보니, 서문이 감격을 자아내어 마치 이곳을 오르내리시며 지도하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신중을 기하기로서니 어찌 다시 주저할 것이 있겠는가? 김종서·황보인·정분을 특별히 복관시켜 성의(聖意)를 표창하노라."
하고, 이어 운각(芸閣)에 명하여 훈사를 간행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3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출판(出版)
[註 224]광묘(光祖) : 세조
200.영조실록 72권, 영조 26년 9월 8일 정미 1번째기사 1750년 청 건륭(乾隆) 15년
원손의 보양관에 대해 상고하도록 명하다
전교하기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도리는 사부(師傅)를 우선으로 해야 하므로 동몽(童蒙)에게는 역시 교관(敎官)이 있는데 더군다나 나라의 원손(元孫)이랴? 보양관(輔養官)은 아이 때에 보도(輔導)하는 데 불과한 자이다. 마땅히 강정(講定)해야 하는데, 고례(古例)를 비록 빙거(憑據)할 수 없으나 이제부터 마땅히 예(例)를 정해야 한다.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관과 낭관으로 하여금 심도(沁都)200) 로 내려가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의 보양관은 처음에 상고할 만한 곳이 없었으나 세조조(世祖朝) 때 성삼문(成三問)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말하기를, ‘너는 집현전(集賢殿) 달밤에 임금께서 원손201) 을 안으신 채 하교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하였고,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원손으로 하여금 칙서(勅書)를 맞이하게 할 때 익선(翊善)·찬독(贊讀)의 이름이 있었으나 인원 숫자가 없다. 사관(史官)과 춘추관 당상이 함께 강도(江都)로 가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상고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원자의 보양관을 으레 숭품(崇品)으로 가려 차임하였으나, 원손의 보양관은 마땅히 등급의 구분이 있어야 하니, 정종(正從) 2품 당상이나 3품 중에서 융통(融通)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3책 7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80면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200]심도(沁都) : 강화(江華).
[註 201]원손 : 여기서는 단종(端宗)을 가리킴.
201.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 11월 18일 기사 2번째기사 1753년 청 건륭(乾隆) 18년
춘방의 상하번에게 서연 여부를 하문하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좌부 승지(左副承旨) 이규채(李奎采)가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가 매양 주자본(朱子本) 사서(四書)·이경(二經)과 채씨본(蔡氏本) 《서경(書經)》을 원본(原本)대로 크게 써서 간행하고자 하는데, 이 서적이 만약 나오게 되면 을람(乙覽)228) 에 편할 것이니, 간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계희가 또 공장(工匠)과 양료(粮料)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이규채가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다 나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몸으로 가르치기를 매양 나에게 청하므로, 지난번 희정당(熙政堂)에서 동궁(東宮)과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는 것을 일차(日次)로 삼고 말하기를, ‘예전에 방사원(龐士元)229) 은 1백 일의 일을 하루에 결단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하였는데, 그 뒤에 원량(元良)이 다시는 하지 않고 영상(領相)도 또한 오지 않으니, 비록 몸으로 가르치더라도 상하가 보람이 없는 것을 어찌하는가?"
