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菩提야 若人이 言호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是人이 解我所說義不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是人이 不解如來所說義니 何以故오 世尊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이다
須菩提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應如是知하며 如是見하며 如是信解하야 不生法相이니라 須菩提야 所言法相者는 如來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바 뜻을 이해하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여래가 말한 바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한 것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니 이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인 것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일체의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며, 이와 같이 보며, 이와같이 믿고 이해해서 법상을 내지 않는다. 수보리야 말한 바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말한 곧 법상이 아니니 이 이름이 법상인 것이다.”
* 사견(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네가지 상이 있다고 보는 것
'여시신해(如是信解)'는 알음알이의 3단계로
첫째로 믿어 아는 것이 신해인데 철저히 믿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신해라고 했다.
두 번째가 해오(解悟)이다. 해오는 풀어서 아는 것으로 중근기의 지견이다. 해오는 사리연구를 통해 연구력을 얻었을 때 얻는 것이다.
세 번째가 정오(正悟)다. 올바른 지혜로써 진리를 확실히 깨달아 얻는 증득(證得)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실천을 통해 증득하는 수증(修證)이라고 한다.
이 공부는 상근기가 하는 것으로 공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증을 해야 공부의 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법상이라는 것은 '진리가 있다'는 관념을 뜻하는 것으로 존재 현상의 특질 또는 고유한 성질이나 특징을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정법(正法), 진리가 있다는 생각 또는 관념을 말한다.
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를 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내가 안다는 상이 있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법상이라고 한다.
이 법상은 내가 깨쳤다는 것에 집착이 되어 스스로에 만족하고 오만함이 생기기도 한다.
중국 속담에 '도고일척 마고일장(道高一尺 魔高一丈)'이란 글귀가 나온다. 직역하면 '정도(正道)의 높이가 일척이면 사마(邪魔)의 높이는 일장이다'는 뜻이다.
원래 의미는 '선비의 수양이 한 자 높아지면 그에 따른 유혹은 한 길이나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마음잡고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잡기, 술판과 여자의 화려한 유혹이 기승을 부려 마음을 흔드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그 만큼 법상을 없애기가 그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것이다.
시명법상(是名法相)이라는 것은 법을 갖추었으되 법을 갖추었다는 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위대하심은 온갖 역경 난경을 극복하고 그 크나큰 진리를 깨치고도 그 마음에 한 티끌의 법상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원불교신문, 이성택 교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내가 아상에 대한 나의 지견 곧 아견과 인상에 대한 나의 지견, 즉 인견과 중생상에 대한 나의 지견 즉 중생견과 수자상에 대한 나의 지견 즉 수자견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를 물어보니 수보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세존이 말씀하신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고 단지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일체법을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존재에 대한 상, 즉 법상을 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법상이라는 것 역시 법상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법상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법상에 집착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