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경무국장시기의 김구
1919년 4월 22일,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구는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자신의 일체를 다 바쳤다.
임시정부의 파수꾼이
되고 싶습니다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 하늘은 몹시 음침하였다. 상해탄은 온통 어둠의 장막에 싸여 버렸다.
김구는 아주 늦게야 김보연(金甫淵)의 집으로 돌아왔다. 김보연은 김구가 장연에서 교단에 몸 담그고 있을 때 그를 몹시 따르던 제자였다. 그때까지도 보연은 자지 않고 김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구가 기분이 아주 좋은 것을 보고 물었다.
“왼 일이십니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 오늘 제 2차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소. 석오 형이 대리총리로 선거되었소.”
김구는 자기가 국무위원으로 선거된 일은 말하지 않고 이동녕이 대리총리로 된 것만 이야기했다. 이번 회의에서 새로운 의정원 대표를 선출하고 『차장제(次長制)』를 취소하였다. 김구가 기뻐한 것은 자기가 국무위원으로 선거되어서가 아니라 4월 말까지 상해에 모인 독립 운동가들이 근 천여 명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김보연이 말했다.
“오늘 안악에서 온 성이 이씨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가 당신의 가신(家信)을 갖고 왔습니다.”
이씨라는 청년인 즉 김구가 황해도에서 교사로 있을 때의 학생 이승춘(李承春)이다.
김구가 편지를 받아보니 아내 최준례(崔遵禮)에게서 온 편지었다. 편지에 모친은 건강하며 6개월 되는 아들 인은 이젠 웃는다고 썼다. 모친이 아들을 보고 싶어 꿈에도 보인다고 했고 일본 놈들이 여러 번 와 아들의 행방을 대라고 위협했으나 모친께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고 썼다.
김구의 눈앞에 아내의 초췌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아내에게 미안했다. 결혼한지 11년이 지났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하루도 편안하게 살지 못했다. 반대로 남편 때문에 늘 조마조마하게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니 가정인들 어찌 평안할 수 있겠는가.
임시정부는 건립초기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정부 내부의 인원 변동이 빈번했다. 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첫째로는 권위 있는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3.1운동 후 국내에서는 선후하여 서울임시정부, 대한민국정부, 평안도신한민간정부가 섰고 소베트 러시아에 대한민국의회정부가 섰다. 상해임시정부까지 합하면 무려 5개의 정부가 있는 셈이었다. 이 5개 정부의 주요 성원들로는 이승만, 이동휘, 김규식, 이동녕 등이었다. 이 분산된 세력들을 통합하여 권위가 있는 단일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이 당전의 급선무였다. 둘째로는 경비문제였다. 경비가 없어 정부가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상해임시정부 제 1임 국무총리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에 이동녕이 대리총리를 맡았고 이시영은 법무총장직에서 사직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김구는 아주 안타깝고 조급해났다.
바로 이 무렵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상해에 나타나 임시정부에 한 가닥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 인물이 곧 안창호(安昌浩)다. 안창호는 탁월한 독립운동가이고 비범한 인재로 한국인들 속에서 위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안창호는 1878년 11월 1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호는 도산(島山)이다. 18세 때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독립연설을 하여 크게 소문이 났다. 1898년에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이승만 등과 함께 만인공동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20세에 미국에 건너가 서방문화와 철학을 공부하고 26세에 귀국하여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를 세웠고 독립운동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꾸렸다. 1907년에 양기탁(梁起鐸), 이동녕, 김구 등 400명의 지식인들과 함께 "과민회(過民會)"를 조직하고 독립활동에 종사했으며 1908년에 박종화(朴鍾崋), 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 이동녕(李東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고 민족계몽운동에 진력했다(다음 호에 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