하였다. 춘방(春坊)의 상하번(上下番)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여 오늘 서연(書筵)을 열었는지를 하문하매, 필선(弼善) 유언술(兪彦述)·문학(文學) 조재후(趙載厚)가 대답하기를,
"오늘은 서연을 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묘(英廟)께서 성삼문(成三問)을 근보(謹甫)230) 라 부르셨고, 유 판부사(兪判府事)231) 가 또한 말하기를, ‘홍문관(弘文館)의 창살에 아직도 촛불 흔적이 있다.’ 하더라.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니, 비록 하루에 백 번 부르더라도 어찌 좋지 않겠는가?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에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 하지 말고 올해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 하지 말라.’ 한 것이 어찌 경동(警動)하지 않겠는가? 지난번 나삼(羅蔘)이 책을 가지고 갔다가 갑자기 서연을 멈추었기 때문에 물러갔는데, 오늘 강(講)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하매, 유언술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일인데, 저하가 한(漢)나라 무제(武帝)보다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하매, 유언술이 말하기를,
"한나라 무제와 송나라 휘종은 다를 것이 없어서, 한나라 무제도 만약 윤대(輪對)의 조서(詔書)232) 가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어지러운 데로 돌아갔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고, 조재후가 말하기를,
"천자(天資)는 같다고 말할 수 없으나, 한나라 무제가 만약 일찍 뉘우치지 않았다면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언술이 말하기를,
"소조(小朝)가 또 휘종이 일찍 뉘우쳤다면 환난(患難)을 면할 수 있었겠느냐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뉘우친들 무엇이 낫겠는가? 되[虜]는 이미 도하(渡河)하였는데."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는 선비를 효묘(孝廟)·숙묘(肅廟) 때처럼 정성을 여러 번 보여 불러서 오게 하여 강관(講官) 줄에 두면 반드시 큰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나에게는 불러오라고 권하고 그들에게는 돌아가라고 권하니, 이것이 과연 정성스러운 것인가? 내가 그런 것을 많이 보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7책 80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0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註 228]을람(乙覽) : 을야지람(乙夜之覽)의 준말로, 임금의 독서(讀書)를 말함. 임금이 정무(政務)를 끝내고 취침하기 전인 10시 경에 독서를 하므로 이름.
[註 229]방사원(龐士元) : 사원은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방통(龐統)의 자(字). 유비(劉備)의 신하로, 재주와 지혜가 제갈양(諸葛亮) 다음 가는 사람임.
[註 230]근보(謹甫) : 성삼문의 자(字).
[註 231]유 판부사(兪判府事) : 유척기(兪拓基).
[註 232]윤대(輪對)의 조서(詔書) : 윤대는 서역(西域)의 소국(小國)의 이름. 한나라 무제(武帝) 때 이곳을 점령하여, 흉노(匈奴)를 제압하고자 했는데, 말년에 와서 포기하였음. 곧 정화(征和) 4년(B.C. 89)에 상홍양(桑弘羊)이 이곳을 개발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사를 보내 지킬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무제는 왕년의 정벌(征伐) 정책이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음을 뉘우치고, 백성을 휴식시키고 농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서(詔書)를 내렸음. 이를 윤대(輪對)의 조서(詔書)라고 함.
202. 영조실록 96권, 영조 36년 10월 7일 무인 4번째기사 1760년 청 건륭(乾隆) 25년
유신에게 찬품을 나눠주고 입직한 유신 이담에게 홍문관 고사를 읽게 하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찬품을 내려 주었다. 입직(入直)한 유신 이담(李潭)에게 명하여 홍문관 고사(弘文館故事)를 읽게 하였는데, 대저 영묘(英廟)180) 때 〈세자181) 가〉 밤에 홍문관에 임하여 성삼문(成三問)의 자(字)182) 를 부른 일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 봉조하(兪奉朝賀)183) 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조(先朝)께 일찍이 홍문관에 임어하시어 여시(女侍)에게 명하여 창문 사이로 촛불을 들이게 하였기 때문에 매연(煤煙)의 흔적이 오래 되어도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술편(述編)에 기록하게 하였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8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전사(前史)
[註 180]영묘(英廟) : 세종.
[註 181]세자 : 문종.
[註 182]자(字) : 근보(謹甫).
[註 183]유 봉조하(兪奉朝賀) : 유척기(兪拓基).
