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삼은 넓적다리에 느낌이라. 따르는 데만 집착하니, 가면 인색하리라. 상에 말하기를 ‘넓적다리에 느낌’은 또한 그쳐있지 않는 것이니, 뜻이 사람을 따르는 데 있으니 집착하는 바가 비천한 것이다. [咸卦 九三]
조광진(曹匡振 ,1772~1840)은 조선 후기를 풍미한 명필이다. 집이 가난하고 한미하여 벼슬길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호를 어눌한 사람이라는 뜻인 눌인으로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평생 겸양하는 태도로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광사와 안진경을 비롯해서 유용・장도악 등의 서첩을 얻어 익히고 또 익혀서, 드디어 신자하, 김추사 등으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는 독창적인 경지를 열었다. 특히 추사는 “그 글씨의 기발하고 뛰어남이 해동에서 일찍이 없었다”라며 극찬을 했다.
하루는 참새들이 뜰 앞 나뭇가지에서 재재거리는 소리에 새벽잠이 깨고 필흥이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曉鳥’ 두 글자를 쓰게 되었다. 대개는 이렇게 흥에 겨워 쓰면 언제나 만족한 글씨를 얻었는데, 흥에 겨워 썼는데도 ‘曉鳥’의 ‘鳥’자 밑의 넉 점이 제대로 치켜 올라가지를 못하고 아래로 축 처져서 마음에 거슬렸다. 새벽이라 더 따질 기운도 없고 기분도 나지 않아서 그만 문갑 밑에 되는대로 밀어 던지고 말았다. 일찍 깬데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멍하니 있는데, 점심나절에 어떤 손님이 찾아와서 글씨를 청했고, 다시 필흥도 생기지 않아 문갑속의 ‘효조’를 그대로 내어주고 말았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 사신을 따라 중국여행을 갔다가 글씨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권세 있는 귀족의 초청을 받아 그 사랑방에 갔다가 뜻밖에 자신이 쓴 ‘曉鳥’를 보게 되었다. 그때 마뜩지 않은 손님이 청해서 무심결에 내어준 글자가 중국땅 귀한 집 사랑채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하도록 부끄러웠던지라 그 귀족이 잠깐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필묵을 꺼내 ‘鳥’자의 치킴을 힘있게 올려붙여 놓았다.
그런데 그 귀족이 와서 보고는 남의 귀한 글씨에 손질을 해서 버려 놓았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이 아닌가? 조눌인이 여유 있고 자신 있는 말로 “실은 이것은 저의 글씨인데 ‘鳥’자의 치킴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인의 사랑에 저렇게 걸려있으니 차마 그냥 지나치질 못해서 붓을 좀 넣어 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귀족이 더욱 언성을 높이며 “당신은 글씨를 쓸 줄만 알고 볼 줄은 모른다. 효조는 새벽 새라는 뜻이다. 잠자리에서 갓 깨어나온 새가 무슨 힘이 있어서 꼬리가 올라가는가? 새벽 새는 힘없이 꼬리를 내리고 우는 법이다. 그 실정을 잘 표현했기에 이 글씨를 비싸게 사서 머리맡에 걸고 사랑했는데, 이제 아까운 글씨를 버렸다.”고 하면서 떼어 던져버렸다. 그때 조눌인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글자 한자 한자의 정치함에만 신경쓰다가 조화와 뜻이라는 대국을 놓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픔이 그를 조선 삼대명필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지만…. 그래서 易에서는 “따르는 데만 집착하면 인색하고 막히게 된다.”고 경계한 것이다. 대국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