203.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1월 29일 기사 2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소대하고, 박성원에게 세손을 성취시키는 책임에 힘쓰도록 명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또 박성원(朴聖源)을 소견(召見)하여 세손(世孫)을 성취시키는 책임에 힘쓰도록 하고 말하기를,
"옛날에 근보(謹甫)라는 자(字)를 부른 일036) 이 있었으니, 소견할 뿐만이 아니고 고요한 밤에 자주 소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내가 세제[銅圍]로 있을 때에 야대(夜對)에 촛불을 밝혔는데 역시 부비(浮費)037) 함이 있었으니, 세손의 야대에도 의영고(義盈庫)로 하여금 진배(進排)하지 말게 하고 그 촛불은 대내(大內)의 것을 쓰도록 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비용을 아끼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註 036]근보(謹甫)라는 자(字)를 부른 일 : 근보(謹甫)는 성삼문(成三問)의 자(字). 문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승화당(承華堂)에서 기거하였는데, 학문에 몰두하여 밤낮으로 해이함이 없었다. 달이 밝고 인적(人跡)이 고요한 밤이면 가끔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걸어서 집현전(集賢殿)의 숙직하는 방에 가서 숙직하는 유신(儒臣)과 토론을 하였으므로, 그때 성삼문 등은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밤에도 감히 관대(冠帶)를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었으므로 세자의 행차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문 밖에서 신 소리가 들리더니 근보를 부르며 문종이 이르렀으므로, 성삼문이 황급히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였다는 고사임.
[註 037]부비(浮費) : 낭비.
204.영조실록 122권, 영조 50년 3월 21일 갑술 1번째기사 1774년 청 건륭(乾隆) 39년
경봉각에 나아가 전배를 한 뒤 황조인의 자손을 입시하도록 명하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갔는데, 왕세손(王世孫)이 따라 갔다. 임금이 전배(展排)를 한 뒤에 황조인(皇朝人)052) 의 자손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옥서(玉署)053) 에 나아가서 비풍(匪風)과 하천(下泉)054) 두 장(章)을 외우고, 이어 유신(儒臣)들에게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고, 또 세손(世孫)에게도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으며, 다시 춘방(春坊)도 읽어 아뢰도록 하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옛날에 〈문종(文宗)이〉 옥서(玉署)055) 에 나아가 근보(謹甫)를 불렀던 융성한 뜻056) 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하고, 곧 어린 세손(世孫)과 함께 와서 입직(入直)한 유신 모두에게 승서(陞敍)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근보는 바로 성삼문(成三問)의 자(字)인데, 옛날에 문종(文宗)이 옥서에 거둥하여 성삼문의 자(字)를 부른 것은 친구의 도리로서 그를 대접한 것이었다. 이어 춘방에 나아가 세손(世孫)에게 《성학집요(聖學集要)》를 읽도록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들러서 친히 두 구(句)의 시를 쓰고 승정원·옥당(玉堂)·춘방·한주(翰注)057) 로 하여금 시를 화답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옥서의 이예(吏隷)에게는 모두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주서(注書)는 6품으로 올리고, 승지와 춘방, 좌·우사(左右史)에게는 말[馬]을 주도록 하였으며, ‘근신하고 성실해야 한다.[恪謹惟允]’는 네 글자를 친히 써서 판(板)에 걸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1책 12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72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외교-명(明)
[註 052]황조인(皇朝人) : 명(明)나라 사람.
[註 053]옥서(玉署) : 홍문관.
[註 054]비풍(匪風)과 하천(下泉) : 비풍(匪風)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下泉)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니,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권(王權)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慨歎)하면서 옛날의 주(周) 왕실(王室)을 생각하는 내용임.
[註 055]옥서(玉署) : 여기에서는 집현전을 가리킴.
[註 056]근보(謹甫)를 불렀던 융성한 뜻 : 근보는 성삼문(成三問)의 자(字). 문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승화당(承華堂)에서 기거하였는데, 학문에 몰두하여 밤낮으로 해이함이 없었다. 달이 밝고 인적(人跡)이 고요한 밤이면 가끔 손으로 한 권의 책을 들고 걸어서 집현전(集賢殿)의 숙직하는 방에 가서 숙직하는 유신(儒臣)과 토론을 하였으므로, 그때 성삼문 등은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밤에도 감히 관대(冠帶)를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었으므로 세자의 행차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문 밖에서 신 소리가 들리더니 근보를 부르며 문종이 이르렀으므로, 성삼문이 황급히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였다는 고사임.
[註 057]한주(翰注) :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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